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오히려 성희유가 제게 정신계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것을 약점으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흔적은 영연의 몸에 남을 테고, 그대로 카단으로 향하면 성희유는 특수부에서 곧바로 사형수가 될 테니 말이다.
“어디 한번 해-.”
보시죠, 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영연은 눈을 부릅떴다.
이상하다. 시야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고개를 확 꺾은 것처럼 보였다.
의아함을 느끼기도 잠시, 시야가 뚝 떨어졌다. 제 손이 머리채를 붙들어 허벅지 위에 올렸다. 영연은 이 상황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제 옷이 보였다. 시야를 아래로 내리니 하반신이 너무나 가까웠다. 제 몸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영연은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목이 보였다. 언제나 보던 것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 낯설었다. 마치 잘 만들어진 마네킹을 보는 기분이다. 영연은 곧 그 이유를 깨닫고 입을 벌렸다.
목 위에 있어야 할 자신의 머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분명 사고를 하고 있으며, 보고 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영연은 숨을 삼켰다가 자신이 호흡하지 않는 걸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인지는 빨랐다. 목이 잘린 거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들 하죠.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아무런 높낮이가 없는 성희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마법은 인간의 육신에 영혼이 없을 경우, 원하는 기억을 뽑아내는 데 특화되어 있어요. 기억을 한 번 뽑아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육신의 붕괴가 빨라져서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당신도 모처럼 손에 넣은 인형을 망가뜨리긴 싫잖아요?”
무엇이 재밌는지 성희유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한 번 죽여야 해서. 양해해 줘요. 당신도 제게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잖아요.”
상냥함을 흉내 낸 잔인한 속삭임과 동시에 영연의 의식이 사그라드는 불꽃처럼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의식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성희유가 속삭이듯 작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날 이용하고 싶다면 최소한 목숨은 걸어야지.”
*
“청신아, 이것 좀 봐 줘.”
도유의 요청에 청신은 하고 있던 것을 곧바로 내팽개치고 제 연인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폭우 속에 방치된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서 안쓰러움을 자아내던 녀석이 지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도유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도유 형. 뭘 보면 될까요?”
꽃이 피어난 듯 활기찬 목소리까지 아주 밝고, 밝다. 유난히 빛이 나는 미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도유는 현주아를 호위하며 계속 고민했던 결과물을 내보였다.
“이게 가능한지 봐 줬으면 좋겠어.”
“수식을 살펴봐 드리면 될까요?”
“응.”
도유는 마법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마나 감응력이 높은 일반인이다.
마법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이론만 습득했을 뿐, 마법식을 써도 그게 실제로 구현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도유가 마법식을 만들면 가능한지에 관한 여부는 마법사인 청신에게 부탁해야 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청신은 진지한 얼굴로 A3 용지에 빼곡하게 쓰인 마법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단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 신중한 빛으로 반짝이는 현묘한 녹색 눈.
자신의 일처럼 신중하게 마법식을 검토하는 모습을 보며 도유는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지난 나흘간, 도유는 청신에게 모질게(?) 굴었다. 그랬는데도 청신은 불쾌해하거나 화를 내는 기색도 없이 그저 도유의 부름이 기쁘다고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이런 청신의 모습은 얼굴에 철 가면을 쓴 사람도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아니지. 잘못한 건 청신이었어. 내가 아니라.’
도유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이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정말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고 주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원흉은 청신이었다.
나흘 전. 현주아를 본가에 데려다준 뒤 청신의 집으로 귀가했을 때 청신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도유를 덮쳤다.
‘임무 중엔 안 해!’
‘오늘 임무는 끝났잖아요.’
‘아니, 임무는 내일도, 흐으, 하지마, 이청신. 화낼 거야.’
‘그치만 형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는걸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도유를 안았다. 그것도 임무 중에 타고 다니는 차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주차장이 청신의 집 지하에 있는 개인 주차장이었다는 것뿐이었다. 도유는 그날 몸이 아작 나는 줄 알았다.
침대에서 할 때와는 다르게 자세도 불편해서 조심해야 할 게 많았고, 무엇보다 도중 조금만 방심하면 머리를 박았다. 위든 옆이든 아래든.
다음 날 다시 임무에 복귀했을 때는 청신이 반쯤 도유를 안고 다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근육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특히 그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도유 형, 지금 표정 어떤지 알아요? 너무 야해요. 보여 주고 싶어요.’
‘아. 여기 만져 봐요. 여기까지 들어온 거 느껴지세요?’
‘이런 것도 좋네요, 형, 좋아 죽으려고 하는데, 거짓말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이렇게, 조금만 움직여도 자지러지잖아.’
괜한 걸 떠올렸다. 지금도 머리를 박고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도유는 그날부터 청신에게 화가 난 척을 했다.
청신의 집에 가지 않고, 식사 권유를 비롯해 단둘이 여가 시간에 하는 모든 것들을 거절하는 것은 물론, 업무 외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청신이 치근덕거려도 최대한 무시했다.
‘도유 형, 저 안 봐 줄 거예요? 응? 도유 형. 화난 거 알겠어요. 근데 손만 잡아 주면 안 돼요? 도유 형이 저 버릴까 봐 무서워요. 도유 형 목소릴 많이 듣지 못해서 매일이 악몽 같아요. 저 불러 주지 않아도 되니까 뭐든 말해 줘요.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요.’
…하고 달라붙는 탓에 손을 잡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괜히 쓸데없는 업무 브리핑이나 신문 읽어 주기를 했지만, 어쨌든.
“이 식은 저주 마법을 상쇄해서 해주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인지로 해주하는 방식이네요. 수정해야 할 부분이 몇 부분 보여서 그런데 메모해도 돼요?”
“응. 부탁해.”
청신은 도유가 볼 수 있도록 들고 있던 종이를 그의 책상 앞에 내려다 놓고,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일순 수작질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청신은 마법식의 한 곳을 짚으며 말했다.
“이 부분에서는 이런 식으로 수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뒤에서 호응하는 식에 지금 쓰신 방법도 적합하지만, 대상이 일반인이라서 좀 더 안전성을 찾고 싶으신 거 맞죠?”
“맞아.”
도유의 대답에 청신이 고개를 끄덕인 뒤, 슥슥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유가 적은 마법식 아래에 자신이 다시 수정한 식을 적고, 설명하는 청신의 목소리가 도유의 귀를 간질였다.
도유는 청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종이 위를 누비는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손가락이 감고 있는 펜. 그 펜으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눌러 새로운 흔적을 남긴다.
어떻게 보면 늘 보는 모습이다. 현주아에게 걸린 저주 마법을 안전하게 풀기 위한 준비 과정. 다른 임무를 하고 관련된 서류 작업을 할 때도, 아카데미에서 함께 졸업 작품을 만들었을 때도 계속 보던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따라 이렇게 멋져 보일까.
도유는 쿵쿵쿵 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의 고동을 인지하고 당황했다.
물론 이청신이란 인간은 잘생기고 예쁘다. 보기 드문, 아니 앞으로도 볼 수 없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못 박히고, 두근거려서 자꾸만 호흡이 떨렸다. 이해할 수가 없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자문해 봤지만 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한창 설명하던 청신은 제 손이 아니라 제 얼굴에 못 박힌 도유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도유 형?”
청신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도유가 ‘어, 어.’ 하고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자, 이윽고 미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새삼 제게 반하셨어요?”
청신의 입장에서는 장난으로 한 질문이었지만, 도유에게는 깨달음이자 답이었다. 도유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몰렸다. 그리고 그런 도유의 얼굴에 홍조가 도는 걸 고스란히 앞에서 목격한 청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말이, 맞아…. 네 말대로야.”
가만히 중얼거리는 도유의 목소리에 청신의 손에서 펜이 툭 떨어졌다.
신록을 품은 녹색 눈 위에 떠오른 광채를 본 도유는 그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하는 바였다. 나흘 전을 제외하면 평소보다 접촉을 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청신이 도유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키스하려는 것임을 알고 도유가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풀썩.
당장 저를 잡아먹을 것만 같던 청신이 입술을 묾과 동시에 제 품에 쓰러진 것이다.
얼결에 청신의 상체를 안은 도유는 온전히 제게 기대 오는 청신의 무게에 당황했다. 더욱 당황스러운 건 그다음이었다. 품에 안은 청신이 고통스럽게 거친 숨을 내쉬며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신아? 이청신! 정신 차려!”
겨우 고개를 든 청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물들고, 싱그럽던 녹색 눈조차 고통으로 흐려진 채 도유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