#114
성희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도유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놨다고 오해하고 멋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그제야 생각에 잠긴 듯 아래를 향했던 성희유의 시선이 도유에게 닿았다.
“아니요.”
“다행입,”
“하하.”
무표정했던 성희유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자, 도유는 흠칫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성희유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도유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 내서 웃었다. 그가 웃음을 그친 것은, 도유가 그를 걱정하다가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런 방법이 있었는데. 정말 내가 왜 지금까지 생각을 못 해 봤을까.”
순식간에 달라진 어조. 도유가 ‘네?’ 하고 되묻기도 전에, 성희유가 생긋 웃으며 도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워요, 도유 씨.”
“네…. 네? 도움이 되었습니까?”
“네. 굉장히. 이만 자리로 돌아가요.”
평소의 성희유로 되돌아왔다. 도유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화색하며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팀장실을 나갔다.
도유가 팀장실을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성희유는 주변에 널브러진 책들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송유원과 대화한 뒤 주말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동생에게 사용한 마법식을 처음부터 뜯어보고 다시 분석해 본 성희유였다.
그와 관련되어 의심스러운 부분들에 대한 내용이 적힌 마법 서적들을 빌려 온 성희유는 송유원이 첫째 아들을 포기했던 시점에 그녀가 자신이 빌린 것과 동일한 서적들을 대여한 이력이 남아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본디 비밀 유지 사항이었으나 사서 한 명쯤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어렵지 않게 손에 넣었다.
수천의 마도서로 치료를 받고도 의식 없는 동생의 몸. 새로 접한 지식들을 정리한 그는 동생이 지금까지 의식이 없는 이유에 대한 가설을 한 가지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도유가 지적해 준 것은 딱, 그 가설의 결과를 알아내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스스로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 기이할 정도였다.
성희유는 정리를 마친 후, 팀장실 문을 잠갔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동생을 재워 둔 간이 침실에 다시 들어갔다.
*
팀장실에서 나온 도유는 제 등 뒤로 굳게 닫힌 팀장실 문을 몇 번이고 돌아보다가 결국 제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에 원래의 성희유의 페이스를 찾은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아예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왜 이리 늦었어요?”
미리 도유의 옆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청신이 서운해하며 물었다. 도유는 저게 다 연기라는 걸 알았다.
함께 데이트를 하고, 2박 3일을 보낸 호텔에서 오붓한 - 이라고 쓰고 도유는 여러모로 고생했던 - 시간을 보낸 청신은 출근해서 다시 마주치자마자 눈에 꿀이 떨어질 정도로 도유의 얼굴만 보고, 헤실헤실 웃고 있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도유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좋은지 미인의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생기발랄하다. 그래 봤자 반가면을 쓰고 있어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일 것이 뻔했다.
“잠깐 대화 좀 했어. 그보다 청신아. 몸은 좀 어때?”
“이제는 안 아프다니까요. 걱정 말아요, 형.”
청신이 도유의 의자를 손바닥으로 약하게 탁탁 쳤다. 어서 와서 앉으라는 뜻이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도유가 의자에 앉았다.
목소리를 낮출까 싶어 청신 쪽으로 몸을 숙이자 그가 도유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보단 형이 걱정이죠. 주말 내내 제게 매달려서 계속,”
도유가 다급하게 청신의 입을 틀어막고 곁눈질로 백휘 쪽을 보았다.
아침부터 업무로 바쁜 백휘는 다행히 아직도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이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모니터를 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간간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도유는 백휘를 다른 손으로 가리킨 후, 청신의 입을 가리킨 다음 자신을 가리키고 제 목 아래를 그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해서 백휘가 들으면 죽을 거다. 내가. 청신은 연인의 뜻을 알아듣고 순종적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도유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내렸다.
이미 전에 같은 팀원인 화영이 다른 팀원들에게 소문을 내면서 백휘의 귀에도 들어갔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에서 대놓고 연애를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애정 행각을 서슴없이 하는 청신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잠시만 있어 봐.”
“네.”
청신도 진정시킬 겸, 이번 기회에 미뤄 왔던 일을 하자고 생각한 도유는 청신의 팔꿈치 위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런 뒤, 서서히 정령의 힘을 끌어 올리며 청신의 몸을 집중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주말에 살펴봤어야 했지만 워낙 정신이 없었던 터라 살펴볼 수가 없었다.
‘호텔에서 정말, 짐승처럼 계속 붙어 있었지.’
금요일에 호텔에 체크인을 한 이후, 안 나가고 계속 침대에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하고, 지쳐서 자다가 눈뜨면 하고, 식사 뒤에 또 하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청신의 몸에 깃든 흉성의 기운을 덜어 내겠다는 일념하에 했던 행동이었다.
‘좋긴 했지만….’
그때의 청신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도유의 적극적인 행동에 처음엔 당황하다가, 무슨 특별한 날이냐 하면서 기꺼이 도유를 안았다.
오히려 마지막에 가서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며 쾅쾅 뛰는 제 심장 위에 도유의 손을 올려놓고 눈물을 또르르 흘리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 덕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에 지금 확인하게 되었다.
노력을 한 덕분인지 청신의 심장에 넘실거리며 그의 전신에 퍼져 나가던 새까맣고 부정적인 에너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몸 주변에 순환하는 마력의 흐름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법사가 기분이 좋으면 이따금 그에 감응하듯 주변의 마력들이 반짝이던데, 오늘따라 유난히 청신이 반짝이는 이유가 이 마력들 때문이었다.
도유는 마지막으로 점검차 청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부하듯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런 도유의 모습을 보며 청신은 당장 그를 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청신은 도유가 제게 데이트를 권하고, 호텔에서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는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바로 눈치챈 건 아니었지만 조용환 때를 떠올리고, 도유의 체액이 묻는 부위부터 흉성의 힘이 정화되어 자신의 숨을 조여 오던 고통이 덜어지다 사라지는 걸 느꼈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정령의 힘을 사용할 때, 달빛이 맺힌 것처럼 광채를 품는 푸른 눈이 너무나 아름답고 시선을 사로잡아 모를 수가 없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도 도유가 정령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청신은 보석을 감상하듯 도유의 눈을 빤히 보았다.
어렸을 때에는 지금보다 더 강한 빛이 깃들어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시끄럽게 짖던 사람들도, 모두 정령이 만든 불에 휩싸여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덧없이 타 버렸다.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불로 만든 꽃이 제 세상에 처음으로 가져다준 온전한 고요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반짝이던 도유의 눈은 평생 잊지 못할 터였다.
“도유 형. 이제 움직여도 돼요?”
“아, 응. 움직여도 돼.”
도유의 허락이 떨어지자 청신은 나긋하게 웃으며 도유의 목깃을 잡았다. 먼지를 떼어 주려는 듯 가벼운 손길에 도유는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자기 쪽으로 도유를 끌어당긴 청신이,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을 막지 못했다.
도유는 불에 데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청신을 떼어 놨다. 그러곤 재빨리 몸을 돌려 백휘 쪽을 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업무에 집중한 그가 자신과 청신의 뽀뽀를 보지 못했을 거라 확신하면서.
그러나 헛된 꿈이었다.
“…….”
“…….”
백휘와 딱 눈이 마주쳤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많은 상황을 거쳐 왔던 도유였지만 지금은 머리가 평소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니 청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수긍을 하자니 괜스레 부끄럽다.
당황한 채 입만 가까스로 벙긋거리는 도유를 보던 백휘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청신은 눈부신 웃음으로 백휘의 시선에 화답했다. 천화 마을에서 백휘와 처음 만난 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러나 청신도 백휘도 도유가 자리로 돌아오기 전까지 서로 고갯짓도, 시선도 나누지 않았기에 지금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거였다.
“…천화 마을에 왔던 신입?”
백휘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금의 청신은 반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다. 기존의 얼굴을 알면 알아보는 데 어려움은 없다지만, 인지 능력을 떨어트리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알아보기엔 힘들 텐데 용케도 알아본 백휘의 유능함에 도유는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청신은 그 고갯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신입이긴 하지만 지금은 도유 형의 연인이죠.”
“야, 이청신…!”
“왜요, 도유 형?”
이미 얼굴이 알려진 판에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무의미하다 판단했는지 청신이 가면을 벗으며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그 덕분에 드러난 도유를 담은 생생한 녹색 눈이 마치 경고처럼 보여, 도유는 멱살을 쥐려던 손을 내려 다소곳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네 말이 맞다고.”
“그렇죠?”
“화영이에게 이야긴 들어서 알고 있었어. 그때 메시지를 보냈었지만, 직접 말해 주고 싶었어. 진심으로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