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101)화 (101/159)

#101

“으으읏….”

앓는 소리가 잇새 너머 저절로 흘러나왔다. 생각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온몸을 강타하는 근육통에 시체처럼 힘없이 침대에 늘어진 도유는 이를 갈았다.

청신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는다는 핑계로 욕실에서 관계를 맺고, 그다음 침실로 옮겨와 도유가 기절에 가까운 잠을 잘 때까지 한 후유증도 있었다. 그러나 온전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망할 후유증…!’

어제 정령의 힘을 조금만 썼을 뿐인데도 후유증이 유독 심하게 도유를 괴롭혔다. 어렸을 때부터 이랬다. 도유가 정령의 힘을 쓰면 쓸수록, 그다음 날 바로 앓아누울 확률이 높았다.

정령의 힘은 마법사와 상극의 힘이기에 그들과 대적할 때는 몇 번이고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이 강해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도유가 꾸준히 몸을 만들고, 아티팩트나 무기를 잘 다루는 쪽으로 대체하기 위해 노력한 거였지만 이번처럼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할 때는 언제나 존재했다.

속으로 이제는 청신을 봐도 반응하지 않는 정령을 향해 툴툴거리며, 도유는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차 안에 두고 내렸다는 걸 떠올리고 쯧, 하고 혀를 찼다.

잠시 그렇게 축 늘어져 있던 도유는 약간의 기합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일단 씻고 싶었다.

청신이 씻겨 주긴 했지만 일어나자마자 씻는 게 습관화되어 있는 터라 씻지 않으면 찝찝했다.

도유는 언데드처럼 어정쩡하고 흐느적거리는 자세로 욕실로 향했다. 바로 전에 청신이 사용했는지, 그가 쓰는 바디 워시 향이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어디 간 걸까. 아침을 차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어기적어기적 세안과 양치를 마친 도유는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평소에는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 나태함과 약간의 나른함에 취하고 그 와중에도 전신을 두드리는 선명한 통증에 파묻혀 도유의 의식이 가라앉으려던 때였다.

“도유 형!”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만 꺾어 문 쪽을 보니 청신이 환하게 웃었다. 그는 곧바로 침대 위에 시체처럼 늘어진 도유에게로 달려들었다.

“사랑하는 도유 형, 잘 잤어요?”

“잘 잤긴 한데, 청신아.”

“네, 도유 형.”

도유는 제 얼굴 위로 쏟아지는 청신의 입술에 손을 들었다.

어린아이처럼 뽀뽀를 해 대는 건 귀여워서 좋긴 했다. 아직 덜 마른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 이따금 눈 위로 떨어지는 것만 빼면.

씻자마자 말리지도 않고 어딜 그렇게 다녀온 걸까 궁금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호기심보단 청신을 말리는 게 먼저였기에 말부터 했다.

“물 떨어져서 널 보기가 힘들어….”

가슴을 간질이는 달콤한 말에 헤실거리며 기쁘게 웃던 청신은 도유가 신음을 삼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연인의 몸을 더듬었다.

“어디 아파요? 허리? 아님 다른 데가 아파요? 어제 안 찢어졌던 것 같은데 잠깐 봐 봐요.”

커다란 손이 도유가 유일하게 입은 옷인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그간의 경험이 도유에게 이대로 청신을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속삭였다. 그의 성격상 살펴보는 척하면서 온갖 야한 말을 하다가 덮쳐 올 게 뻔했다. 몸이 괜찮았다면 받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말려야 했다.

“이청신, 멈춰.”

“네….”

시무룩해하며 대답하는 청신의 모습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가 행동을 저지당하자마자 ‘쳇’ 하고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니 움텄던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새싹이 단번에 말라비틀어졌다.

“형. 어디가 아픈지는 말해 줘요. 치유 마법 쓸게요.”

내일이면 죽음을 앞둔 환자를 보는 것처럼 청신이 도유의 손을 꼭 잡고 매달렸다.

“형이 아프다니까 지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요….”

이대로 그냥 방치하면 이슬 같은 눈물을 톡 떨굴 것 같은 울망한 눈이다. 그러나 도유는 코웃음을 쳤다.

“새벽에 내가 힘들어서 그만하자니까 더 하던 인간이 누굴까.”

“도유 형의 사랑스러운 애인 청신이요.”

“…….”

제 입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하는 뻔뻔함에 기가 막혔지만, 이런 뻔뻔함마저도 너무나 잘 어울려서 할 말을 잃은 도유를 향해 청신이 생긋 웃었다. 그가 도유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치만 형, 어제 저한테 매달려서 안 놔 줬잖아요. 그만하려고 할 때마다 계속하라고 매달렸으면서. 기억 안 나요? 여기 자국도 났는데.”

하면서 청신이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목욕 가운까지 들춰 가며 보여 준 까닭에 그의 말대로 도유가 물어 댄 흔적이 남아 있는 게 잘 보였다.

“마지막엔 뒤로만 갔….”

“내가 지금 아픈 건 마법이나 약으로는 안 돼. 그냥 내 문제야.”

이 이상 음담패설을 듣기가 어려워서 재빨리 말하자 청신은 미련 없이 웃으며 상냥하게 되물었다.

“무슨 문제요? 저도 알고 싶어요.”

쪽, 쪼옥. 조심스럽게 도유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응?’ 하고 보채는 목소리마저도 간지럽게 느껴진다. 도유는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내 눈이랑 관련된 일이야. 결계 안에서 눈에 너무 많이 의지해서… 그 대가야. 쉬면 나아.”

“도유 형이 복용하는 약이 진통제 역할도 한다 했죠.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아. 그냥 쉬게 해 줘.”

“…알았어요.”

정령에 대해서 말해 줄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순순히 물러나는 청신에게 속으로 고마워하며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던 도유는 결계 안에서 만났던 청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눈을 번쩍 떴다.

“청신아.”

“네?”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청신이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도유가 ‘부탁’을 먼저 입에 담는 일이 없었기에 그는 얼떨떨해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제한 없으니까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지금처럼 말해 줘요.”

“고마워. 그럼, 혹시 말야. 으음….”

말해도 될까. 도유는 고민했다. 부탁을 입에 담는 것까진 쉬웠지만 입 밖으로 꺼내려니 머뭇거려졌다. 처음 청신의 집에 왔을 때 그가 했던 행동이 떠올랐기에 망설이고 있으려니 청신이 부드럽게 다독였다.

“괜찮아요. 말해 주시겠어요?”

“…혹시, 네 어릴 때 사진이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어?”

도유를 다독이던 손이 우뚝 멈췄다. 청신은 생경한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제 어릴 때 사진이요?”

“응. 보고 싶어. 아! 나도 보여 줄 수 있어. 보여 줄 수 있긴 한데, 고아원에서 찍은 사진 몇 장만 있어서 얼마 없지만. 있긴 있을 거야.”

입양 가기 전에 찍은 사진과 입양 직후에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제일 말끔하고 예쁘게 찍힌 사진이라 간직하고 있었다.

“필요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보고 싶어요. 도유 형 어릴 때 사진이라니…. 같이 있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에요. 꼭 보여 줘야 해요.”

“…응.”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기쁨을 숨기지 않은 얼굴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제 사진은 갑자기 왜 보고 싶은데요?”

나긋한 어조로 물으며 청신은 도유의 뺨에 달라붙은 연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을 받으며 도유가 답했다.

“네 어릴 때가 보고 싶어서라는 건, 이유가 안 될까.”

청신의 아버지라 밝힌 남자가 진짜 그의 아버지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확실히 연인의 어린 날을, 그와 도유가 처음 만났을 시기의 모습을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도유의 눈 깜빡임 하나마저도 놓치지 않고 싶다는 듯 집요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청신은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연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어차피 형은 오늘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도유 형이 좋아하는 책 대신 제 예쁜 얼굴을 보면서 힐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예쁜 얼굴?”

“네. 저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예쁘거든요. 혹시, 이젠 제가 안 예뻐요?”

안 예쁘다고 하면 영화에 나오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주저앉아서 또르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기세라, 도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예쁘다, 예뻐.”

한숨 섞인 긍정에 청신이 생긋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그가 양 팔에 한가득 앨범을 가지고 왔다. 그것들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은 그가 도유가 앉을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앉아 있어도 되겠어요?”

“응, 괜찮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분명 아팠는데 시간이 좀 흐르니 생각보다 많이 나아졌다.

도유가 괜찮은 척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청신은 도유의 등 밑에 쿠션과 베개를 받쳐 주고, 팔꿈치 아래로 이불과 작은 쿠션까지 대 준 뒤에야 물러났다.

“태블릿에 있는 것들은 최근 거고, 그 아래 앨범부터가 갓난아기 때부터예요.”

“아, 응. 고마워.”

도유는 생각보다 많은 앨범과 부피에 놀랐다. 처음 청신의 집에 왔을 때 송유원과 찍은 사진이 든 액자를 덮어 버렸던 청신의 태도와, 먼지 한 톨은 물론 변색 없이 말끔하게 잘 관리된 앨범에 사진을 모아 둔 행동이 상반되어 헷갈렸다.

“청신아?”

“네?”

“같이 보려고?”

이대로 갈 줄 알았던 청신이 도유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청신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혼자 보고 싶었어요? 아, 혹시.”

미인이 갑자기 야릇하게 웃는다. 도유는 이상하게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앨범을 쥔 제 손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입을 막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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