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91)화 (91/159)

#91

하지만 청신에게는 달랐다. 청신의 키스를 받아들였을 때, 그와 관계를 가졌을 때도 언제나 도유를 멈추게 했던 생각이 뚝 끊긴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이게 사라진 기억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던 찰나였다.

“…?! 왜 울어? 너 내가 다 처음이라고 한 게 그렇게 감동이야?”

도리도리. 청신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고 도유가 서둘러 티슈를 가져오려다가 끌어안겨지는 바람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됐다.

“기뻐서요. 기뻐서…. 도유 형은 한결같아요. 너무 좋아. 이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꼭 그 이상으로 도유 형을 사랑하게 돼요.”

기쁨에 겨워 정신없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언어로 토로하는 감정.

도유는 심장이 빠르게 뜀박질하며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숨 쉬는 게 힘들 정도로 벅차오르는 애정과 기쁨이 뒤섞여 우는 청신의 모습을 보자 도유는 지금 그의 눈물에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지워진 과거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에 대한 호기심보다 다른 감정에 도유는 청신의 턱을 쥐었다.

그가 순순히 도유의 손길에 이끌려 고개를 든다. 도유는 곧바로 청신의 입술을 탐했다. 그에게 배운 대로 천천히, 깊게.

청신의 입술 사이로 웃음기 어린 숨결이 빠져나오는 걸 느끼며, 도유는 기다렸다는 듯 혀를 얽어 오는 그를 받아들였다.

*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새벽, 청신은 눈을 떴다.

졸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녹색 눈은 제 바로 옆에 잠들어 있는 도유를 향했다.

평소라면 시선만 느끼고 바로 깨어났을 도유는 많이 지쳤는지 깊게 잠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청신은 잠시 동안 그대로 눈만 뜬 채 잠든 도유를 보았다.

그에게 있어 서도유는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만질 때마다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사이 감겨 오는 다정한 색의 연갈색 머리카락. 때로는 깊고 푸른 바다처럼 보이나 평소에는 밝아 오는 새벽녘 하늘처럼 경이로운 푸른 눈뿐만이 아니다.

체구가 큰 편이 아니지만 꾸준히 관리하고 단련한 몸은 청신에게 어떤 것보다 든든했고 또 안도감을 주었다.

청신은 그간 겪은 인생의 굴곡을 말해 주듯 도유의 몸 곳곳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그 흉터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도유와 만난 걸 알았던 터라 곧 그 흔적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다.

청신이 사랑하는 건 단연 도유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그는 도유의 사랑을 갈구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아이 같은 망설임도, 사람을 무서워하면서도 다가가려는 용기도 모두 사랑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지금 청신의 곁에 있다.

청신은 당장 도유를 깨워 그와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멱살을 잡힐 거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몸을 일으켜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잠옷 가운을 걸친 그는 고양이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 청신이 도착한 것은 집 내부로 이어지는 주차장 앞이었다.

“청신 님.”

방금 막 도착한 산은하가 고개를 숙였다. 청신은 피로가 짙게 깔린 눈을 한 은하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내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새벽에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오다니 형답지 않은데요.”

“죄송합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유선상으로 말씀드리려다가, 저녁에…. 연락하지 말라 하셨던 것이 떠올라서요.”

“그야 도유 형과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온 겁니다.”

퇴근하기 두 시간 전부터, 도유를 집으로 납치할 생각이 가득했던 청신이 도유에게 만들어 줄 저녁 식사 재료를 사다 놔 달라고 했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업무가 아니라 사적인 부탁인 만큼 보너스와 퇴근을 보장해 주긴 했지만, 은하는 그 연락을 받고 착잡했던 심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주영연이면 몰라도 은하 형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화를 낼 거라는 경고다.

은하는 청신 덕분에 가족의 복수를 하는 은혜를 입은 그날부터 줄곧 그를 모셔 왔기에, 그 치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청신 님께서 조사하라 명하셨던 성화의 마도서에 대한 겁니다.”

성화의 마도서. 청신의 눈이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건방진 임원 하나가 감히 제 사리사욕을 위해 도유를 다른 마법사와 붙여서 그 위험한 곳에 투입할 예정이라는 것을, 성희유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부터 청신은 이미 기분이 언짢았다.

성희유가 도유에게 청신이 지원할 거라고 언질을 해 놨다던데, 도유는 청신에게 지금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청신은 아직 그가 전해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어느 쪽이어도 청신이 도유의 개인 임무에 몰래 함께할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기에 그는 은하에게 비밀리에 입수한 임무지, 즉 목적지를 은하에게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 결과가 나온 것이다. 경청을 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은하가 말했다.

“현재 성화의 마도서가 있는 그 장소 근처가 과거에 청신 님의 아버지-.”

“지금 상황에서는 아버지라는 호칭보다 다른 호칭이 어울릴 것 같네요.”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묘한 불쾌감이 스민 걸 느낀 은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대 인도자가 한동안 머물렀던 곳임을 확인했습니다. 마법으로 완전히 엄폐되어 있어 저는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전대 인도자가 마도서가 그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 뭔가 장치를 해 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청신 님께 보고하러 왔습니다.”

“하아….”

청신이 긴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아직도 그를 원망하니?’

송유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청신은 그때 그녀에게 대답했던 대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다만 이런 식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엮이니, 원망보다는 짜증이 나서 골치가 아팠다.

“마도서로 장난질이라도 치려다가 실패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연구 때문에 거기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수작질을 하다가 방치해 놓은 거면 귀찮겠네요.”

“섬에서 발견하셨던 ‘조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섬에 도착하셨을 때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멀미도 하지 않았던 청신 님이 섬에 가까워질수록 안색이 안 좋고, 종내에 비틀거리셨다고-.”

“섬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는 엄살 부린 거예요.”

“엄살, 이요?”

“도유 형이 자꾸 책만 읽으려고 해서요. 멀미하는 척하니까 바로 걱정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토닥여 주는데 어떻게 제가 아픈 척을 안 해요? 아파 보이려고 도유 형에게 들키지 않게 마법 쓰느라 고생했지만, 보람찼어요.”

“……섬에 도착해서는,”

“냄새 때문에요. 선착장 근처에 있던 고양이인지 새가 먹다 버린 건지…. 뭔지 몰라도 생선 썩는 냄새가 지독하게 나서 울렁거렸던 것뿐이에요.”

저, 냄새에 약하잖아요. 하면서 생긋 웃는 청신을 향해, 은하는 차마 미친놈 보듯 그를 볼 수 없어 시선을 내렸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걱정 마세요, 은하 형. 전 이제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어요. 통제도 못 했으면 제가 도유 형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을까요?”

도유가 들었으면 ‘결혼?’ 하고 되물을 말이었지만 은하는 그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청신의 말도 의심하지 않았다. 통제하지 못했다면 앓아누웠을 테니 이처럼 멀쩡하게, 아니 얼굴이 아주 반짝이면서 매일을 보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도유 형이 가기 전에 제가 먼저 가 봐야겠네요.”

“청신 님께서 말입니까?”

“네. 그 바보 같은 인도자가 무슨 짓을 해 놨든,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죠. 더군다나 성화의 마도서라면 ‘전도(傳導)’와 ‘재생(再生)’이니까. 도유 형에게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서도유 님에게 사용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 말씀은 그분께 기억을-.”

서늘한 시선이 은하를 향했다. 자신이 주제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은하는 황급히 말을 삼키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럼 가 봐요, 은하 형.”

“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새벽에 실례했습니다.”

청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하는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게 된 청신은 달도 안 뜬 새까만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다시 침실로 되돌아갔다.

“으읏….”

다시 침대에 눕는 인기척에 깊이 잠들어 있던 도유가 작게 신음하며 눈꺼풀을 떨었다. 그것을 본 청신은 곧바로 도유를 부드럽게 안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저예요. 더 자요, 도유 형.”

다정한 속삭임에 찌푸렸던 얼굴이 바로 펴진다. 도유는 고개를 끄덕이듯, 청신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곳을 찾은 것처럼 의지해 오는 모습에 청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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