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아비를 죽인다고? 성격도 여전하구나. 그보다 왜지? 왜 아직도 연결이 되어 있는 거지?”
청신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청현의 파편은 아들의 주변을 거의 빙빙 돌면서 이리저리 살폈다. 그 과정에서 성화의 마도서의 힘이 강해졌는지 그의 주변에 환한 빛이 인편처럼 날아다녔다.
“대정령의 계약자를 죽이지 않은 거냐, 설마?”
“죽이지 않아도 통제가 되니까요. 그보다 이 성화의 마도서. 얼마나 남은 거죠?”
“왜? 어째서냐?”
“지금 제가 그 이유를 말해 준다 한들, 어차피 ‘초기화’되실 테니 입 아프게 말할 필요 없죠.”
“누구 멋대로-.”
“제멋대로요.”
파아앗! 하고 둥둥 떠 있던 성화의 마도서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청신은 자신을 막으려는 청현을 무시하고 마도서를 잡아챘다.
다른 마법사가 손을 댔다면 잡는 순간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레 죽었을 테지만 청신은 멀쩡했다.
그는 잘못 건드리면 부스러질 것 같은 마도서를 빠른 손놀림으로 넘겨 보기 시작했다.
아들이 마도서에 집중한 사이에도 청현은 여전히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의 청현은 아들을 흉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고대하던 날을 일주일 앞둔 날 만들어졌다.
청현의 파편은 현재의 자신이 본체와의 연결이 끊겨 있기에 청신과 연결되었던 흉성을 끊어 내는 데 전부 성공한 줄 알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이렇게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니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유원이는, 유원이가 날 죽였을 텐데?”
“네, 죽였죠.”
무심하게 대답하는 청신의 주변에서 그를 감싸듯 황금빛 물결이 허공에 흐르기 시작했다. 성화의 마도서에서 더 많은 힘이 뿜어져 나왔다.
청신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과거에 청현이 이 공간에 남긴 마법 결계를 손보기 시작했다. 나흘 뒤 도유가 이곳에 왔을 때 그에게 가장 안정적인 형태로 ‘전도’하기 위해서.
청신은 성화의 마도서의 힘으로 자신의 기억을 도유에게로 전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도유는 앞으로 무슨 짓을 해도 평생 청신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이 방법밖에 없었다.
적성교가 말 그대로 ‘끝’이 났던 마지막 날, 도유는 대정령에게 자신의 기억을 대가로 바쳐 청신을 구해 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도유와 재회했을 때, 그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청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청신은 도유가 마냥 좋았다.
서도유는 자신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고, 과거의 기억 따윈 이젠 상관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도유에 대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도유가 청신에게 서툴지만 조금씩 자신의 애정을 쏟는 걸 몸소 느끼고 겪으며 청신은 확신하고 싶었다.
서도유라는 사람이 이제 두 번 다시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아무리 자신에게 실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목줄을 매는 걸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실험장’을 준비했다.
“너의 기억을 새기는 것이냐.”
물끄러미 청신을 관찰하며 그가 수정 중인 결계식을 뜯어본 청현의 파편이 묻자 청신은 그를 한 번 흘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파편은 청신이 마법식을 수정한 후 결계를 재가동시키는 순간 자신의 기억이 초기화될 걸 이해했음에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청신을 지켜본다. 파편 주제에 정말, 청신이 기억하는 이청현과 똑같다.
“성화의 마도서의 힘이라면 확실히 대상의 뇌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하지 않고 전달하는 게 가능하겠지. 하지만 청신아, 네 아비로서 말하는데 이 힘은 널 위해-.”
청현의 형상이 무너졌다. 청신은 들고 있던 마도서를 손에서 놓았다. 바닥으로 떨어져야 할 마도서에서 불꽃이 튀더니 그대로 타오르며 원래 놓여 있던 제단의 위에 홀로 둥둥 떠올랐다.
곧이어 청신이 새로 구현시킨 결계에 맞춰 공간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할 정도로 온 사방이 진동하는 공간에서 청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자신이 구성한 결계가 제대로 발동하는지 끝까지 살핀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녹색 눈이 머문 곳은, 조금 전까지 그의 아버지의 파편이 있던 곳이었다.
“도유 형이 영원히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이딴 건 필요 없어요.”
닿을 수 없는 대답임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자 더 분명해졌다. 청신에게는 그의 족쇄나 다를 바 없는 흉성의 힘을 막을 마도서 따위는 필요 없다. 바라는 건 오직 서도유뿐이다.
그리고 나흘 뒤. 성화의 마도서를 이용해 결계와 청현의 마법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꾼 청신은 청현에게 끌려갔던 도유가 저를 보자마자 보인 반응에 제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바다와 창공을 고스란히 담은 깊은 푸른 눈이 청신을 보자 잠시나마 가늘게 떨리던 것이 그 증거였다.
청신이 성화의 마도서를 통해 전한 ‘기억’이 도유에게 전달된 것이다. 적성교에서 만났을 때의 기억. 그리고 도유가 바라는 소원을 이뤄 줄 수 있는 마법을 건네주었을 때의 기억을 말이다.
청신은 이제 도유가 자신을 향해 범법자라며, 자길 속였다며 죽이려 들 줄 알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청신은 도유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도유가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이미 그를 가둘 새장과 대정령의 힘을 끊어 낼 방법을 전부 모색해 두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의 도유가 자신을 놓지 못할 거라고 자신했다. 서도유는 이청신을 사랑한다. 그 명제는 분명했다. 매일매일, 청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을 느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을 하지 못하니 새장 따위를 준비한 것이지.
도유가 청신을 부정하거나 증오한다 하면, 그리고 거절한다면 끝내 도유를 그곳에 가두지 못할 자신을 알았다.
새장 속에 갇힌 도유는 지금의 모습을 잃어버릴 테니까.
도유가 청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청신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받는 게 더 괴로웠다. 새장은 그저 자신의 불안을 억누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암담한 미래를 상상하며 청신이 긴장한 사이, 도유는 청신이 예상했던 모든 반응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하하.”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그의 웃음엔 조금의 가식도 경멸도 없었다. 순수한, 애정 가득한 웃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청신은 이것저것 소소한 실험을 해 보았다. 도유는 평소와 똑같았다. 성화의 마도서의 힘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청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넌지시 물었다.
“그보다 도유 형,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궁금해요.”
그 질문을 하자 도유의 눈빛이 바뀌었다. 빛을 품은 듯 반짝이던 눈이 일순 흐려지고, 옅은 두려움이 밀려드는 걸 청신은 보았다. 그 반응을 통해 청신은 도유가 제대로 자신의 기억을 받았음을 확신했다.
도유는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솔직하게 보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청신의 심장은 초조함에 짓눌렸지만 그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고, 대답을 얻었다.
“별일 아니었어.”
“별일이 아니라고요?”
“응. 그냥 쫓겨났어. 이 층으로. 그래서 헤매고 있는데 네가 나타난 거야.”
“정말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거짓말.
청신은 그 말을 들은 순간 큰소리로 웃고 싶었다. 당장 도유를 이곳에 눕히고 정신없이 그를 탐하고 싶었다.
도유가 처음으로 하는 거짓말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가 진실을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믿어요. 도유 형이 하는 말은 그 어떤 말이든, 제게 진실이니까.”
이곳에서 도유를 눕히고 안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큰 부담이 될 것이 뻔하기에 청신은 입술만 맞댔다.
기다렸다는 듯, 아무런 의구심 없이 순종적으로 눈을 감는 도유의 길들여진 모습을 보자 결심이 일순 흔들렸다.
욕망과 충동, 그리고 도유를 향한 사랑이 청신을 계속 뒤흔들었지만, 그는 인내를 한계까지 끌어 올려 도유의 입술만 탐했다.
*
임무는 성화의 마도서를 회수하지 못한 채로 끝났다.
‘야, 서도유. 보고는 내가 할 테니 넌 집이나 가라.’
청신과 함께 폐건물을 나온 뒤에야 합류한 량은 어딘가 멍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도유는 그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모함하려고 작심한 것인가 하고 의심을 품었지만, 귀신같이 그 기색을 읽은 량이 이어 한 말에 그를 믿기로 했다.
‘너한테 목숨 빚진 거 알거든? 너한테 해가 되도록 보고하지 않을 거니까 그딴 표정 하지 마라?’
물론 평소 도유에게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 난 그가, 잠깐 도유와 찢어진 사이에 청신에게 어떤 협박을 받은 걸까 의심을 품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청신을 대하는 량의 태도에 딱히 거부감이나 공포가 없었기에 청신을 추궁하진 못했다.
그렇게 량과 헤어진 뒤, 도유는 카단에서 제공한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그대로 청신에게 납치 아닌 납치를 당했다.
솔직히 청신이 덮칠 것처럼 집요하고 깊게 키스할 때 눈치채긴 했지만 귀갓길에 그럴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다. 당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쾌락으로 변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