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청신아.”
“네, 도유 형.”
성적표를 끌어안고 눈을 반짝이는 도유의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던 청신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해 오자, 도유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이상했어?”
“음.”
드물게, 곧바로 ‘아니요’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청신이 고민하는 모습에 도유는 마른침을 삼켰다. 청신은 고민하는 척 그런 도유의 표정을 감상하며 미소 지었다.
떨리는 푸른 눈동자와, 훈련을 하는 동안 흐트러진 연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이 희미하게 떨리는 걸 보며 청신은 저 손을 붙잡아 핥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을 깨물면 몸을 움츠리면서도 청신을 밀어 내지 못할 걸 알아서. 그대로 제게 몸을 허락할 거라는 확신을 이제는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청신은 여느 때보다 짓궂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관점에서 사람을, 그것도 성인 네 명을 굴비 엮듯 한 줄로 묶어서 질질 끌고 가는 건 미친 것처럼 보이기는 하죠.”
심지어 도유는 제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까지 묵살해 버렸다.
‘괜히 함정 마법을 건드리실 수도 있으니 이 편이 안전합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냥 그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고단수의 방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현장을 보는 건 교관들 중에서도 평가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것도 마법을 통해 최소한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던 도유로서는, 바깥으로 나오자 쏟아지는 시선과 대형 모니터에 뜬 시험장 내부의 흔적들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렴, 도유에게 굴비처럼 묶여서 질질 끌려 나온 조원들보다 당황했겠냐마는.
“생중계되는 걸 알았다면 그냥 기절시켰을 텐데….”
기절시키면 그 네 명은 3개월짜리 고강도 코스 훈련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 도유 딴에는 나름 배려해 준 거였다.
하지만 이 배려 덕분에 그들은 실시간으로 자기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거나 황당해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됐다. 그 덕분에 앞으로 그들이 얼마나 도유에게 시비를 걸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귀찮았다.
“걱정 마세요. 도유 형은 잘 대처했어요.”
“청신아.”
“네, 도유 형.”
도유는 물끄러미 청신을 보았다. 반가면 탓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도, 기분 좋은 듯 올라간 입꼬리도 모두 평상시와 같아 보였다.
유량이 청신에 대해 한 말을 듣지 못한 게 틀림없다.
“…아니야. 열심히 해.”
“약속 잊지 마세요.”
“안 잊어.”
도유가 준 아티팩트 총 하나로 통과하면 청신이 만족할 때까지 키스해 주겠다는 약속을 어찌 잊겠는가. 도유가 담백하게 대답하자 청신은 흡족한 듯 양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난 이만 쉬러 가 볼게.”
“…제게 승리를 기원하는 키스 같은 건 안 해 줘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저는 오히려 좋은데요.”
“내가 안 좋아.”
“도유 형은 이제는 제가 안 예뻐 보여요…?”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도유는 잠시 죄책감이 들었으나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괜히 네 이야기 하는 거 싫어.”
“……!”
그렇지 않아도 특수부 제1팀에 들어온 뒤, 가명이 아니라 이청신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 중인 청신이다. 이번 훈련으로 이름이 꽤 알려진 상태에서, 안 좋은 쪽으로 많은 소문이 도는 도유와 엮여 봤자 좋을 일 따윈 전혀 없었다.
“그럼 난 간다.”
먼저 훈련을 마친 사람에게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은 물론, 내일 아침 기상 시간까진 아무도 도유를 찾지 않고 호출할 일도 없다. 훈련소 마지막 날이기에 일종의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도유는 지금, 이 훈련소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과거 자신이 발견됐던 적성교의 흔적이 남은 곳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청신은 35조가 들어가기 전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고, 저녁까진 필시 여기에 붙잡혀 있을 테니 그 틈에 빠르게 보고 오는 게 나았다.
“저 하는 거 안 봐요?”
청신의 입술이 내려간다. 그에 대해 차라리 몰랐다면 나았을 텐데, 지금 저 가면 아래로 어떤 눈빛으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에 도유는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마음이 진정된 도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편이 더 기대되잖아.”
“…그렇죠.”
청신이라면 분명 아티팩트 총 하나로 네 번째 훈련을 무리 없이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도유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니었다. 특히 이런 경우엔.
“그럼, 나중에 봐요.”
속삭이듯 내뱉은 인사가 유독 달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도유는 대기실을 나갔다.
*
청신이 말해 준 통로를 통해서 20여 년 전 적성교가 터를 잡고 살았던 넓은 부지에 다녀온 도유가 숙소로 돌아온 건,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도유는 지친 걸음을 이끌고 굳은 얼굴로 숙소 문에 카드 키를 가져다 댔다. 소리 없이 잠금장치가 돌아가며 문이 열리자, 그는 그제야 한결 풀어진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오셨어요, 도유 형?”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저를 맞이한 익숙한 미인의 목소리에 도유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그는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방 밖을 나갔다가, 방 밖의 명패에 제 이름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일련의 행동을 가만히 보던 청신이 잠에 취한 고양이처럼 반쯤 늘어져 있던 소파에서 몸을 세워 앉으며 웃었다.
“…야, 이청신.”
“도유 형. 저를 불러 준 건 기쁜데 일단 씻고 오는 게 어때요? 형은 찝찝한 거 싫어하잖아요.”
“됐…. 아니야. 그럼 잠시 기다려 줘.”
“형이 기다리라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천천히 씻고 오세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빙긋 웃는 청신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도유는 그의 권유에 따라 일단 욕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돌아오자마자 청신을 찾아갈 생각이 있긴 했지만, 그가 이렇게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했기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도유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눈을 감자 점점 흘러들어 온 가느다란 물줄기가 웅덩이를 만들어 내듯 오늘 본 풍경들이 어둠 아래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오늘 그는 혼자 적성교가 있던 터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20년 전 200여 명의 교도들이 동반 자살을 한 뒤로, 버려진 땅에는 그들이 지냈던 건물마저 싹 다 밀린 채로 녹음만 가득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가득한 공간은 벌레와 갑자기 등장한 인간의 존재에 화들짝 놀라며 도망가는 야생 동물과 새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곳들이 그러하듯, 자연을 머무는 마력의 흐름조차도 이상 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20년 전과는 너무나 다른 탓일까? 도유는 그곳을 한참 동안 탐색했었다. 그러나 떠오르는 기억도 없었고, 특별히 수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카단의 자료 보관소에서 열람한 자료들이 더 상세하고 명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동안 정령이 제 눈을 빌리지 못하게 약으로 억제하고 있던 것도 완전히 해독시켰지만, 정령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방금 전, 숙소로 돌아온 도유가 청신을 보고 놀란 이유 중 하나가 정령의 태도 때문이었다.
도유의 눈을 통해 청신을 보고 있을 정령이 이전과 같은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음, 도유 형.”
생각에 잠긴 채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을 씻고 세안까지 마친 도유는 목욕 가운만 걸친 채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청신이 손에 목욕 가운과 타월을 들고 있었다.
“저를 유혹하려는 건 굉장히 좋은데, 일단은 지금 상태로는 도유 형이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까 물기부터 닦죠.”
그 말에 도유는 욱하고 말았다.
“누가 널 유혹한다는 거야?”
질문하자마자 도유는 움찔하며 청신의 눈치를 보았다.
섬에서 있었던 일과 적성교에 대한 자료를 보며 했던 생각들에 속이 복잡해서 저도 모르게 따지듯이 묻고 말았다.
청신은 잘못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 도유가 사과하려던 찰나, 청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저를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이 형 말고 또 있겠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청신의 녹색 눈이 도유를 위아래로 훑었다.
한결같은 청신의 반응에 안도함과 동시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도유는 헛웃음을 삼켰다. 목욕 가운을 입은 걸 유혹이라고 하는 건 대체 무슨….
“…!”
도유는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가 흠칫 놀라며 재빨리 목욕 가운을 더욱 꽉 여몄다.
청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들고 있던 타월로 푹 젖어 있는 도유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잘못 건드리면 깨지기라도 할까, 답답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말려 준다.
도유는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수건에 가려 청신의 하관과 목, 셔츠만 보인다.
답답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편히 있었던 것뿐일까. 언제나 단정한 셔츠의 목깃 단추가 서너 개 정도 풀려 있다.
도유는 문득 청신이 액세서리 같은 걸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마법사들은 만약을 대비해서 마석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목은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