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98)화 (98/159)

#98

“내가 교주냐고? 하하! 자네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군. 대체 왜지? 대정령의 짓인가? 한 인간의 기억을 이렇게 말끔하게 지워 버릴 정도의 존재는 대정령밖에 없는데.”

“대답하십시오.”

“교주는 내가 아니라네. 내 아들이 내 다음 대 흉성의 인도자로 선택을 받으며 교주가 되었으니 말일세.”

“……그, 말은.”

도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청신이 적성교의 교주란 말입니까?”

“그렇다네. 분명 내 본체는 자네를 제물로 바쳤을 텐데. 그보다 대답 좀 해 주겠나. 자네, 왜 죽지 않았지? 결계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켜보니 자네를 죽여야 할 내 아들이 자네를 굉장히 아끼던데.”

도유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지 않았냐고 하면 그 누가 어떤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설령 대답할 수 있는 거라 해도 도유에겐 적성교에 있었을 때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사라져 버린 기억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하나, 적성교에 끌려갔을 때 도유가 청신을 만났다는 것만큼은 청신의 시인을 통해 확실하게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의 청신은 말했다. 기억을 되찾지 않길 바란다고. 도유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기억을 되찾았다가 청신과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정령이 했던 말은 이거였나.’

도유와 계약한 정령이 했던 말.

지워진 듯 들리지 않았던 단어.

‘저건 너를 죽이려고 했던 어린 흉성의 인도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로군. 상관없네. 난 자네를 납득시킬 생각이 없으니까. 그보다 내 아들이 이 힘도 사용하지 않고, 자네도 멀쩡히 살아 있으니 하는 말인데. 20년간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나?”

“…대재앙의 기준이 뭡니까.”

도유는 질문과 동시에 남자가 했던 말들을 처음부터 지금 내뱉는 말들까지 머릿속에서 나열하고 나누어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가 보고 알아낸 정보들과 비교하고 재정리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점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유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창백하다. 남자는 희게 질린 도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결론을 도출하며 서서히 평정이 무너져 가는 도유를 보호하려는 듯 그를 감싸는 기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대다수의 인간이 사망하는 재앙을 일컫지. 자연, 인재, 역병 등을 구분하지 않고 한 번에 수천, 수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재앙이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느냐 묻는 걸세.”

남자의 양 손바닥 위에 물이 고이듯, 그의 주변에 떠 있던 새까만 힘이 차올라 이윽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르지 않는 샘이라도 된 것처럼 남자의 손바닥에서 넘친 새까만 힘은 웅덩이를 만들고, 점차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네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다시 설명하지. 이것은 인간들이 쌓아 올린 부정한 에너지라네. 그리고 이것들이 최종적으로 고이는 곳이 흉성일세. 하지만 흉성에도 한계가 있어. 그것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대재앙이 일어난다네.”

물 흐르듯 흘러가던 검은색의 액체처럼 보이는 부정한 에너지가 허공에 둥근 모양으로 뭉친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나와 내 아들, 흉성의 인도자는 본디 이 흉성이 넘치기 전에 대재앙을 소재앙으로 나누어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스륵.

남자의 손에 있던 검은 흐름이 완전히 사라졌다. 도유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의무를 포기했네. 그리고 나의 아들 또한.”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 내리는 눈에 파묻혀 가듯 흐릿한 흔적만 남은 기억 위에 서서히 무게가 실린다. 과거와 같은 발자국이 조금씩, 도유를 짓누른다.

“윽….”

눈이 뜨거웠다. 도유는 제 발치에 물결치는 흐름을 보았다. 마도서로 빨려 들어가던 자연의 흐름이 도유를 보호하듯 주변을 에워싸는 것을, 그리고 그 흐름이 취한 흐릿한 형태를.

정령이다. 그것이 발목을 붙잡는 것을 보았다. 정령과 이어져 있기에 도유는 그것이 전하는 의지를 느꼈다.

이 이상 떠올리지 마.

도유가 손을 들어 눈을 감싸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대정령의 선택을 받았지. 그런 자네의 심장과 피를 먹어서 대정령의 노여움을 사면 흉성과의 연결을 끊어 낼 수 있다네.”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도유는 그다음 말을 들었다. 현재가 아닌 과거에.

‘대정령은 자신의 계약자를 해한 이의 곁에 계속해서 머물 것이고, 그런 대정령의 기운은 흉성이 인도자를 찾을 수 없도록 흐름을 흐트러뜨리니 인도자의 역할을 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지.’

머릿속에서 기억이 떠오른다. 영상이 아닌 단편적인 단어의 나열이었으나 순식간에 문장으로 만들어져 도유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때의 도유는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떠올랐다.

‘이거 줄게. 대신에 약속해.’

어린 청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허억…!”

두통이 일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끔찍한 통증에 도유가 숨을 들이켰다. 열을 품은 눈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사정없이 떨렸다.

아이의 작은 손이 내민 것. 피투성이였음에도 유일하게 홀로 제 색을 유지하고 있던 것. 그것을 받아 든,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손이 겹쳐졌다.

“내 아들이 자네를 죽이지 않았으니 여전히 그 아인 흉성에게 잡혀 있다는 거겠지.”

남자의 목소리에 짙게 깔린 슬픔이 느껴졌다.

시야에 그가 움직이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도유가 당장 녹아 버릴 것처럼 뜨겁고 시큰거리는 눈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가 도유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 마도서와 지금의 ‘나’는 유원이를 위해 남겨둔 거였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으니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겠네. 인간의 손에 들어갔다가는 내 아들이 고생하게 될 테니 말일세.”

화르륵. 불타는 소리가 들렸다. 도유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흠칫하고 몸을 크게 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남자는 없었다.

주변을 모두 살폈으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도유는 황급히 몸을 틀어 마도서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마도서도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으윽….”

도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비틀거렸다.

기억. 빌어먹을 기억이 수면 위로 끓어오르는 물거품처럼 조금씩 떠오른다.

온전히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떠오르다가 거품처럼 터지고, 터지길 반복하며 잔재만 남기고 흐릿해지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도유는 사라져 가는 흔적에서 잃었던 기억의 흔적을 건져 내는 것에 성공했다. 사람 없던 도서관. 도유에게 웃으며 다가온 남자.

‘아가. 이 아이가 내 아들이란다. 친구가 되어 주겠니? 네가 원한다면 가족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 말에 넘어가서 적성교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것도 떠올랐다. 남자의 손을 잡고서 그곳에서 저보다 훨씬 작은, 어린 청신과 만났다.

그리고.

미친 듯한 웃음소리와 비명, 그리고 재의 냄새. 사람의 육신이 타오르며 코를 찌르는 악취 속에서 피투성이의 어린 청신이 내민 것을 온전히 떠올렸다. 눈꺼풀 아래로 아이의 손이 겹쳐진다.

“그래서….”

어째서, 어떻게 그 비극이 일어났는지 중간의 기억은 없었다.

왜 그렇게 숨을 쉬기가 힘들었던 것인지, 호흡 한 번 하는 것조차 몸속을 갈기갈기 찢는 고통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청신으로부터 받아 든 종잇조각에 그려진 마법진을 보는 도유에게 청신이 했던 말은 기억에 새긴 듯 떠올랐다.

‘이 종이를 찢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는 형태가 죽음일 수도 있어.’

그때 내가 들었던 말은 너의 목소리였구나.

내게 마법을 준 게 너였구나.

범법자가 준 마법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게 되고 사형수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청신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울었었다.

언뜻 절망을 닮은 슬픔을 가득 품은 채로 울었던 이유를 그때는 단순하게 동정이라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도유 형. 범법자를 죽이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저는 도유 형이 범법자를 찾고, 그 이유를 알고, 선택을 할 때까지 곁에 있을게요.’

“하….”

도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과 감정이 따로 분리된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음은 청신이 범법자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청신의 아버지, 그 남자가 남겼던 말, 청신의 반응, 추론해 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도유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생각으로 과열된 머리가 뜨거워서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고 싶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청신이 저를 찾고 있을 걸 알아서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들어왔던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자 공간이 달라졌다. 오래전 이곳에 있었을 사람이 버리고 간 잔해들로 가득한 곰팡내가 나는 폐건물 안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B5’라고 쓰인 굵은 돌기둥이 보였다.

이 건물에 걸려 있던 결계가 모두 풀린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도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올라가면 청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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