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95)화 (95/159)

#95

량은 어느덧 무릎 위로 차오른 물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겪은 적 없었다.

특수부 제2팀의 임무는 1팀과 달리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적었다.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 때에도 량은 언제나 팀원들의 보호와, 함께 작전에 투입된 다른 부서 사람들의 보호를 받았다.

특히 그가 카단의 이사 중 하나인 유정현의 조카이자, 마법 결계로 유명한 대기업 천약의 둘째 아들인 걸 아는 이들은 적극적으로 량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건 서도유다. 그리고 이름 모를, 장신의 미인이 하나. 량은 이렇게 물이 차오르는데도 태연한 표정의 청신을 노려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도유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도유는 량과는 다른 방식, 총으로 된 아티팩트를 가지고 그나마 의심 가는 부분에 총을 쏘며 무엇인가를 시험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청신은 그런 도유의 움직임 하나하나 눈으로 좇을 뿐, 방관자처럼 서 있었다.

량은 초조함과 몰려오는 공포감에 이를 갈았다. 저 눈엣가시 같은 서도유가 난생처음으로 정상으로 보이는 것도 짜증 나는데,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을 보고 있으려니 더욱 짜증이 났다.

게다가 저놈은 갑자기 나타난 놈이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준 개인 임무에 난데없이 끼어든 난입자.

량은 서도유가 개인 임무의 비밀 유지 조항을 어기고 저놈에게 발설했다고 생각했다.

유량의 탐지 마법에도 걸리지 않았던 걸 보면 저놈은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다.

어떻게 도유가 량과의 동행 소식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량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임을 확신해서 저놈을 끌어들인 게 틀림없었다.

“야, 너. 왜 가만히 있냐?”

“도유 형을 믿으니까.”

짧게 돌아온 청신의 대답에 량은 속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청신은 량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짧은 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유가 흘끗 쳐다본 걸 보고 어쩔 수 없이 대답해 준다는 어투였다.

완벽한 무시의 행위. 량은 채찍을 청신에게 휘두를까 하다가, 어느덧 허리까지 차오른 물에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너도 방법을 찾아야지 왜 멍청하게 서 있어! 넌 안 죽을 것 같냐? 보니까 마법사 같은데! 마법 쓰고 뒈지던가!”

“도유 형.”

량의 외침을 무시하고 청신이 도유를 불렀다. 뭔가 눈치챘는지 도유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네….”

청신이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도유가 움찔했지만, 그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지금 청신이 자신을 부른 말 뒤에 ‘저 새끼 죽여도 돼요?’라는 질문이 생략됐음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예쁘다고 봐주면 나중에 이런 식으로 도유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반쯤 죽여 둘 걸 알기에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나갈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뭐?”

“역시 도유 형이에요.”

언제 시무룩해했냐는 듯 청신이 도유에게 냉큼 따라붙었다.

도유는 량에게서 돌려받은 봉을 들었다.

“보십시오.”

“…뭔데?”

도유가 들고 있던 봉을 허리까지 차오른 물에 담갔다. 그걸 본 청신은 바로 이해하고 씩 웃으며 말했다.

“공간에 교묘하게 뒤틀림이 있네요.”

“뒤틀림이라고?”

유량이 되묻자, 도유가 대답했다.

“굴절되는 걸 보십시오.”

“아…!”

물속에 있는 사물은 빛의 굴절에 따라 그 거리감이 다르다. 이 공간은 등불 없이 온통 새하얬지만 빛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기다란 봉이 어떻게 휘는지 잘 보였다.

“공간 지표 마법 응용이군요. 인간의 육체는 고정시키고, 사물의 좌표는 이곳의 흐름에 따라 변칙적으로 움직이도록.”

“맞아. 그리고 벽이랑 천장에 시험 삼아 고무탄을 쏴 봤을 때도, 일부가 이상하게 꺾이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걸 봤어.”

“아하.”

청신이 감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도유는 주변을 다시 휘둘러 보았다. 지금은 도유의 눈으로도 마력의 흐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떨어져 내린 마력의 흐름은 떨어져 내리는 족족 흡수되고, 바닥에 스몄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잠깐, 그럼 의미 없는 거 아냐? 육체를 고정시키는 경우엔 죽는 것 외엔 답이 없다고 알고 있다고!”

“네, 그러니 제가 깔끔하게 죽여 드릴게요.”

량의 말에 청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정말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 왜 자꾸 시비야? 죽고 싶냐?”

“할 수 있다면 해 봐요.”

“이- 어… 잠깐. 너 목소리가 낯익다?”

“붕어보다 지능이 낮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네요. 비둘기급 지능으로 진화하신 걸 축하해요.”

“이 새끼 너, 전에 그 신입!!”

욱해서 외친 량이 돌연 숨을 들이켜며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도유는, 청신에게 두 번이나 당했던 량이 입을 다무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나갑시다.”

“…어떻게?”

“이걸 잡고, 눈을 감고 제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따라오십시오.”

“뭐?”

“설명할 시간이 아깝네요. 도유 형, 전 형 손 잡을래요.”

“…마음대로 해.”

청신을 말리진 않았다. 실제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량도 이제는 가슴 아래까지 차오른 물에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도유가 잡은 봉의 반대편을 잡은 량은 가슴에 물이 닿지 않도록 슬쩍 뒤꿈치를 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속이면 죽여 버린다.”

“걱정 마십시오.”

“죽일 수나 있을까요?”

키득거리는 청신의 목소리에 량은 또 욱했지만, 이곳을 빠져나가 마도서를 회수하자마자 제가 얻은 비장의 보물을 사용할 생각이었기에 이를 갈며 침묵했다.

도유가 속삭임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로 청신에게 그만하라고 경고를 한 뒤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잘 따라오십시오. 청신아, 너도.”

도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밟는 곳마다 찰팍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자 다른 감각들이 더 예민해지면서 도유의 소리를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량은 의아해했다.

소리는 왼쪽에서 들리다가도, 뒤쪽에서도 들렸다. 오른쪽에서도 들릴 때도 있었으며 그 반대쪽에서 들리기도 했다. 유량은 그 소리를 쫓아 걸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 공간은 대체 뭐지? 어떻게 이렇게 꼬여 있는 거야? 그리고 서도유 저놈은 어떻게 여기서 길을 찾는 거지?’

유량의 상식으로는 이런 공간에 갇히면 무조건 죽는 게 당연했다.

여긴 그냥 개미지옥이었다. 출구도 없고 기어올라 갈 수도 없는 공간. 그러나 도유의 소리를 쫓아 걸으면 걸을수록, 가슴 아래까지 차올랐던 물의 수위가 점점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가슴에서 허리. 허리에서 허벅지. 허벅지에서 무릎….

이윽고 찰팍이는 소리가 나지 않고, 오로지 봉을 끌어당기는 손길만 느껴져 걸음을 멈췄을 때 닫힌 눈꺼풀 위로 잔잔한 도유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도착했습니다. 눈을 뜨셔도 됩니다.”

량은 그의 말을 따라 눈을 떴다. 제일 먼저 새벽을 닮은 푸른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평소 보았던 눈과 그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푸른 눈에 맺힌 미광이 달빛처럼 스며 있기 때문이었다. 량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도유를 보았다.

항상 그를 볼 때마다 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유량 씨?”

그가 머금은 빛이 너무나 량이 바라던 빛과 닮았기에. 그는 좀 더 가까이 보려고 도유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나 그 순간, 아름다운 미인이 량과 도유 사이를 막았다.

“눈 깔아.”

서늘한 눈빛으로 청신이 경고했다. 청신은 안 그래도 작신 밟아 주고 싶었던 벌레가 제 연인의 사랑스러움을 알아보고 꼬여 버린 걸 기민하게 눈치채고 진심으로 살의를 품었다.

량은 난생처음 직면하는 살의에 흠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청신에 의해 죽을 뻔했던 것, 그의 마법에 의해 천장에 처박혔을 때의 고통이 떠올라 꼼짝도 못 했다.

“청,”

만류하기 위해 도유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때였다.

돌연 소리가 사라졌다. 흘러나오던 음악을 꺼버린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청신이 의아함을 느끼며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 덕에 량도 정신을 차리고 도유가 서 있던 방향을 볼 수 있었다.

“도유 형…?”

도유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도유? 야! 서도유!”

량이 변화를 감지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서도유의 이름을 외쳤다. 돌아오는 대답도, 눈으로 보이는 것도 없었다.

공간이 또다시 뒤틀리며 다른 현상이 나타난 게 아닌가, 하고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던 유량은 이질감을 느끼고 청신 쪽을 보았다.

서도유가 갑자기 사라졌다. 이 상황에서 가장 당황하고, 목청을 높이든, 마법을 사용하든 도유를 찾아야 할 건 량이 아니라 청신이었다.

량은 청신을 보았다. 청신은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도유가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걱정도, 당혹스러움도, 분노도 없었다. 그나마 량이 가까스로 알아본 감정은 단 하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평온함’뿐이었다. 일순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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