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성희유는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성격이었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퇴근 따위 없이 일하는 성희유는 의외로 휴식 시간이 올 때면 철저하게 자신의 시간을 누리고, 누군가가 그 영역을 침범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굉장히 불쾌해했다.
그랬던 성희유가 지금, 자신의 사적인 시간에 도유의 사적인 공간에 침입했다.
바로 전까지 깊게 잠에 빠져 있었던 탓에 혼몽한 머리로도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희유가 이런 식으로 찾아올 리가 없었다. 밀려오는 불안감에 숨이 무거워질 즈음이었다.
“가만히 있어요.”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 도유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작은 손이 그의 가슴께를 눌러 움직임을 막았다. 약한 힘인데도 커다란 바위에 눌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다. 몸에서 힘을 빼니 성희유가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도유 씨는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알겠죠?”
“…네?”
약 1분 전에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겠다고 친절한 제안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도유는 기가 막혔다.
도유가 그러거나 말거나, 성희유는 도유의 책상 위에 있는 사탕 케이스에서 사탕까지 한 알 까먹으며 되물었다.
“대답해요. 도유 씨는 꿈을 꾸고 있는 거고, 우연히 제 꿈을 꾼 거라고. 그렇죠?”
직장 경력 20년 차. 직장인의 본능이 소리친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한다고. 도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성희유가 바라는 대답을 했다.
“…네. 저는 지금 꿈을, 팀장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좋은 대답이에요. 그럼 꿈속의 제가 도유 씨에게 좋은 걸 알려 줄게요. 아쉽게도 로또 1등 당첨 번호는 아니지만요.”
그건 그것대로 무섭다. 정말로 성희유가 1등 당첨 번호를 불러 준다고 해도, 그게 다 치료비로 나갈 거라는 예언이 될 것 같아 차라리 꾸지 않느니만 못했다.
“내일…. 아니, 오늘 출근하시면 임원 중 하나가 도유 씨를 부를 겁니다.”
“저를요? 저, 뭔가 사고 쳤습니까?”
지금까지 임원들과 엮일 일이 전혀 없었던 도유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임원’이라고 하니 청신과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 말고도, 특수부 일을 해 오며 은근슬쩍 은폐했던 몇몇 사소한 일들이 파도처럼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비리를 저질렀다거나, 남에게 피해를 끼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카단의 규칙과 어긋나는 일들이 몇 건 있었기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성희유는 손에 쥐고 있던 사탕 껍질을 사탕 케이스 옆에 내려 두며 대답했다.
“아니오, 비밀리에 해야 할 임무가 있어서 부르는 것뿐이에요. 일단 도유 씨의 직속 상사인 저는 모르고 있어야 하는 사안이라…. 하지만 ‘꿈속’의 저는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전하게 됐어요.”
성희유가 몰라야 하는 사안이라는 말에 도유는 푸른 눈을 깜빡였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눈에 총기가 깃든다. 그것을 보며 성희유는 흡족하게 웃었다. 언제나 올곧게 자신을 보는 충성스러운 부하는 기대를 배신하는 법이 없다.
“팀장님이 모르셔야 하는 비밀 임무가 ‘제게’ 주어지는 거면. 임원이 내리는 개인 임무… 라는 뜻입니까.”
임원에게는 특수부의 제1팀을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
즉,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움직여도 카단은 임원을 심문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제1팀의 팀원 된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권리였지만 그 권리를 부여함으로서 능력이 있는 사형수들을 1팀으로 이동시켜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이에 특수부는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맞아요. 그만큼 비밀 유지가 중요하죠. 그러니 도유 씨,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들은, 어디까지나 도유 씨가 꿈속에서 들은 말이에요. 알겠죠?”
농담이라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성희유가 대검을 꺼내 들고 ‘그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자체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네요.’ 하며 머리를 후려칠 걸 알았다. 도유는 여름날 차 안의 슬라임처럼 졸아붙어서 대답했다.
“네. 저는 계속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좋아요.”
작게 키득거리며 대답한 성희유가 침대에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달빛에 성희유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아이의 육신이었지만 그가 입은 옷은 성인들처럼 매우 단정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그의 주홍색 눈만큼은 깊고, 또 깊어서 자연히 긴장됐다.
“한 달 전, 마도서가 발견됐어요.”
“…마도서라면, 마법사든 비마법사든 관계없이 제한 없이 무궁무진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말씀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이번에 발견된 건 성화(晟火)의 마도서라고 해요.”
마도서는 그 이름에 따라 특화된 마법이 따로 존재했다. 가령 현재 세간에 알려진 마도서 중 수천의 마도서는 물과 치유에 대한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며, 하늘의 뜻마저 거슬러 죽음 직전에 놓인 사람의 몸을 완치시켜 주는 경이로운 힘.
그에 수천(水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옛날에 성희유가 설명해 줬던 것이 떠올랐다. 다른 마도서들의 이름들도 그런 식으로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붙었다.
도유는 성화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성화가 종교적 색이 짙은 그 성화인지 다른 성화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그게 어느 쪽이든 간에 그다지 평화로운 힘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어떤 마도서든, 마도서의 존재 자체가 전쟁의 씨앗이지.’
마도서가 등장할 때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언론에서는 비마법적인 원인에 의한 사고사로 다뤘지만 실제로는 마도서를 차지하기 위한 마법사들의 다툼이었다는 걸, 카단에 온 뒤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성화의 마도서는 어떤 마도서입니까?”
“자세한 힘은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가 추측하기로 강화 계열이나 정신 계열일 것 같은데….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도유 씨에게는 그 마도서를 회수하는 임무가 주어질 겁니다.”
“제게요? 아니, 위치가 파악된 겁니까?”
“네. 다만 굉장히 위험한 곳이에요. 도유 씨는 마도서를 지키기 위해서 한 마법사가 온 생애를 걸고 만든 곳에, 그 마도서를 가지러 가는 거니까요.”
“…….”
성희유가 직접 입에 담은 ‘위험’이라는 단어에 도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공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임원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그곳에 가서 마도서를 회수해야 한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마른세수를 하는 도유를 내려다보며 성희유가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엔 도유 씨 혼자 보낼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죠.”
특수부의 다른 팀원이나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마법사를 수배해서 붙여 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임원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꼴 보기 싫은 특수부 제1팀의 개죽음을 바라서 보내는 건 아니니까.
그걸 알았지만 도유는 울화가 치미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도유가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도유 씨. 저는 제가 아끼는 부하를 그딴 늙은이의 사리사욕에 희생시킬 생각 따윈 없어요.”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표정이다. 도유는 멍하니 성희유를 봤다. 그동안 짜증 날 때도 웃음을 짓던 성희유가, 분노로 굳은 얼굴로 가만히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일단 임무는 받으세요. 거절하면 귀찮게 굴 테고, 의무 불이행으로 징계 위원회 소집이나 하겠죠. 차라리 받고 실패하는 게 나아요.”
“실패를 전제로 하십니까.”
“그 마도서가 어떤 힘을 가졌다 한들, 아무래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좀. 그렇잖아요?”
즉, 마도서 회수를 목적으로 하지 말고 생존을 목적으로 하라는 뜻이다. 어렵지 않게 성희유의 뜻을 알아들은 도유가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때, 그가 말을 이었다.
“도유 씨를 위해 준비해 둔 수가 있으니, 제가 사무실에서 줬던 배지. 잘 들고 가요.”
배지라면 청신에게 전해 주라고 했던 아티팩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도유는 그가 굳이 청신을 언급했던 것이 사무실 내부에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합당하게’ 아티팩트를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희유가 이렇게까지 저를 신경 써 줄 줄은 몰랐다. 도유는 잠시 울컥했다.
성희유는 그런 도유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야 되돌아온 익숙한 웃음에 도유가 안도할 무렵, 성희유의 손이 도유의 눈 위에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어둠이 들이닥쳤지만, 눈 위를 덮은 따듯한 체온에 두렵지는 않았다.
“그럼 도유 씨. 이만 꿈에서 깨어나세요.”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눈 위를 덮고 있던 성희유의 손이 사라졌다. 도유가 다시 눈을 떴다. 성희유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가 앉아 있던 침대 위를 보았다. 눌린 자국도 없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도유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도유가 알뜰하게 채워 놓는 사탕 케이스 옆에 놓인 빈 껍질 하나.
저게 아니었다면 꿈을 꿨다고 생각했으리라. 그가 먹은 사탕의 빈 껍질만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기에 도유는 빈 껍질을 손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