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어떤 때는 고양이나 강아지 같고, 가끔 맹수가 되는 녀석이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뱀이다.
도유는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 최대한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다시 말해 봐.”
“제 거기가,”
“그, 그거 말고. 유량, 강이환, 이화정, 박희성을 어떻게 했다고?”
“저에게 시비를 걸기에 천장에 처박아 버렸다고 했잖아요. 정말 그게 다예요.”
“그게 문제라니까…!”
“왜요, 내가 걔네를 딴 데 박은 것도 아닌데. 그리고 죽지 않도록 강화 마법으로 감싸서 박아 줬어요.”
이 정도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지 않냐고, 아름다운 미인이 고개를 갸웃한다. 순수하게까지 보이는 맑은 눈동자에는 억울함마저 보였다.
“하아….”
도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리를 꼬았다. 의자에 파묻히듯 깊이 등을 기대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그나마 유량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저에게만 반감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상을 깨고 청신까지 끌어들였다.
아무래도 굴비 엮듯 4명을 질질 끌고 목표 지점부터 시작점까지 돌아가는 모습이 생중계된 것에 대한 원한이 엉뚱하게 번진 것 같았다.
그들은 도유가 청신이 하는 걸 보지 않고 훈련장을 떠나자, 분을 누르지 못하고 청신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미 한 번 청신에게 밟혔던 적이 있던 량은 소극적이었으나 청신이 침묵으로, 아니 무시로 일관하니 겁먹은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건 다른 3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도유에게 했듯 청신을 만만하게 보고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그리고 그 발언에 ‘서도유’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청신은 손짓 하나로 그들을 천장에 박아 버렸다. 어지간한 부유 마법으로는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천장에.
“일단, 청신아. 네가 날 위해서 화를 내 준 건… 왜 그렇게 봐?”
마치 아름다운 명화를 감상하듯 도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청신과 딱 눈이 마주친 도유가 움찔했다. 시선으로 핥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집요하고 질척거리는 시선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형 지금 자세가 어떤지 알아요?”
도유는 고개를 숙여 제 자세를 살폈다. 다리를 벌리고 앉은 것도 아니고, 목욕 가운의 기장도 있으니 다리를 꼬았다고 해서 안쪽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묘한 시선으로 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르면 됐어요.”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도유는 다시 다소곳이 앉으며 끊겼던 말을 했다.
“네가 날 위해 화를 내 준 건 고마운데, 다음부터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본인들이 모르도록 조용히 처리해.”
“…….”
녹색 눈이 크게 떠진다. 얼떨떨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에 이번에는 도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도유 형이라면 다음부터는 그냥 무시하거나,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난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형, 전에는 참았잖아요.”
‘전’이 회의실에서 청신이 유량을 죽이기 직전까지 갔던 때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도유는 ‘아….’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때는 시선이 많았잖아.”
“네?”
“…특수부는 팀 내에서 싸움을 하면 안 되거든. 딴 사람은 몰라도 1팀은, 특히 나는 이 이상 제재를 먹으면 위험해. 그래서 너처럼 대놓고 처리할 수 없었어.”
“‘대놓고’요? 그럼 뒤에서 처리한 적이 있다는…?”
“몇 번. 유량 씨에게는 아직 한 적 없어. 그 사람보다 더 정도를 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도유는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자기가 너무나 치졸한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신이 눈을 반짝이며 몸을 기울이는 까닭에,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청신은 지금 저녁을 굶은 도유를 위해 기존에는 숙소에 도입되지 않았던 룸서비스까지 주문해 둔 상태다.
음식을 가져올 때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청신이 이런 일로 도유를 안 좋게 생각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도유는 머뭇거리며 조금씩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던 이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는 3단 트레이에 훈련소의 요리사가 혼신의 힘을 짜냈을 듯한 모양새의 음식이 한가득 담겨 올라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내내 청신은 굉장히 즐거워했다.
“도유 형이 왜 제 멱살을 잡았는지 이해했어요.”
카트에 실어 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직접 세팅하며 청신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도유가 민망함에 뺨을 붉혔다.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렇게 좋아하면 좀 민망한데.”
“듣는 입장에서는 재밌으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도유 형.”
탁. 마지막 접시를 내려놓은 청신이 도유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앞으로 형이 직접 나설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테이블의 세팅을 마친 청신은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너 설마, 나한테 시비 건 사람들을 찾아서 죽…, 아니. 뭔가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죽이거나, 죽고 싶을 정도의 뭔가를 하고 싶게 만들어 줄 속셈이느냐 묻는 순간 ‘그거 좋은 방법이네요. 그래야겠다.’ 하고 대답할 것만 같아서 말을 바꿨다.
청신은 이런 도유의 말실수가 귀여웠는지, 물을 마시려다 말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도유 형이 비폭력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것 알아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믿는다.”
“네, 고마워요. 그보다 어서 먹어요. 도유 형이 좋아하는 것들로 부탁해 뒀어요.”
“내 식사 챙겨 주려고 이 훈련소 요리사에게 네가 누구인지 밝힌 건 아니겠지?”
“여기 메인 셰프가 제가 독립하기 전까지 저희 집에서 일했던 분이라서요. 부탁하니까 흔쾌히 들어주신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듣던 와중 다행이다.
도유가 안도하며 한 상 가득 차려진 이름 모를 요리를 즐기기 위해 젓가락을 든 순간, 청신이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시선을 들자 바로 청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낄 무렵, 청신이 말했다.
“저 오늘 도유 형이 말한 대로 네 번째 훈련에서 아티팩트 총만 써서 1등 했어요. 그러니 든든하게 먹어 둬요.”
툭.
힘이 풀린 도유의 손에서 젓가락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신은 신혼집에서 처음으로 함께하는 식사 시간을 맞은 신부처럼 어여쁘게 웃었다.
*
한 달 동안 훈련소에서의 생활을 마친 뒤, 도유의 일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즉, 본부의 특수부 제1팀 사무실에서 출퇴근을 하며 사무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아카데미의 연구실에 출근했지만, 현재 휴학 처리를 해 놓은 상태였기에 도유는 아카데미에 갈 수 없었다.
‘청신이는 지금쯤 한창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네.’
아카데미에서 함께 졸업 작품을 만들 때도 종종 청신은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다. 그때의 청신은 최소한으로 강의를 선택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학점에 맞춰 여러 과목을 필수로 수강해야 했다.
수강을 듣지 않는 대신 졸업 작품 제작을 돕는 것으로 받을 수 있었던 학점이 도유의 휴학으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청신이 수강은 재미가 없다면서, 담당 교수가 들었다면 천인공노했을 망발을 하며 자기도 도유와 함께 본부에 출퇴근하고 싶다고 엉겼지만 도유는 칼같이 거절했다.
그가 특수부에 들어오게 된 원인은 도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도유 때문에 학업까지 포기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야아~!”
이상한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제게 접근하는 것을 느낀 도유가 곧바로 손을 움직였다. 턱! 얼굴을 노린 것을 잡자마자 손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에 도유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가 손에 쥔 것을 보았다.
“…웬 지압 볼입니까?”
“너도 나이가 들어 봐~ 그런 거라도 틈틈이 해야 움직일 만하거든. 그보다 오랜만이네, 서도유! 안 보여서 뒈졌나 했는데.”
도유는 제게 가까이 다가온 여성, 같은 특수부 제1팀 소속인 유화영의 행색을 훑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화영 씨. 제복 좀 제대로 입으십시오.”
제복을 입은 건지, 벗다 만 건지 헷갈릴 정도로 이상한 차림이다.
캐릭터가 그려진 반팔 티셔츠에 제복 셔츠를 꿰고 그 위에 재킷만 걸쳤다. 임원들이 항상 입으로 지겹게 ‘품행 단정’을 외치고 다니는 터라, 카단 내에서 화영처럼 제복을 입는 이들은 없었다.
“싫어. 귀찮아.”
“그렇게 입고 계시면 진 씨가 당신을 보고 뭘 배우겠습니까?”
“안 들려, 안 들려! 백휘처럼 잔소리하지 마. 그놈 임무 나가서 사무실 온 건데, 네가 있을 줄은.”
재수도 없지, 하며 그녀는 다시 사무실을 나갔다.
대체 왜 온 걸까. 하고 도유가 다시 몸을 틀어 이번 달 정산 내역서를 작성하려던 때, 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화영의 기척이라 무시하려고 했지만 질질 끌리는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
커다란 종이 박스다. 활짝 열려 있는 덕분에 도유의 자리에서 의자만 살짝 빼고 봐도 내용물이 훤히 보였다. 팩으로 된 와인이 한가득이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나 좀 도와줘.”
“혼자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경량 마법은 어려운 게 아니다. 아티팩트로도 가능했다.
더군다나, 비마법사인 도유와 달리 화영은 강한 전투 계열 마법사다. 그런 그녀에게 경량 마법 따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