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이프를 빼앗아 든 청신이 자기 심장을 찌르려는 걸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도유가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나이프를 쥔 청신의 팔을 꽉 붙들어 막았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곧 그 숨소리가 자신의 것임을 깨달았다.
“야!! 이청신!!”
“제 기분 이해했어요?”
청신이 언제 그랬냐는듯, 나이프를 휙 던져 바닥에 떨어트린다. 도유는 눈을 한두 번 깜빡이다가, 자신이 한 행동이 고스란히 되돌아왔다는 걸 인지하고는 경악했다.
“말로! 말로 하면 되지 왜 이딴 짓을 네가 해!”
“때때로 말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잖아요. 게다가 도유 형이 제 앞에서 자해한 게 이번이 세 번째라는 거 알고 있어요?”
웃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만들어 낸 표정이라는 것은 눈빛만 보고도 알았다. 도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첫 번째는 조용환 때를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섬에서 정령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청신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실험을 해 보려던 것뿐이었다.
치유 아티팩트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이런 찔린 상처는 일상에 방해되지 않도록 잘 조절할 자신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만 ‘괜찮은’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입장에서는 확실히 거북했을 거다.
“내가 잘못했어.”
풀이 죽은 얼굴로 도유는 고개를 툭 떨궜다.
“미안해. 안 그럴게.”
언제나 자신을 아껴 주는 청신을 알기에 더더욱 미안했다. 점점 고개가 깊이 떨어졌다.
그는 무릎 위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대답 없는 청신을 차마 볼 생각을 못 했다. 이번 일로 화가 많이 나서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질렸다며 나가라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자 우울해졌다.
청신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손을 뻗고는 무릎 위에 곱게 올린 도유의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개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유를 알려 줘요. 그럼 용서해 줄게요. 도유 형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 아니란 거,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
마음이 울릴 정도로 다정한 말이었지만 도유는 더욱 우울해졌다.
도유의 피는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다. 명확하게는 정령의 힘을 사용한 채 피를 흘리면 그 피에 힘이 깃드는 형식이었다.
청신은 과거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정화하기 위해 가장 정순하고 깨끗한 힘이 필요하다 했다. 실제로 조용환이 부정적인 에너지에 삼켜졌을 때 그를 구해 냈으니 이미 입증된 거나 다름없다.
그의 아버지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청신을 괴롭히고 있는 힘은 흉성에 쌓일 대로 쌓여 넘치는 부정적인 에너지다.
그러니 평소보다 더 정령의 힘을 누적시킨 피로 정화시키는 게 가능할 터였다. 이번에 실험해 보고 정말 정화가 된다면 청신도 몸이 아프지 않을 테고, 범법자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생각으로 행했던 거라곤 죽어도 말 못 한다.
그가 범법자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청신이 자신을 떠나갈까 봐, 아직도 두려웠으니까.
“도유 형.”
여전히 도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청신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걸,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황홀한 눈빛으로 도유를 탐하듯 바라보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신은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연인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다면, 이것 하나만 대답해 줘요. 그럼 이해해 줄 테니까.”
“……어떤 거?”
솔깃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드는 귀여운 모습에 청신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저를 위한 일이었나, 아니었나.”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고마워요. 그럼 됐어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도유를 부드럽게 껴안는 청신의 모습에, 도유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지금 몇 시죠?”
“8시.”
“생각보다 많이 지났네요. 아까 봐 달라고 했던 마법식 다시 봐 드릴게요. 내일 해주하는 걸 목표로 하는 거죠?”
“응. 내일모레 임무가 끝나잖아. 그 전에 해주해 주고 싶어. 그런데 몸 괜찮아? 아. 이거 먹어. 산은하 씨가 깨어나면 먹으라고 했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약과 물을 가져와 청신에게 내밀었다. 청신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순순히 약을 먹는다. 그 모습을 보며 도유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청신에게 제 피를 실험해 볼 수 있을까. 정령의 힘을 개방한 상태에서 피에 힘을 농축시키는 것은 해 본 적이 없지만 일단 최대한 농축시킨 뒤에 청신이 제 피와 접촉하게 해야 했다.
‘화낼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연스럽게 피 칠갑을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손바닥을 찌르지 말고 실수로 베인 것처럼 해 볼까. 은근슬쩍 피를 발라 반응을 보면 되지 않을까?
‘아니, 잠깐. 심장에서 퍼져 나가는 거였으니까 심장에 발라야 하지 않나? 조용환 씨 때는 전신이 뒤덮여서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는데. 모르겠네.’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을 해 봤지만 도저히 심장에 피를 바를 만한 상황도 그려지지 않았고, 실제 상황이 있다 한들 무슨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상황일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고뇌했다.
도유는 곰곰이 키워드를 곱씹어 봤다. 피. 심장. 체액.
…체액?
“도유 형, 혹시 마법식 썼던 종이, 챙겨 왔어요?”
“어, 어? 아니.”
“그럼 제가 다시 적을게요.”
“아니야, 내가 적어 줄게.”
“괜찮아요.”
도유에게 조금 모질게 굴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청신이 도유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 테이블 위에 있던 태블릿과 전용 펜을 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유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청신이 제가 썼던 마법식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적는 걸 멍하니 보았다.
그의 머릿속엔 지금 ‘체액’이란 단어로 가득했다. 체액. 생각해 보면 정령의 힘이 피에 응축되는 이유는 순수하게 그것이 계약자인 도유의 몸에서 나온 것이기에 거기에 응축이 되는 거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다른 체액, 가령 침이나 눈물 같은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체액을 청신의 심장에 닿을 수 있게 하는 방법.
“…….”
저절로 그동안 청신과 몸을 섞었던 나날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능하구나.’
빌어먹게도, 쉬웠다. 도유가 적극적으로 매달리면 청신은 얼마든지 기회를 줄 게 뻔했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낯이 뜨거워져 도유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유 형 아파요?”
“아니…. 그보다 청신아.”
“네.”
“별 탈 없이 이번 임무가 끝나면, 그, 그러니까….”
평소와 다르게 말을 더듬는 것이 의아했는지 청신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도유를 본다. 그 시선에 한참을 망설이던 도유가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청신에게 권했다.
“나랑 그, 데이트할 겸 놀러 갈까? 마침 끝나는 날이 금요일이고, 주말엔 큰일이 안 터지면 온전히 즐길 수 있으니까…. 호텔은 내가 예약할게.”
데이트를 할 때는 항상 청신이 먼저 권했고, 호텔 같은 곳에서 외박은커녕 도유의 집이나 청신의 집만 오간 게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난생처음 해 보는 데이트 신청에 얼굴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청신이 입술을 벌린다.
적나라하게 놀란 얼굴에 도유는 더더욱 민망해져 침대에 고개를 처박고 싶었다. 그리고 그 충동에 따르려던 때, 청신이 행복에 겨운 얼굴로 활짝 웃는 모습에 움직임을 멈췄다.
“좋아요. 꼭 데이트해요, 도유 형.”
“…응. 어디 갈지는 같이 정하자.”
“네. 그렇게 해요. 같이.”
상상만 해도 기쁜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청신이 말을 이었다.
“도유 형이랑 오붓하게 데이트하려면 이걸 완벽하게 완성시켜야겠네요.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해. 마법은 네가 써야 하니까.”
마법사가 아니고, 해주 아티팩트를 만들 시간도 촉박하기에 마법을 써야 했다. 청신은 걱정 말라는 듯이 뻐기며 대답했다.
“제가 누군데요. 도유 형 애인이에요. 믿고 맡겨 주세요. 도유 형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얼굴로 데이트 신청까지 했는데, 어떻게 실수할 수 있겠어요?”
“그래, 그래. 믿는다.”
청신은 도유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유가 기존에 세웠던 마법식을 적고, 최대한 효율을 끌어내기 위해 수정을 시작한 그의 녹색 눈은 반드시 데이트를 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곁에 앉은 덕분에 그 의지를 한눈에 알아본 도유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잠시 몸을 떨었지만 애써 그 생각을 떨쳐 냈다.
*
어두운 방. 겨우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사위를 밝힌 것은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의 빛이다.
방 안에 떠도는 먼지가 스탠드의 빛 아래로 나방처럼 몰려들고 흩날리는 게 언뜻 보였지만 그 책상 앞에 선 남자, 성희유는 우두커니 서서 과거의 흔적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특수한 잉크로 특수한 종이에 써 내려간 마법식은 그가 동생의 의식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도를 했던 그 흔적들이었다.
그의 주홍색 눈이 바쁘게 종이 위를 오갔다. 손끝으로 더듬다가 한쪽에 올려 둔 새 종이에 뭔가를 메모했다. 그 메모의 옆에는 현재 그의 희망이 되어 주고 있는 마법식이 깨알같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