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고맙긴. 내가 도와줄 다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응. 그럼 이만 가 볼게.”
성희유가 희미하게 웃고는 협회장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그녀는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남은 찻잔을 보았다. 전혀 줄지 않은 양이다.
마시는 척했던 것임을,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증명과 다를 바 없는 찻물의 양에 그녀는 비통하게 눈을 감았다.
*
도유는 생각했다.
성희유가 이상하다고.
현주아에게 걸려 있던 저주 마법을 성공적으로 해주하는 것으로 도유와 청신은 개인 임무를 완벽하게 마쳤다.
개인 임무의 경우 보고서는 의뢰자인 현영하 이사에게만 해도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성희유를 통해서 임무를 받은 터라, 약식으로나마 보고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기에 성희유에게 보고를 위해 팀장실에 방문한 도유는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자마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평소라면 새벽 일찍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을 성희유가 제복도 입지 않고 사복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책상만 보고 있었다.
와중에 그의 주변에는 온갖 마법 서적들이 한가득이었다. 팀장급만 빌릴 수 있는 레벨임을 증명하는 라벨이 붙은 책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안에 깐깐한 성희유가 쓰레기처럼 사방에 펼쳐 놓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크할 때까지만 해도 ‘네’라고 대답하기에 멀쩡히 있을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반사적인 대답이었던 듯했다.
도유가 팀장실에 들어온 지 좀 시간이 지났음에도 성희유는 여전히 멍한 모습이었다. 그가 들어온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것처럼.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상황 모두.
“저,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아이의 주홍색 눈이 도유를 향했다. 그는 꿈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것처럼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입술을 벌렸다.
“…아.”
탄식과 닮은 작은 목소리. 이윽고 흐릿했던 주홍색 눈에 빛이 돌았다. 그는 작게 숨을 삼키더니 바로 시계로 고개를 움직였다. 시간을 확인한 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못 볼 꼴을 보여 드렸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성희유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작은 몸이 휘청이는 걸 보고 도유는 재빨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넘어지지 않도록 몸을 지탱해 주었다.
“팀장님,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성희유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은 도유에게 큰 충격이었다. 소름 끼친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코 쇠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단단한 기둥에 금이 간 것을 본 사람처럼 성희유의 행동 하나하나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도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희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 몸에 잠이 부족할 뿐이에요. 테스트를 해 보느라 오늘은 거의, 재우지 못해서…. 아…. 안 되겠네요. 재워야겠다.”
머리 회전이 평소보다 안 된다 싶었는데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몸으로 있었기 때문이란 걸 깨달은 성희유는 도유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바로 의식을 끊어 버렸다.
성희유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의 몸을 완전히 안아 들게 된 도유는 숨을 크게 삼키며 성희유의 몸을 안아 들고 크게 당황했다.
평소 비슷한 상황에도 이성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더 냉정하게 대응했던 도유는 그 대상이 성희유가 되자 단번에 이성을 절반이나 잃어버리고 말았다.
“팀장님! 팀장님! 어, 어떡, 아니 치유부! 치유부를 불러야! 청신, 읍!”
밖에 있는 사무실에 있을 청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목청을 높이려던 도유는 그대로 입을 막는 커다란 손에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귀가 울려서 그런데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도유 씨.”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성희유의 본 모습에 도유가 서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유의 입을 막았던 손을 뗀 성희유는 축 늘어진 어린 몸을 안아 들었다.
“앉아서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는 아이의 몸을 안아 들고 팀장실 가장 안쪽, 굳게 닫힌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혼자 팀장실에 남게 된 도유는 황망하게 성희유가 사라진 곳을 보았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무슨 일이시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팀장실로 돌아온 성희유는 언제 멍하니 앉아 있었냐는 듯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어린 몸에 잠이 부족한 까닭에 그리 있었다는 것처럼, 성인의 모습인 그의 눈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몇 번 봤지만 아직도 그리 익숙하지 않은 모습. 그러나 성희유가 저 모습으로 몇 번이고 도유를 살려 줬던 적이 있기에 거북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걱정될 뿐이었다.
“이번에 현영하 이사님의 개인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관련하여, 임무에 대한 보고를 약식으로나마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그거라면 하지 않아도 돼요. 도유 씨가 올린 보고서를 공유해 주셨기 때문에 내용은 알고 있거든요. 저주 마법이었다고 했죠? 고생했어요.”
“알겠습니다.”
성희유는 나가도 좋다는 듯 가볍게 문을 눈짓했다. 그러나 도유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냉큼 나갔을 도유가 가만히 서 있자, 성희유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함께 기운다.
꽁지를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길어 목 밑까지 닿는 하얀 머리카락. 단정하고 짧게 자른 아이의 몸과는 전혀 다른, 무신경하게 방치한 머리카락이다.
“할 말이라도 있나요?”
“팀장님,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거의 동시에 내뱉었다. 성희유가 눈을 깜빡였다. 도유는 약간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조금 빨리 물어볼 걸 하고. 그런 후회를 읽은 성희유는 작게 웃었다. 같은 웃음이건만 아이의 모습일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괜찮지 않다고 하면 도유 씨가 어떻게 할지 궁금한데요.”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에도 도유는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사적인 일이어도?”
“네.”
단호한 대답이다. 성희유를 응시하는 도유의 눈에 한 점의 거짓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도유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성희유기에,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한편 도유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성희유의 흐트러진 모습이, 텅 빈 눈으로 책상에 시선을 둔 채 멍하니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무서웠다.
성희유는 도유에게 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는 절대 인정해 주지 않겠지만 도유가 바랐던 가족이라는 것이 성희유와 자신의 관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을 정도로 성희유의 존재는 도유에게 뜻깊었다.
“팀장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것을 조금이라도 더 돌려 드릴 수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돕겠습니다.”
성희유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도유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도유 씨.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있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의식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요?”
“의식이요?”
“네. 지금 이곳에서 말을 하고, 인지를 하고, 생각을 하는 ‘나’라는 존재의 의식이요.”
톡톡. 그의 긴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도유는 생각에 잠겼다. 사고하는 ‘의식’은 영혼에 깃든 걸까, 아니면 육신에 깃든 걸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도유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15년 전에 팀장님께서 인형을 만드셨을 때 봤던 것들을 기반으로 생각한다면, 의식은 영혼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도유는 15년 전 성희유와 함께했던 임무를 떠올렸다.
그 아수라장에서 유일한 빛이었던 그의 대검의 궤적과 그 대검에 목이 베인 범죄자들이 그의 인형으로서 움직이던 모습을 복기하듯 머릿속에서 한번 되뇐 도유가 답했다.
“그때 팀장님께서 저를 연구실에 끌고 갔던 마법사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팀장님이 마법사의 목을 벤 순간 그 사람의 몸에서 특이한 색깔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팀장님이 그 사람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마법을 사용하셨고요.”
“그랬죠.”
“그 뒤에 그 마법사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잖습니까. 그 사람뿐만 아니라 팀장님이 마법을 사용한 사람들은 전부 동일했습니다.”
도유는 잠시 말을 끊고 묵묵히 경청하는 성희유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평소처럼 개소리한다고 웃으며 욕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지만, 성희유는 진지한 얼굴로 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특이한 색깔의 마력이 빠져나간 뒤에 그렇게 된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팀장님이 죽은 사람의 기억을 마법으로 빼앗고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기억’과 ‘의식’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그러니까 팀장님의 마법은 육체에 퇴적층처럼 쌓인 기억과 의식을 볼 수 있는 마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기억을 빼낼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
“물론 기억은 뇌의 영역입니다만. 그렇게 따지면 의식도 마찬가지니까… 바보 같은 소리 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