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팀장도 아닌데 빡빡하게 굴지 말고 도와줘~ 그리고 이런 거에 마법 쓰면 팀장이 혼낸단 말야. ‘화영 씨는-’ 어쩌구 하면서.”
“세 살짜리 어린 애이신가요? 나중에는 세수도 마법으로 하시겠군요.”
“아하하, 맞아 맞아! 완전 똑같다, 도유야. 역시 팀장이 키운, 히이이익!”
뒤에서 튀어나온 성희유의 존재에 화영이 식겁하며 도유 쪽으로 피신했다. 그녀는 재빨리 도유가 앉아 있던 의자를 끌어 성희유와 자신의 사이를 갈랐다.
도유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아무리 의자에 앉았다지만, 방금 굉장히 가뿐하게 도유를 움직였다. 이 정도 힘이면 도유의 도움 따윈 필요 없었다.
아니, 도유가 불만을 품은 건 그게 아니었다.
“저도 무섭습니다만.”
도유가 속삭였다. 화영이 도유와 똑같이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야, 그래도 넌 살 가능성이 높잖아. 넌 잘못 안 했으니까.”
“맞는 말이지만 굳이 끼어들어서 방패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의리 없는 놈…. 넌 술 안 줄 거야.”
“애초에 저는 음주를 하지 않,”
“화영 씨.”
“넵, 팀장님!”
도유가 말하던 중에 끼어든 성희유의 목소리에, 화영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성희유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화영 씨는 이족 보행을 하는 인간이라는 종족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하 3층 주차장에서부터 짐승처럼 저 상자를 발로 차면서 여기까지 온 걸까요?”
“하하하, 너무 커서….”
“즉, 고작 저 정도도 들지 못한다, 이거죠? 특수부 제1팀 전투 마법사가?”
도유는 화영을 봤다. 화영이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여기서 화영이 부정하면 성희유가 어떤 말을 할지 도유도, 화영도 알았다.
‘훈련소 3개월 코스 티켓 확정.’ 모를 리가 없다.
“들 수 있습니다!”
“들어 봐요. 무리는 하지 말고.”
성희유가 상냥하게 말했지만 화영은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우렁찬 기합과 함께 팩 와인이 한가득 든 상자를 들고 일어났다.
가뿐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이다. 솜사탕이 든 상자를 든 사람처럼 전혀 힘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저럴 줄 알았다. 도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화영은 마법사고, 신체 강화 마법을 평상시에 계속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지금 도유보다 육체적인 면에서 더 뛰어났다.
한 손으로 도유를 아령처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는데 한 달 치 월급을 다 걸 수 있었다.
“좋아요. 잘 드네요.”
“고작 이 정도로 무리할 리가 없습죠!”
“그럼 그거 그대로 차에 싣고 집으로 가져가세요.”
“네?!”
“사내에서 음주는 금지거든요. 도유 씨. 화영 씨에게 사내 규칙 중에 이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조항은 전부 꿰고 있었기에 어려울 것도 없다.
도유는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의자를 질질 끌고 돌아와 성희유의 말대로 사내 규칙이 정리된 파일을 보냈다. 화영이 반쯤 우는 소리를 하며 가져왔던 팩 와인 상자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유 씨.”
곧바로 팀장실에 들어갈 줄 알았던 성희유의 목소리에 도유는 몸을 돌렸다. 내려다보니 성희유가 도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청신 씨에게 이것 좀 전해 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청신을 호출해서 주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도유는 순순히 성희유가 건넨 배지를 받아 들었다. 통신용 아티팩트다. 제복 주머니에 챙겨 넣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엔 본부 근처 숙소에서 자죠?”
“네.”
“오늘도?”
“네, 아카데미 임무 시 지급받았던 숙소는 다음 주면 없앤다 하셔서…. 짐을 다 빼 둔 상태라 본부 쪽에 있는 숙소에서 지냅니다.”
“그렇군요.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요.”
“예, 감사합니다.”
“오늘 퇴근할 때는 따로 인사하러 오지 말고 바로 가세요.”
“예…? 네.”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요.”
그 말을 끝으로 성희유는 미련 없이 팀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도유는 멍하니 굳게 닫힌 팀장실 문을 바라봤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자 도유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도유는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다람쥐처럼 팀장실을 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평소라면 저런 건 궁금해하지도 않을 성희유다.
그런 그가 넌지시 불편한 게 있음 말하라느니, 퇴근할 때 인사하지 말라느니, 열심히 하라느니 말을 하니 도유는 순식간에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성희유에게 잘못했을 법한 부분들을 짚어 내려고 했지만 수십 번을 되뇌어 봐도 짚이는 게 전혀 없었….
‘설마 들켰나?’
일주일 전에 다녀왔던 훈련소의 마지막 날, 도유는 청신이 네 번째 훈련을 아티팩트 하나로 끝내고 1위까지 한 대가를 치렀었다.
처음으로 그와 잠자리를 가진 것이다.
뒷정리는 청신이 마법으로 싹 했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설마 신성한(?) 훈련소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징계를 받는 건가 하는 생각에 초조해하던 도유는, 곧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럴 리가 없지.’
청신과의 관계가 들킨 게 아니라 그 전에 도유가 잠깐 훈련소를 벗어나 적성교의 부지에 간 것을 들켰을지도 모른다.
추적할 수 있는 아티팩트나 통신 용품은 하나도 챙겨 가지 않았고 CCTV들이 없는 곳만 오갔던 터라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잠시 훈련소를 벗어난 게 들켜서, 곧 죽을 목숨이니 마지막 근무를 잘해 보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도유는 힘없이 핸드폰을 들어 청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 시간 돼?]
죽기 전에 청신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죽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청신이 거절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죄송해요, 도유 형. 오늘 저녁에 일이 있어서….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메시지를 보자마자 도유에게 전화한 청신이 한 말은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도유는 그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잠시, 안부를 묻는 청신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안도했다. 도유가 카단에 의해 죽을 목숨이 되었다면 청신이 바로 알고 언질을 줬을 테니까.
“아니야, 그냥 얼굴 보고 같이 저녁 먹고 싶었어. 그럼 내일은 돼?”
[“그럼요! 저도 도유 형이 너무 보고 싶어요. 내일 제 집에서 같이 식사할까요? 도유 형이 좋아하는 맛있는 걸로 잔뜩 차려 줄 테니 배불리 먹고 나서 제 것도 먹여 줄게요.”]
“그, 뒤에 건 됐고-.”
[“저 그렇게 별로였어요? 도유 형, 좋다면서 제 등 다 긁어 놨잖아요. 저 아직도 쓰라린데.”]
“…아직도 아파?”
일부러 그랬던 건 결코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쾌락이 너무나 낯설고 무서운 동시에 기분이 좋아서 정신이 말 그대로 반쯤 녹았을 때 본능적으로 한 행위에 불과했다. 수화기 너머 청신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농담이에요, 형. 형이 예쁘게 울먹이면서 연고 발라 줬는데 아플 리가 없잖아요.”]
“거짓말 말고.”
[“진짜인데. 안 되겠다. 내일 다시 해 보면 증명이 될 테니 꼭 해요.”]
“참 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도유의 목소리에 스민 웃음기를 청신도 들었는지 그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도유 형.”]
귀에 감기는 목소리에 도유의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도유는 지금 제 얼굴이 청신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며 대답했다.
“…나도.”
[“그럼 또 연락할게요. 먼저 끊어요.”]
도유는 짧은 인사 뒤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자기가 먼저 끊지 않으면 계속 손에 들고 있을 걸 알았고, 한창 수업 시간 중에 짬 내서 전화한 청신의 시간을 이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그냥 팀장님이 변덕을 부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도유는 아까보다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퇴근 후 청신과 가벼운 통화를 마친 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도유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경계보다 먼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깊이 자다 일어난 터라 바로 눈을 뜨기가 어려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야 했다. 그 노고의 끝에 도유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방 안에 스며든 달빛.
도유의 침대 위에 쭈그리고 앉아 누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동그란 주홍색 눈. 아이의 얼굴은 너무나 익숙했다.
평상시 입는 카단의 제복이 아니라 사복이었지만,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기에 도유는 안심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악몽이구나.’
뭐 이런 개 같은 꿈이 다 있담. 내일 청신에게 말해 줘야지 하고 생각하며 도유가 다시 눈을 감고 잠들려던 때였다.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드릴까요?”
친절한 권유에 도유는 눈을 부릅떴다.
“어서 오십시오, 팀장님.”
처절할 정도로 빠른 반응에 성희유가 생긋 웃었다.
*
성희유가 도유의 사적인 공간에 멋대로 들어온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도유를 잠시 돌봤을 때에 몇 번 방에 침입한 적이 있기야 했다. 하지만 그건 성희유의 집이었고, 그가 그렇게 침입을 한 원인은 대부분이 도유 때문이었다.
어린 날의 도유는 겁이 많았으며, 씻는 것을 무서워해서 성희유가 부를 때마다 방문을 잠그고 웅크리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