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야. 너 뭔가 알고 있는 거냐? 서도유를 아끼잖아. 찾아야 하는 거 아냐? 왜 가만히 있지?”
청신의 시선이 량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청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량은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본능에 틀어박힌 공포와 거부감이 목을 틀어쥔다. 이와 같은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카단 본부에서 청신과 처음 만났던, 그의 마법에 의해 죽을 뻔했던 때에도 직전에 지금과 같은 감각을 느꼈었다.
그동안 겨우 머릿속에서 밀어 냈던 공포감이 다시 량을 지배하자 그는 마법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런 량을 보며 청신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당신 주머니에 있는 거 꺼내 봐요.”
존댓말이었지만 분명한 명령이었다. 행하지 않는 순간 선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질식해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량은, 이 공간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고도 공포에 굴종했다.
그는 떨려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이윽고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천 질감에 가까운 종이었다. 당장 떨어트릴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내밀자 청신이 채 가듯 가져갔다.
녹색 눈이 종이를 펼쳐 들어 훑는다. 적막이 그들을 감쌌다. 아니, 들리는 건 량의 겁에 질린 숨소리뿐이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량은 공포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 자식은 대체 뭐야?’
사람에게 이렇게 공포를 느낀 건 처음이다. 도저히 자신이 사람의 앞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은 어쩌자고 이런 놈에게, 이런 놈이 비호하는 서도유에게 시비를 걸었던 걸까.
특히 유량은 훈련소에서 도유에게 농락당하고, 청신에 의해 천장에 처박혔던 그 경험 이후로는 그와 상종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냥 똥을 피하듯 피하자고 생각하고, 실제로 본부에서 마주칠 만한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서도유가 자주 출몰하는 식당에 잘 가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째서 자신은…
‘네가 마도서를 찾아오면, 네 할아버지는 널 인정해 줄 거야. 그럼 너희 가족도 자연히 널 인정하게 될 테지. 그러니 힘내자, 량아.’
‘그래도 서도유와 엮이고 싶지 않아? 네가 약해서? 아하하! 걱정 마. 널 약하게 만드는 건 쓸데없는 공포니까. 내가 특별히, 네가 전처럼 서도유를 싫어할 수 있게 해 줄게.’
파묻혀 있던 기억이 올라왔다. 존경하던 할아버지가 늙은 노인처럼 축 늘어져 이름도 모르는 녀석의 인형이 되어 있었고, 자신 또한 그 녀석에게 농락당했다.
그 녀석은 서도유에게 마법을 사용하라며 저 종이를 준 것이다. 량은 결계에 갇혀 익사할 뻔했을 때 제가 저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못했다.
제게 저런 수단이 있고, 저것이 서도유를 영원한 악몽에 빠트릴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의문을 품지 못했었다.
자신이 농락당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량의 속이 일순 공포마저 잊어버리고 분노로 뒤틀린 순간이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힘과 내부를 갉아먹는 끔찍한 고통에 량이 헉, 하고 크게 숨을 삼켰다. 언제 주저앉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을 떴을 때 청신이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보고 겨우 인지했을 뿐이다.
“말해. 죽기 싫으면.”
고통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청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유량. 이걸 누구에게서 받은 건지. 네가….”
청신이 이를 으득, 갈았다. 말하는 중에 극점까지 치달은 분노를 삼키기 위해 그가 작게 심호흡을 한 후 말을 이었다.
“도유 형에게 사용하려고 한 게 맞는지. 빠짐없이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대답하지 않으면 네 가문의 인간들. 비마법사고 마법사고 뭐든 상관없이 가장 비참하게 죽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
눈을 부릅뜬 도유는 당황했다. 아니, 당황한 걸 넘어 황당했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한 행위지만 그는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둑어둑하지만 모든 게 훤히 보이는 공간. 지평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쾨쾨하게 코에 달라붙는 지하 특유의 곰팡내와 어지러울 정도로 정체된 공기. 기이할 정도로 마력의 흐름이라고는 전혀 없는 깨끗한 허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즉, 도유가 전혀 모르는 장소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자신이 언제 여기에 온 것인지도 몰랐다.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이곳에 있었다. 몸을 감싸는 마력도, 기이한 마력의 흐름 따위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도유는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나 자신의 기억이 뒤틀리거나, 도중에 기절했다가 뜬 것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떠오르는 건 공간을 뒤틀어 만든 결계로부터 벗어나 처음 있던 새하얀 공간에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유량에게 살기를 흩뿌리며 죽이려 드는 청신의 뒷모습이었다.
솔직히 도유는 그때 청신이 왜 그랬는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량도 그냥 도유를 쳐다보기만 했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때의 도유는 청신을 말리려고 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때 눈을 깜빡였던가? 알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눈을 깜빡이는 걸 헤아리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숨 쉬는 걸 일일이 생각하지 않듯 본능적으로 눈을 깜빡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청신아. 그만해.’
라고 말하기 위해 청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도유는 이곳에 있었다.
“청신아-!”
청신아, 하는 도유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목소리가 부딪혀 되돌아온 뒤에 한동안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대답을 기다려 봤지만 목소리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 이곳은 마치, 그 폐건물의 또 다른 지하층 같았다.
혹시 도유만 결계를 뚫고 ‘원래’ 존재하던 지하층에 도달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의심은 점점 진실처럼 느껴졌다. 아직 청신과 량만 마도서가 있는 결계에 갇혀 있고, 도유만 빠져나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돌아가야 해.’
청신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도유를 구하기 위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든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 그가 갑자기 사라진 도유의 행방을 쫓으며 얼마나 당황했을까 예상할 수 있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반대로 청신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면 도유도 이성을 되찾기까지 오래 걸렸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도유는 결단을 내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향은 앞뒤밖에 없었지만, 그는 일순 제 몸을 스친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앞으로 향했다.
발밑으로 금이 간 바닥이 밟혔다. 잠시 멈춰 서서 보니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천장 파편을 맞고 깨진 듯했다. 세월의 흐름에 부식되어 가는 흔적이다.
부디 자신이 무사히 나갈 때까지 아무 일 없길 바라며 걸음을 서둘렀다.
‘문?’
끝도 없을 것 같은 복도를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체감상 오래 지나지 않아 철문을 발견했다. 녹슨 문을 물끄러미 보던 도유는 손수건을 꺼내 문고리를 잡고 당겨 봤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있는 힘껏 발로 차 보고, 몸을 부딪혀도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하….”
이 문 너머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든, 청신이 있는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도유는 일단 문에서 물러나 아티팩트 총을 꺼내 문을 겨냥했다. 그러나 곧 손을 거뒀다.
“쯧.”
탄창을 확인한 그는 혀를 찼다. 결계 안에서 아티팩트 안에 있던 마력이 모조리 나갔는지, 아티팩트 총은 평범한 총이 되어 있었다.
부식된 문이라 해도 철문에 총을 쏘는 건 미친 짓이다. 잠시 고민하던 도유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는 공간이 일그러진 결계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령의 힘을 조금 끌어다 썼지만 이 또한 후폭풍이 올 게 뻔했다.
지금 하려는 짓은 거기서 조금 더 고된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청신을 찾는 게 먼저였기에 도유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미광을 머금었던 푸른 눈에 또렷한 광채가 스미기 시작한다.
해가 지고, 낮의 하늘에 가려져 있던 별이 드러나는 것처럼 점차 또렷하고 선명한 빛을 머금은 도유의 눈은 거의 설백색에 가까운 색으로 물들었다.
도유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문에 닿자마자 철문에 냉기가 스몄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닥에서 솟아 나온 얼음 기둥이 철문에 충격을 가했다.
철문은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도유는 그 잔해를 대충 발로 밀어 치우고 넘으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당황했다.
예배당같이 보이는 방이었다. 십자가가 있어야 할 벽에 아무것도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숙한 예배당과 똑같았다.
당장에라도 독실한 종교인들이 자리를 채울 것만 같은 긴 의자들은 어제 놓인 것처럼 온전한 새것이었다. 아니, 의자뿐만이 아니다.
사위를 밝히는 샹들리에도, 벽을 채운 스테인드글라스도 낮인 듯 햇볕을 머금고 제각기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도유는 저것의 재질이 처음 이곳에 빨려 들어왔을 때 봤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위를 배회하던 시선이 서서히 내려왔다. 그가 밟고 있는 붉은 카펫의 가장 끝. 제단이 놓인 곳. 그 위에, 손을 대는 순간 바스라질 것만 같은 책이 있었다.
“성화의 마도서….”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제단 위에 둥둥 떠 있는 책의 위.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위에서 쏟아져 내린 마력의 흐름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