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93)화 (93/159)

#93

량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방어 마법을 주변에 둘렀고, 도유는 지하 1층에서도 여전히 1층과 동일한 현상이 발생하는 걸 확인했다.

“더 아래인 것 같습니다.”

“점점 물 냄새가 심해지는데.”

그렇게 묵묵히 도유와 량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지하 2층, 3층, 4층… 이윽고 5층에 도착했을 때, 도유는 당황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마력이 아래로 흐르는데 더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산 중턱이다.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거면 아예 산 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정신이 아뜩해졌다.

“아직도?”

“네….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데 어쩌면 산 밑으로 흘러가는 걸지도 모릅니다.”

“하 씨…. 기다려 봐.”

량이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 점점 모이기 시작하는 마력과,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마석을 주먹으로 으스러트리며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을 보충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유가 경악했다.

“당장 멈추십시오!”

“헛소리, 헉!”

유량의 몸이 기울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순식간에 그대로 바닥에 생긴 검은 물결이 량의 허리를 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도유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끌어내려고 했지만 당황한 량이 허우적거렸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량은 공포에 반쯤 이성을 잃었고, 기다렸다는 듯 검은 물결에서 촉수처럼 튀어나온 것들이 그들의 몸에 달라붙으며 검은 구멍 아래로 끌어 내렸다.

대비를 할 틈도 없이 량과 도유는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량이 비명을 질렀다. 살려 줘, 라고. 그의 입 모양이 움직이는 걸 봤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유는 이를 악물고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빛 마법에 근본을 둔 좌표를 찍는 마법. 이동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이라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발동시킨 아티팩트를 있는 힘껏 닫혀 가는 머리 위 구멍을 향해 던졌다.

어둠이 공포로 일그러진 량부터 서서히 삼켜 가기 시작한다. 량은 도유가 잡아 준 손을 놓지 않았다.

악착같이 잡아당기고 기어오르며 자기를 도와주려는 도유를 딛고 홀로 닫혀 가는 구멍을 통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한순간, 량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거다. 도유가 량을 불렀다.

“-!”

제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도유는 량의 손을 꽉 잡은 채로 목소리를 더 쥐어짜 냈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그들의 몸은 완전히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도유는 검은 먹물로 가득한 수조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둠만 보일 뿐이다. 이게 무슨 현상인지, 도유는 알고 있었다.

천화 마을에서 석주언의 결계에 떨어졌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으니까. 마법사의 영역, 즉 결계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느낌이 달랐다. 본능이 소리쳤다. 어서 나가라고, 이대로 끝에 닿으면 죽을 거라고.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이 순간 도유의 머릿속에는 단 한 명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제가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두 번 다시 웃지 못하게 될 사람의 얼굴이.

도유는 이를 악물었다.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건 후폭풍이 끔찍했지만 죽는 것보단 나았다. 결심을 한 도유가 힘을 사용하려던 때였다.

사륵.

새까만 어둠 속에 빛이 스몄다. 아니, 빛이 흩뿌려졌다.

그건 유리를 잘게 부수어 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유는 그게 유리 조각도, 별빛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저건 두 사람을 이곳으로 이끌었던 자연에 머무는 마력의 흐름이었다.

새까만 어둠뿐인 공간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생명의 흐름이 저와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도유는 깨달았다.

지금 바닥에 빨려 들어가던 자연의 마력들이 최종적으로 닿는 장소에 자신들 또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으니 도유를 좀먹었던 공포가 씻은 듯 사라졌다. 푸른빛의 물결. 청신을 닮은 다정한 빛에 기이할 정도로 안도가 됐다. 도유는 결정을 보류했다.

대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부유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사용한 뒤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정신을 잃은 량의 손을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양심의 문제였다.

쏴아아. 물이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이니 저 아래, 도유와 함께 떨어져 내리는 마력의 흐름이 거대한 호수처럼 고인 것이 보였다.

탄성이 저절로 흘렀다. 그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경이로웠으니까.

동시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밝은 빛. 도유는 점점 눈이 부셔 오는 까닭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툭툭.

“으읏….”

언제 정신을 잃었던 걸까. 도유는 눈을 뜨기 전부터 느껴지는 두통과,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의 무게에 자신이 정신을 잃었었다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아. 깨어났다.”

저를 내려다보는 녹색 눈과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

“도유 형, 괜찮아요?”

“청신아…?”

꿈이 아닐까. 도유는 생각했다. 그러나 청신이 사랑스럽게 웃으며 이어서 하는 말에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 저예요. 그래서 도유 형. 저 새끼 죽여도 되나요?”

청신이 눈짓한 곳에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유량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량을 향한 청신의 녹색 눈이 스산하게 번뜩이는 걸 본 도유는 그의 존재가 분명한 현실임을 인지했다. 도유의 침묵을 부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청신이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새끼가 눈치도 없이 마법을 쓰는 바람에 도유 형까지 휘말린 거잖아요. 어떻게 지금까지 특수부에서 목숨을 부지했는지 모르겠지만, 방금 건 도유 형이 아니었으면 죽었으니 그냥 지금 죽여 버리, 윽!”

말로 말하는 것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현실이라는 걸 인지하고, 이 짧은 사이에 겪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속에서 청신을 그리워했던 마음을 파도에 떠밀리듯 떠올린 도유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다급하게 청신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나 너무 다급했던 나머지 치아가 부딪히고, 입술이 찢어지며 느껴진 통증에 도유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청신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다친 건 도유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청신이 심했다. 미인의 입술에 핏방울이 맺히고 그대로 흘러내리는 걸 본 도유가 숨을 들이켜자, 청신이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눌렀다.

“미안, 미안해…. 청신아, 나는….”

“괜찮아요. 많이 미안하면 이따 다시 해 줘요. 그 이상 해 주면 더 좋고요.”

아플 텐데도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다독이는 말에, 도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에 그는 한 손으로는 청신의 손을 꼭 쥐었다. 꿈이 아니길 바라는, 길 잃은 아이처럼 위태로운 손길을 느낀 청신은 기쁜 얼굴로 웃으며 도유의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아 주었다.

*

청신 덕분에 안정을 되찾은 도유는 그제야 주변을 살필 여유를 찾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본 도유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떨어져 내릴 때 보았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자신이 기이한 공간에 있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경악 어린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기이한 걸 넘어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거울. 온 세계가 각기 다른 조각난 거울의 파편으로 기워진 형태의 공간이다.

다만 거울과 다른 것은, 그 어떤 파편에도 그들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는 거였다.

투명하고 매끄러운 은색으로 반짝이는 파편. 일부 파편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갖가지 색을 품었지만, 자세히 보면 재질은 도저히 유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매끈하고, 자세히 보면 결이 있는 벌레의 날개처럼 보였다.

“결계가 변형된 거예요.”

도유가 주위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도록 얌전히 입을 닫고 기다리던 청신의 목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그를 향했다. 그는 도유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마도서를 지키기 위해서 마법사가 설치해 놓은 결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마도서의 영향을 받아 뒤틀리고, 그 상태로 재조립되고, 포화되어서 다시 변형되고… 종내엔 이런 형태를 띠게 된 거겠죠. 아마 10년 뒤에 다시 와 보면 또 다른 모습일 거예요.”

“그런 게 가능해?”

“인간이 하는 건 불가능한데, 마도서는 가능해요. 그리고 이런 경우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머저리 같은 짓이에요.”

“어째서?”

“마법사도 어떻게 보면 자연계의 마력을 담아 놓은 그릇이잖아요.”

도유는 바로 이해했다.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할 때 그릇의 일부를 열고, 거기서 나온 힘으로 마법 현상을 일으킨다. 유량이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정신을 잃은 것도 그릇이 열리자마자 강제적으로 체내의 마력이 모조리 끄집어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량 씨가 저 꼴이 된 거군.”

“네. 저 새끼의 지능이 5%만 더 높았어도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을 텐데. 역시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청신이 눈웃음을 치며 도유를 슬쩍 껴안았다. 적극적으로 외모를 활용하는 탓에 도유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생각해 보면 여기서 죽게 만들어도 아무도 모른다. 임원이 뭐라 할 수는 있겠으나 결국 개인적으로 ‘마도서’를 손에 넣기 위한 일이다.

임원은 대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할 테고, 도유도 지금 청신의 설명을 문서화해서 자업자득이었다고 잘만 둘러대면 납득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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