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제 누드 사진이라면 찍어 둔 건 없지만 지금 바로 벗어서 보여 드릴 수 있으니 얼마든지 말해 줘요, 형.”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에 도유는 청신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먹였다. 아야, 하고 엄살을 피우며 이마를 감싸 쥐는 모습이 참 애처로웠지만 말끔하게 무시했다.
“나 목마르다.”
“물? 음료수? 어떤 거 마실래요?”
도유에게 맞은 부위를 보여 주며 보살핌과 이쁨을 받기 위한 첫 번째 준비로 눈시울을 적시던 청신은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도유는 잠시 고민한 뒤에 말했다.
“그냥 미지근한 물… 아니, 단 음료수였으면 좋겠어.”
“좋아요.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청신이 다시 방 밖으로 냉큼 나갔다. 겨우 혼자가 된 도유는 갓난아기 때부터 찍은 사진이 있다는 두꺼운 앨범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묵직한 무게. 요즘에는 이렇게 인화를 해서 보관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이런 것도 제법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도유는 앨범의 표지를 넘겼다.
「우리의 작은 기적들을 위해.」
직접 적은 글귀. 그것을 잠시 보던 도유가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번에는 크게 인화된 가족사진이 한 장 있었다. 도유는 사진을 보고 굳었다.
지금보다 더 어려 보이는 송유원이 청신으로 보이는 아기를 껴안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바로 옆에 다감하게 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성화의 마도서가 있던 방에서 만난 청신의 아버지라 밝힌 이와 똑같은 남자의 얼굴에 놀란 것도 아니었다.
도유를 놀라게 한 건 남자의 품에 안긴, 또 다른 아이였다.
그리고 사진의 밑에 작은 글귀가 보였다.
「사랑하는 나의 달 송유원,
우리의 기적이자 별빛인 이청신, 이유현과 함께 이청현이 찍다.」
청신이 그동안 자신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제법 신선한 충격을 느낀 도유는 물끄러미 사진 속의 이유현을 보았다.
청현의 품에 안긴 아이는 청신과 1, 2살 정도 차이가 나 보이는 송유원을 꼭 닮은 아이였다.
아이는 카메라가 아니라 유원의 품에 안긴 청신을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제 동생이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도유는 그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천천히 앨범을 넘겼다.
놀러 가서 찍은 사진, 카단의 제복을 입은 유원의 사진, 제단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따스한 눈으로 활짝 웃으며 청현이 청신과 유현을 안고 있는 사진 등이 가득했다.
가족들끼리 단란한 시간을 보낸 증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어지다가, 갑자기 끊어졌다.
사진에서 청현과 청신의 모습이 사라졌다.
조금 더 성장한 유현의 단독 사진과 유원만 찍힌 사진이 몇 장 더 이어지다가 유현의 6살 생일 사진을 마지막으로 빈 페이지가 자리를 대신했다.
다른 앨범에 있나 싶어서 도유는 곧바로 다음 앨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첫 장을 보고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청신이 있었다.
첫 앨범에 나왔던 마지막 사진보다 더 성장한 모습으로 무표정하게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이었다.
도유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 사진 밑에 기재된 연도와 월일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적성교가 무너진 날로부터 한 달 뒤의 날짜였다.
그는 덧그리듯 청신의 어린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마법진이 새겨진 종이를 손바닥 위에 올린 작은 손이 떠올랐다. 사진 속 청신은 아이답지 않게 무릎 위에 그 작은 손을 얌전히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청신의 모습은 정물화처럼 보일 정도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에 사물이 없었더라면 필시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임에도 감정이 사라진 무표정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곧 지금의 청신은 잘 웃고 잘 우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떠올리자 통증이 가셨다.
‘…감정이 풍부하다 못해 넘칠 정도지.’
특히 침대에서는 더욱 그랬다. 흥분할수록 적나라한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도유를 안으며 야한 표정을 짓거나 야하게 웃는 등, 하여간 굉장히 풍부했다.
“도유 형, 형이 좋아하는 딸기로 주스를 만들어 왔어요.”
“아. 고마워.”
문이 벌컥 열리며 청신이 들어왔다. 청신은 도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쟁반 위에 올린 진분홍색의 컵을 도유를 향해 내밀었다.
흡사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예의 바르고 꼿꼿한 자세에 웃음이 터졌다.
“넌 안 마셔?”
“저는 괜찮아요. 도유 형. 어서 마셔 보세요. 입맛에 안 맞으면 말해 줘요. 억지로 마시지 말고요.”
알차게 착즙을 해 온 청신의 정성 때문에라도 맛없다 할 수는 없었지만, 청신을 믿고 있기에 도유는 망설임 없이 주스를 마셨다. 예상보다 맛있었다.
“맛있어. 고마워.”
“다른 것도 언제든지 만들어 줄게요.”
반쯤 비운 컵을 입에서 떼자 청신이 냉큼 받아 협탁 위에 올려놓는다.
중환자를 대하는 간병인의 자세인지, 애인에게 사사로운 일 하나 허투루 하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몰라도 저를 챙겨 주는 청신의 모습에 심장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청신아.”
“네?”
도유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청신이 자연스럽게 연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는 순순히 제게 몸을 기대는 도유의 행동에 기분이 좋은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그의 옆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도저히 주둥이를 그만 대라고 할 수 없게 된 도유는 호기심이나 해결하자고 생각하며 앨범을 펼쳤다.
“네 어릴 때 앨범을 봤는데, 형이 있어?”
“네. 있었어요.”
‘있었다’. 과거형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던 것인데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도유가 사과하려던 때였다.
“형이 6살이었을 때 어머니께 앙심을 품은 사람이 형을 죽이려고 했대요. 다행히 죽진 않았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의식을 찾지 못해서 형이 20살이 되던 날 안락사를 시켰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보통 무거운 이야기도 아니고 굉장히 무거운 이야기다. 도유는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이렇게 가볍게 물어볼 일이 아니었는데.”
“아하하, 신경 쓰지 마세요, 도유 형.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형이래 봤자 2살 이후로는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이젠 남남처럼 느껴지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청신의 말 한마디에 도유의 머릿속은 멋대로 그의 말을 단서로 생각을 거듭했다.
앨범에 일정 시기의 청신과 청현의 얼굴이 없었던 이유. 그 시점 이후로 송유원이 단독으로 찍은 사진에서 언제나 딱딱한 얼굴이었던 이유와 생일 파티 사진에 유현밖에 없었던 이유를 번갈아 떠올린 도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진에 청신과 청현이 찍히지 않았던 2살 때부터 청신은 아버지에 의해 적성교에서 생활을 했던 것이다. 카단에 남은 사진 자료에는 아이가 입었을 법한 옷이나 장난감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몰랐다.
도유의 어린 날도 그리 행복하고 풍족하진 않았지만, 너무나 어린 나이에 그곳에 본의 아니게 끌려가 생활했을 청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떠올리니 마음이 아려 왔다.
“다른 사진도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봐요. 저는 그동안 도유 형 얼굴 좀 핥을게요.”
그렇게 말하며 얼굴에 입술을 붙이고 다시 쪽쪽거리는 청신의 행동에 쿡쿡 쑤시기까지 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도유가 눈을 치뜨며 청신을 노려봤지만, 청신은 사랑에 푹 빠진 눈으로 응수할 뿐이다.
“이렇게 절 노려보는 것도 예뻐요. 아, 너무 예뻐.”
도유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느라 잠시 멈췄던 청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핥는 게 아니라 입을 맞춰 댄다. 와중에 손으로는 도유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 감촉이 간지럽고 괘씸했다.
결국 도유가 앨범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청신의 뒷머리를 잡았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청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본 도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냉큼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었다.
어디 역으로 당해 보라지, 하는 심리였지만 눈꼬리를 휘며 도유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청신의 행동에 낚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성화의 마도서 회수 임무에 실패했음에도 도유는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 주어졌다.
유정현 이사는 비서를 통해 도유에게 상당한 액수의 수고비와 값비싼 아티팩트 재료들을 보내오며 ‘수고했다’라는 말만 남겼다.
그에 도유는 기쁨보다 굉장한 찝찝함을 느꼈다. 혹시라도 청신이 뒤에서 수를 쓴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품을 정도로, 유정현 이사의 반응이 담백했기 때문이었다.
청신은 그런 도유의 의심쩍은 눈빛을 스스럼없이 즐겼다.
실상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도유처럼 찝찝함을 느끼긴커녕, 부족한 사례에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짜증 나는 일이 따로 남아 있었기에 곧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마도서 회수를 위해 폐건물에 들어가 결계에 갇혔을 때, 청신은 량의 가족들의 목숨을 손에 쥐고 량을 협박해 그가 가지고 있던 마법의 출처를 알아냈다.
량이 지니고 있던 마법은 흉성의 기운을 덜어 내기 위해 청신이 만들었던, 인간이 가장 바라는 행복을 구현한 꿈을 꾸게 해 주는 마법을 토대로 만든 변이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