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79)화 (79/159)

#79

“그럼 다음에 또 봐, 은하 형~!”

“청신 님 말 잊지 마십시오.”

“걱정 마, 걱정 마! 내가 애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은하가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한 걸 본 영연은 배시시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달칵.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영연은 걸음을 옮기며 씨익 웃었다. 잘하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쉽게 서도유를 해치고, 청신의 정신도 무너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개량한 ‘꿈’ 마법은 그 인간에게 실험해 봐야겠다.’

신문 기사에 있던 마도서의 흔적을 발견한 마법사의 이름을 떠올린 영연은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이어 세 번째 훈련이 끝날 때까지 의외로 유량과 그의 추종자들은 도유를 건드리지 않았다.

조별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에서는 도유의 발언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저들도 낙제점을 받고 싶지는 않았는지 최소한 협력하기는 했다.

유량의 주도하에는 그야말로 말 잘 듣는 충견처럼 굴었다.

도유는 그게 기가 막혔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저런 편협한 사고방식 덕분에 도유가 처음으로 팀전에서 낙제점을 받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런 도유와는 다르게 청신은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솔직히 도유는 놀랐다.

이번 훈련에서는 매주 조별과 개인별로 점수를 주고 등수를 부여한다. 모두가 마법사였지만 그들 중에서는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도 많았고, 도유처럼 위험한 현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렇지만 각자 잘하는 부분은 달랐기에, 매주마다 1위가 바뀌는 게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그 관행을 깬 사람이 나왔다. 심지어 도유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청신. 그는 3주 연속, 조별과 개인에서 1위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도유 혀엉.”

너무나 자연스럽게 주인 없는 숙소에 홀로 앉아 있던 청신이 도유가 들어오자마자 냉큼 엉덩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도유는 날다람쥐처럼 저를 덮쳐 오는 청신의 품에 얼결에 안겼다가 그를 떨어트리기 위해 팔을 움켜쥐고 밀어 냈다.

예상은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과연 체력과 체술에서 1위를 받은 인간다웠지만, 도유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지금 그는 청신에게 안겨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삼 주 전. 청신은 도유에게 ‘힌트’라면서 훈련소를 몰래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뒤, 그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유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키스하고 싶다, 만지고 싶다는 같잖은 변명으로 주둥이를 들이밀며 말을 막았다.

그게 쌓이고 쌓여 오늘에 이르렀다. 도유는 청신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12살의 3개월 중에 너와 내가 만났느냐고. 그러나 청신은 뭐든 말할 생각이 티끌도 없어 보였다.

“야, 이청신.”

“네, 형.”

“놔.”

“요즘 도유 형이랑 붙어 있질 못했잖아요. 전 도유 형이 부족해요. 응? 도유 형. 좀만 더 이렇게, 아니 이 이상 형을 만질 수 있게 해 줘요.”

사랑을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가 도유를 유혹했으나, 도유는 청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김으로서 끊어 냈다.

“아파요, 형.”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지?”

“제가 뭘요?”

가증스럽게 청신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도유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는 모습을 보니 살짝 치밀어 올랐던 화가 금방 누그러들고 말았다.

“도유 형, 제가 형에게 잘못한 일이 뭔지 모르겠어요.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깨달은 표정을 지은 청신은 도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도유가 그러거나 말거나, 청신은 설탕을 녹인 물처럼 달달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도유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제가 눈치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도유 형.”

“…….”

뻔뻔한 발언에 도유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이상 채근하는 것도 못 할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고, 무엇보다 내일 있을 훈련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청신을 조금 더 쉬게 하고 싶었다.

“네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

“같이 자면 안 돼요?”

“네가 내 방에서 나오는 걸 누가 보면 무슨 말이 돌겠어.”

“이 훈련소에서 저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으니 걱정 마세요, 형.”

즉, 걸릴 것도 걸리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도유는 한숨을 쉬며 청신에게 놓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팔뚝을 툭툭 치자 청신이 아쉬워하면서도 도유를 놓아줬다. 도유는 방 안에 있는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마시려다가 청신을 돌아봤다.

“너도 줘?”

“괜찮아요.”

남은 물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도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청신에게 손짓했다. 강아지처럼 기뻐하며 청신이 냉큼 도유에게 갔다.

“첫날에 아티팩트나 장비 같은 거 안 챙겼지?”

“네. 챙길 필요를 못 느껴서요.”

“그럴 것 같았다. 자.”

서랍장에 넣어 놓았던 총을 건넸다. 첫날에 혹시나 해서 청신이 사용할 만한 걸로 미리 챙겨 놨던 거였다. 탄환도 건네주었다. 청신은 순순히 받아 들었지만 이것을 주는 의미까지는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내일 하는 훈련에서 사용하게 될지도 몰라. 들고 가.”

“이걸 제게 주면 도유 형은 뭘 쓰고요?”

“내가 쓸 건 있어. 탄환은 각각 다른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순서 미리 외워 둬.”

“그럼 이거, 저 주려고 일부러 챙겨 두셨던 거예요?”

“응. 첫날 외에는 장비나 도구 추가 제공은 안 하니까….”

그게 이 훈련소의 악질적인 면이다. 첫날을 제외하면 아무리 훈련에 필요한 도구라 해도 물품을 지급해 주지 않는다. 실전에서는 필요한 게 그때그때 있을 수 없기에, 그런 것도 겪어 보라는 뜻에서 말이다.

‘사실 더 악질적인 건 내일 하는 훈련에서 나오지만.’

이번엔 얼마나 피를 볼까. 지난번에 참여했던 훈련을 떠올린 도유가 씁쓸하게 웃다가, 감동한 얼굴로 자기를 빤히 보는 청신과 눈이 마주쳤다. 도유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흠칫하며 물었다.

“네가 총을 쓸 줄 알던가?”

카단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지만, 도유가 알기로 청신은 따로 총기를 다루는 훈련은 받지 않았다. 여차하면 알려 줄 생각으로 현재 이 시간에 사용 가능한 사격장의 층수와 호수를 떠올렸지만 취침 시간 전이라 이용 가능한 곳이 없었다.

도유가 청신을 걱정하기 시작했을 무렵,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알아요.”

“배웠어?”

“배워 뒀어요. 제 첫사랑이 총 쏘는 게 멋있어 보인다고 해서 익혔거든요.”

도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청신을 보았다. 첫사랑. 청신의 입에서 나온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낯선 동시에,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첫사랑을 입에 담는 동시에 그 ‘첫사랑’을 떠올렸을 게 분명한 청신의 입가에 맺힌 부드러운 미소가 처음으로 예쁘게만 보이지 않고, 생소한 감정을 만들어 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다만 청신이 제 숙소에 멋대로 들어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바로 전까지 빠르게 뛰던 심박수가 느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체한 것처럼 목 아래가 무겁고 울렁거렸다. 도유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입을 다물고 시선을 떨궜다.

“도유 형, 왜 그래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맑고 밝은 목소리. 속을 누르는 무게가 더 가중되는 기분이 들었다. 도유는 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감정을 무시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사용할 줄 안다면 됐어.”

“모처럼 도유 형이 준 거니까 사용할 일이 없어도 꼭 사용할게요.”

아. 도유는 웃는 청신의 얼굴을 보고 침음을 삼켰다.

자신의 가슴을 누른 묵직한 감정이 뭔지 지금 알아차렸다. 이건 질투였다.

그동안 도유에게만 한결같이 사랑한다고 하던 청신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첫사랑’으로 삼았다 생각하니 그에 질투가 난 것이다.

만에 하나 청신의 앞에 첫사랑이 나타나면 도유에게 지친 청신이 그 첫사랑에게 가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지독히 어리고 얄팍한 생각과 불안감. 도유는 자기 자신의 졸렬함에 어이가 없었다. 질투를 하고 있는 거다. 이름도 성별도 모르는 청신의 첫사랑에게.

“…만약.”

하지만 그게 어때서. 도유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일 훈련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총 하나로 끝내면, 키스해 줄게.”

“……!”

“네가 만족할 때까지.”

지금 이야기한 ‘첫사랑’에 대해 청신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이렇게 말하면 청신은 내일 있을 훈련을 떠올리는 동시에 내내 도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도유는 그걸 원했다.

청신의 눈에 맺히는 광채가 유독 도드라진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도유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도유는 그의 눈동자에 맺힌 감정을 읽고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주먹을 쥐었다.

미쳤다, 서도유. 당장 자기를 삼키고 싶어서 짐승처럼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상대에게 질투심으로 이딴 말을 하다니.

자책하기도 잠시, 청신이 도유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주먹 한 뼘 정도 되는 거리를 남겨 놓고 청신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키스할 거라고 생각했던 도유는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후회할 텐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에 내려앉았다. 무엇을 후회한다는 것인지 가늠해 보기도 전에 청신이 손을 뻗었다. 그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도유의 입술을 누른다. 입술을 누른 손가락은 턱을 감싸 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