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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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량은 이를 으득 깨물며 복도를 걸었다.
이번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그의 아버지가 량을 호출했을 때부터 불쾌했지만, 그 이후 더욱 불쾌한 일이 발생했기에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멍청한 놈아. 넌 대체 뭐 하고 사는 놈이냐? 머리가 있냐?’
훈련소에서 서도유에게 했던 언행들과 이청신을 얕잡아 보다가 저와 똑같은 나이의 마법사의 힘에 제압당해 천장에 꽂힌 채 다리만 동동 구르고 있던 량을 비웃던 형제의 웃음.
비마법사 주제에, 량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을 잇게 된 량의 친형, 유환은 아버지에게 혼나고 사장실을 나오던 량을 붙잡아 시비를 걸었다.
그는 량이 자신을 죽일 수 없으며, 해칠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대놓고 량을 향해 빈정거렸다.
‘특수부에 들어가서 정신 좀 차렸겠거니 했는데. 뭐? 비마법사 특수부 팀원한테 시비 걸고 죽이려 들어? 네가 마법사지 깡패야? 게다가 아버지께서 그렇게 모시려고 하는 현영하 이사님이 눈여겨보는 인재를 건드렸다고?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
현영하 이사. 카단 협회뿐만 아니라 마법과 관련된 협회와 기관들이 모셔 가고자 하는 노인의 이름을 떠올린 유량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이 들어간 손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량은 화가 났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놈도 저놈도 죄다 서도유를 원한다.
비마법사 주제에, 팀원들을 희생시켜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은 바퀴벌레 같은 놈을 원한다.
량이 존경했던 하창연도 서도유를 가진 성희유를 부러워했다.
대체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 알 수가 없다.
서도유를 공격하려다가 역으로 당해 꺾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량이 방심해서였고, 서도유가 이상하고 기이한, 불쾌한 아티팩트를 썼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수작인진 모르겠지만 그 아티팩트만 빼앗으면 서도유는 그냥 바닥을 기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다. 제대로 붙는다면 량은 서도유를 밟아 작신 부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량은 스스로가 부족함 없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배경도, 마법사의 재능도, 능력도 모두 뛰어나다고 자신했다.
실제로 팀 내에서 량의 전투력은 상위권이다. 순수한 개인의 힘으로 치면 량을 힘으로 누를 수 있는 건 팀장 하창연밖에 없었다.
그는 현영하 이사가 서도유를 눈독 들이는 것도 잘못됐다 생각했다.
그 노인네가 량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서도유 같은 인간이나 원하는 거라고 믿었다.
량은 생각했다. 그 이사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그토록 인정받고자 매달리는 할아버지, 현재 카단의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전대 천약 기업의 대표였던 유정현에게 인정받으면 누구도 자길 얕볼 수 없을 거라고.
저를 보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화를 냈던 아버지도, 비아냥거렸던 형도, 도유를 탐냈던 하창연 팀장도 저를 다시 볼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위해 유량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량은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 잠시 뒤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코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향수 냄새가 났다. 량은 무심코 찌푸릴 뻔한 얼굴을 가까스로 유지하고는 창가를 등진 의자에 몸을 반쯤 파묻고 있는 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아버님.”
오늘 새벽, 량은 유정현에게 개인적인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릴 때 량을 한 번 보고 혀를 찬 뒤로 좀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유정현이 직접 량에게 연락을 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호출은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량아.”
노인의 잇새 사이로 흐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량아, 하는 애칭만으로도 기쁜 나머지 량은 고개를 숙이며 외치듯 말했다.
“…! 네, 할아버지. 뭐든 시켜 주세요!”
유선상으로 량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할 것이 있다고 량을 카단이 아닌 개인 사무실로 부른 유정현이 손짓했다. 량은 그에게 다가갔다. 노인의 앙상한 손이 책상 위 테이블을 가리켰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단다.”
물이 번진 것처럼 흐린 어조다. 량은 그것에 의문을 느꼈지만, 유정현이 가리킨 것에 시선을 빼앗겨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책상 위에는 종이로 인쇄된 지도가 있었다. 요즘은 흔치 않은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알아보기엔 어렵지 않았다.
“그걸 자세히 보거라.”
“네….”
얼떨떨했지만 량은 지도를 가져가 유심히 보았다. 이곳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도시와 시골의 경계쯤 되는 곳에 위치한 야산이 빨간색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 를….”
툭.
돌연 유정현의 고개가 꺾이듯 아래로 기울었다.
노인의 몸이 축 늘어지며 입가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량은 갑작스러운 유정현의 모습에 당황하며 그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아, 역시 어중간한 게 제일 사용하기가 까다롭다니까. 벌써 고장 났네~.”
유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량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유정현이 앉은 의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량과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안녕~ 또 만났네. 그동안 잘 못 지냈나 봐? 안색이 안 좋은데.”
“…누구냐, 너?”
완전히 상황 파악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량은 본능적으로 유정현의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진 것의 원흉이 눈앞의 남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허리춤의 채찍으로 손을 뻗었다. 그걸 본 남자, 영연이 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혔다.
“나 너랑 싸우려고 온 거 아냐. 애초에 너랑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걸? 가장 이용하기 쉬운, 입 무거운 마법사를 초대하라 했더니 널 초대해서 놀랐다고.”
그렇게 말하며 영연은 량이 적의와 경계로 채찍을 휘두기 직전이거나 말거나, 그를 무시한 채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위치 파악도 끝났고, 시험용 마법이 성공한 건 확인했고, 도유 형도 낚았으니깐~ 이제 네 역할만 잘해 주면 되겠지.”
영연은 마지막 말을 하며 량을 보았다. 량은 딱 봐도 수상하고 이상한 녀석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멈칫하고 있던 탓에 영연과 무방비로 눈이 마주치자 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원래는 이사를 조종해서 널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보니 지금의 네 상태가 딱, 내 마법과 궁합이 좋은 상태네. 이거 참, 하늘이 돕는다니까!”
“…!”
뻐끔.
량은 입술을 움직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채찍을 쥔 손이,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량은 당황했다. 그는 영연의 헛소리를 비웃고,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 채 움직이려고 버둥대는 것처럼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마치 회의실에서 이청신이라는 놈과 처음 마주쳤을 때, 그놈이 했던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그때보다는 상황이 낫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까?
적어도 억지로 힘을 주면 몸이 움직이기는 했고,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영연을 공격하기엔 턱없이 힘이 모자랐다. 그걸 깨달은 량의 표정이 점점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그때처럼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죽게 되는 건 아닐까. 지금은 량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
유정현은 정신을 잃을 듯했고, 영연은 장난감을 보듯 량을 구경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이다.
당황과 두려움이 량의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며 영연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방의 정신이 흔들리고 평정을 잃으면 잃을수록, 영연의 마법이 가진 힘은 더더욱 강해진다. 그 증거로 량의 눈에서 점점 초점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유량이라고 했지? 량아, 이제 네 생각이 느껴지네. 인정받고 싶구나? 오래전부터 널 봐 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고 있고.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영연의 마법이 그의 목소리에 깃들어 량의 정신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이번에 널 모욕한 서도유에게도 앙갚음을 할 기회를 줄게.”
“어, 떻, 게….”
“너와 서도유에게 개인 임무를 줄 거야. 그 임무에서 서도유와 함께 마도서를 찾고, 직전에 그를 향해 이 종이를 찢어. 그럼 서도유는 영원히 죽어도 깰 수 없는 악몽 속을 헤매게 될 거야.”
독이 스며들자, 량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영연이 건넨 종이를 받아들였다.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에 적힌 마법진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냈다. 그가 담당했던, 지금은 카단 주관의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김서현이 지니고 있던 범법자의 마법이었다.
“달라….”
량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연이 웃었다.
“너도 외웠었구나? 맞아. 달라. 내가 그 마법을 토대로 새로 만든 마법이라. 정말 열심히 만들었다고~ 너는 서도유를 해치고 싶어 하고, 난 목적을 위해 서도유가 망가져야 하니까 일석이조지! 게다가 생각해 봐, ‘량아.’”
영연은 축 늘어진 유정현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힘없이 늘어진 노인의 손이 영연의 움직임에 정처 없이 흔들린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 량과 시선을 맞추며, 영연이 달게 속삭였다.
“네가 마도서를 찾아오면, 네 할아버지는 널 인정해 줄 거야. 그럼 너희 가족도 자연히 널 인정하게 될 테지.”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토록 바랐으나 받지 못한 것. 량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영연은 자신의 마법이 온전히 량에게 스며든 걸 확인하고 생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 힘내자, 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