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곧 있으면 생일인데. 마석으로 만든 목걸이를 주면 이 녀석이 잘 사용할 수 있을까.’
“만져도 돼요.”
“어?”
“제 가슴이요.”
“됐다.”
“다른 곳도 마음껏 만져도 돼요.”
“…….”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다. 청신도 시답잖은 말을 하는 대신 도유의 머리를 말리고 목덜미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주는 일에 열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돌아와서 걱정했어요. 거기,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사역마까지 움직이려고 했다니까요.”
“역시 알고 있었구나.”
“네. 도유 형이 카단에서 한 행동들은 모두 제게 보고가 되니까요.”
청신이 타월을 걷어 갔다. 그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기쁜 얼굴로 생긋 웃고는,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빗질해 주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 내려던 도유는 자신이 그런 기미를 보이자마자 청신의 녹색 눈이 서운함에 가늘어진 것을 보고 길게 한숨을 쉬며 다시 손을 내렸다.
“내가 거기에 가려고 한 이유, 뭔지 알아?”
“어떤 대답을 바라요?”
능글맞게 웃거나, 글쎄요, 하고 얼버무릴 줄 알았다. 하지만 청신의 대답은 질문이다.
당신이 바라는 걸 대답해 줄 거라는 뜻을 내포한 말이 되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도유는 망설였다.
그런 도유의 망설임을 읽은 청신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숙소에 있는 샴푸나 바디 워시의 향이 다 똑같을 텐데 유독 싱그럽고 달게 느껴져 청신은 도유의 입술을 삼킬 듯 머금고 빨았다.
저항할 수 있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청신의 행동이 ‘입막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담은 채, 카메라를 들여다보듯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청신은 그런 시선마저 기껍다는 듯 도유를 탐했다.
청신은 도유가 아무것도 묻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명료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이 순간 도유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마음을 드러내듯 도유를 탐하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도유의 목젖에 입을 맞췄다.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잘근잘근 깨물며 눈치를 보자 그제야 반응이 돌아왔다. 하지 말라는 뜻이 역력히 담긴 거부의 손길. 청신은 물러났다.
“괜찮아요. 물어봐도 돼요, 도유 형. 겁낼 필요 없어요.”
“…!”
자신의 속내가 고스란히 들키자 도유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도유의 허리를 팔로 끌어당기며 청신은 그의 푸른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눈을 마주한 순간 도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청신이 제 생각을, 제 안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으며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깊은 눈동자에 가슴이 떨려 왔다.
“형은 지금 내가 상처받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요.”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게 직접 묻지 못하고 혼자 알아보고 있는 거죠. 형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에서 나와 만났을까 봐. 그래서 제가 상처받았을까 봐.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제가 상처받아서 형을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워서 질문도 못 하고 있는 것, 맞죠?”
“너, 너…!”
도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짚어 냈다.
도유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청신은 도유가 기가 차 입술을 벙긋거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니 도유 형. 다시 물을게요.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말해 줘요.”
“…나는, 네가….”
가운 너머 청신의 손이 도유의 허리 아래로 내려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착실하고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청신의 손길에 도유는 황당함보다 안도를 느꼈다. 평소의 그와 똑같다.
도유가 어떤 말을 해도 청신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마저 심어 주는 믿음직한 손길이었다.
청신의 불손한 손길을 불쾌해하는 대신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한 도유는 잠시 자괴감을 느끼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가 나와 만난 게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렸을 때 처음 만났던 건지 알고 싶었어.”
“이유를 알려 주시겠어요?”
도유는 입을 다물었다.
정령이 했던 말과 청신을 죽이기 위해 공격성을 보였던 것을 통해, 과거의 청신이 도유를 죽이거나 해치려고 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정령은 도유를 사랑하고 아낀다. 그건 도유가 제일 잘 알았다.
그 존재는 도유가 마음을 준 인간이나 위협한 인간들을 도유의 눈 너머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해서 도유를 버리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의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하지만 그랬던 정령도, 질투를 하되 인간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 의지를 언어로써 전하는 법도 없었다.
청신에게만은 달랐다.
정말로, 도유가 기억하지 못하는 누락된 3개월의 시간 동안 청신이 어떤 이유로든 도유를 죽이려고 했던 게 맞는다면.
그리고 지금 그 사실을 청신의 입을 통해 전해 듣게 된다면 도유는 이전처럼 의연하게 있을 수 있을까. 자문을 한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못 버틴다. 도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어. 미안해.”
“아쉽지만, 알았어요.”
청신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는 기색이었기에 도유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청신이 대답했다.
“도유 형과 적성교에서 처음 만난 게 맞아요.”
“역시. 그럼 내가,”
“도유 형.”
상세히 질문을 하려던 순간 청신이 도유의 말을 막았다. 뭐든 대답해 줄 것만 같았던 청신이 선을 긋듯 단호한 어조로 부르자 도유는 입을 다물었다.
“도유 형은 어째서 저와 만났던 때를, 적성교에 있었던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대답을 원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청신이 바로 말을 이었으니까.
“인간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고 괴로운 기억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 기억을 잊어버린다고 해요.”
경고였다. 3개월이라는 긴 시간, 그것도 하필이면 적성교에 납치당한 직후부터 구출되기까지의 그 기억이 없는 이유를 되짚어 보라고. 알지 않는 게 낫다는 경고였다.
그러는 너는 다 기억하고 있잖아.
그럼 넌 그때 날 죽이려고 했던 게 맞는다는 거야?
도유는 목 아래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청신의 손이 부드럽게 도유의 허리께를 쓸었다. 그 손길은 성적인 의도보다는 달래는 손길에 가까웠다.
결국 도유는 시선을 떨궜다. 아직은 감내할 용기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
어렵게 마음을 열게 된 대상이 정령이 말했던 것처럼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또한 만약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지금의 청신이 자길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촛불만큼 작아진 호기심이 연기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현상 유지를 위해 도유는 정령의 말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해 볼 게 있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대답 대신 애정을 품은 부드러운 웃음이 되돌아왔다. 도유가 물었다.
“너는 내가 그날의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
의외의 질문이었을까. 미인의 입가에 떠올랐던 웃음이 사라지고 더없이 솔직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표정이다.
놀람, 수긍, 당황 따위의 감정에서 비롯된 꾸며 낸 표정이 아니라서 도유는 도리어 안도했다. 녹색 눈이 눈꺼풀 아래로 사라진다.
그는 제법 길게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도유는 차분하게 그의 눈이 자신을 담기를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기다림에 결실이 맺혔다.
“바라지 않아요. 저는. 도유 형이 기억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숨김없이 진솔한 대답에 도유는 웃을 수 있었다.
*
그러나 그 이후 이어진 대화에 도유는 더는 웃을 수 없게 됐다.
아니, 오히려 그는 눈을 번뜩이며 청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도유의 거친 손길에 청신이 수줍어하며 제 위에 올라탄 도유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도유 형, 흥분한 건 알겠지만 진정하세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어? 뭐, 그 인간들을 어떻게 했다고?”
도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청신이 벌인 짓을 듣고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성희유뿐이다. 도유는 벌써부터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벽에 박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놈이 기어코 일을 벌였다.
유량과 그를 따르는 인간들에게 말이다.
“형, 진정하라니까요. 내려와요, 일단.”
“다시 말해 봐. 네 입으로 말할 때까진…!”
갑자기 제 허벅지를 움켜쥐는 청신의 손길에 도유가 흠칫했다. 잠깐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은 청신이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이 제 위에 있으니까 흥분된단 말이에요.”
도유는 흠칫했다. 안 그래도 청신의 위에 올라탄 순간 무심코 닿은 묵직한 것에 놀라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세워 앉았던 거였다.
유량과 그의 추종자들을 말 그대로 천장에 처박아 버렸단 말에 흥분해서 멱살을 잡고 따지는 사이 그를 자극해 버리고 말았다는 걸 깨달은 도유가 사과하려던 때였다.
허벅지를 움켜쥔 손이 살짝 벌어진 목욕 가운 사이로 들어오려고 한다. 뱀이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감촉에 도유는 참새처럼 푸드덕하며 청신의 위에서 내려왔다.
청신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면서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