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하지만 도유의 기대와 달리 눈에 띄는 건 없었다. 그나마 보이는 건 슬슬 점심 식사를 마치고 무리 지어 나오는 카단의 제복을 입은 타 부서 사람들의 모습뿐이다.
거의 혼자 하는 훈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주일 사이에 친해졌는지 각기 다른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즐거운 듯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때, 도유는 제 뒤에서 슬금슬금 접근해 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가만히 있었다.
“누굴까요?”
뒤에서 도유의 눈 위를 손으로 덮은 청신의 목소리에 도유는 기가 찼다. 귀에 달라붙는 나긋나긋한, 애정이 가득 담긴 미성이 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까.
왜 정해진 대답을 원하는 걸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훈련이 시작된 일주일간 청신이 이런 식으로 장난을 거는 건 처음이었다.
칼같이 시간을 지켜서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하는 훈련소 내부의 분위기상, 사적으로 대화를 할 시간이 지극히 짧았기에 도유는 기꺼이 그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글쎄, 누굴까.”
“힌트를 드릴까요?”
“적당히.”
위치상 사람들 눈에 쉽게 띄는 곳이 아니라 하더라도 산책 삼아 돌아다니다 보면 반드시 둘을 보게 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괜한 말이 돌까 봐 도유가 미리 경고하자 청신이 웃었다.
“아쉽네요. 키스하면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그럼 뭘 힌트로 줄까….”
고민하는 목소리가 노래하듯 싱그럽다고 생각하며 도유는 슬쩍 권유해 봤다.
“그냥 답을 알려 주는 건?”
“저 쉬운 사람 아니에요.”
“……응. 그렇구나.”
똑 부러지는 대답이 이렇게 신빙성 없는 것도 능력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유는 이 시간을 즐겼다. 짧은 점심시간. 맛없는 샌드위치. 일주일 내내 허탕을 치고 있었던 탓에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청신의 장난에 단번에 기분이 들뜨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주변에 없다면 짧게 키스해 줘야지. 드물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청신은 놀라며 보석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기쁘게 웃을 것이다.
그 웃음을 떠올리니, 지금 눈이 가려진 것이 조금 아쉬웠다. 지금의 표정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옅게 웃음을 머금은 입술, 여름의 녹색보다 더 생기 있는 녹음을 머금은 눈을 내리깔고 눈을 반짝이며 도유를 내려다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좋아요, 정했어요.”
“뭔데?”
“3층 동관 제2 탈의실에서 오른쪽을 보면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요.”
힌트라기에 음란한 말을 하거나 애교를 부릴 줄 알았던 도유는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잠시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신은 도유의 눈을 덮고 있던 손 하나를 내려 도유의 가슴 위를 덮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다섯 걸음, 앞으로 세 걸음. 지금 드린 걸 바닥에 가져다 대면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나올 거예요. 그 문으로 들어가서 계속 걷다 보면, 훈련소로 진입하기 전에 봤던 갈림길 쪽으로 나갈 수 있어요. 거긴 카단의 감시 영역 밖이니까 걸릴 염려도 없고요.”
과실처럼 다디단 목소리가 속삭이는 말은, 마치 도유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그가 바라던 것을 속삭였다.
도유는 뱀에게 목덜미를 붙들린 새처럼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질문을 해야 한다는 건 알았다. 혀끝에 말이 걸린 채 도통 소리로 나오지 않는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멈춰 버린 도유의 등 뒤로 청신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바라는 걸 찾을 수 있길, 저도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사랑해요. 도유 형.”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물러난다. 목덜미에 따듯하고 말랑한 입술이, 그 작은 틈으로 흘러나온 청신의 옅은 숨결이 닿았다 사라진다. 그 감촉이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도유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멍하니 청신이 있었을 자리를 바라보던 도유는 불에 덴 사람처럼 크게 움찔하며 청신이 더듬었던 제 가슴을,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딱딱하고 동그란 것이 닿았다.
그것만이 청신의 존재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
가벼운 발걸음이 이어진다. 새가 쫑쫑거리며 뛰는 것처럼 영연은 평소보다 들뜬 걸음을 옮겼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김서현에게서 받아 낸 범법자의 마법을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개량해 냈기에 밀려 있던 일을 전부 해치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아직 온전히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성공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실험을 해 보지 못한 상태였기에, 서도유에게 사용하기 전 실험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 이곳을 찾았다.
계속 이어질 것 같던 영연의 걸음이 멈춘 건 산은하의 개인 사무실 앞이었다.
똑똑똑!
“은하 형! 들어간다!”
“영연 씨.”
일방적으로 통보한 영연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기 전에 그의 등 뒤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연은 뒤돌자마자 저를 맞이한 피로에 찌든 얼굴을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와, 청신이가 얼마나 은하 형을 굴려 먹고 있는 거야? 형, 괜찮아?”
“괜찮습니다. 그보다 직접 찾아오신 용건이 무엇입니까?”
산은하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는 서로 전화로만 대화를 주고받던 대상이 직접 찾아왔으니 꿍꿍이가 있으리라는 것을 간파해낸 것이다.
“밖에서 이야기하지 말고 안에서 이야기하자. 나 간만에 은하 형이 끓인 커피 마시고 싶어.”
쾌활한 부탁에 은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사무실 문을 열어 주었다. 영연은 제집에 들어가듯 먼저 사무실 내부로 들어갔다.
청신의 비서 역할을 하는 은하가 감당해야 할 업무가 사무실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걸 본 영연은 곧바로 질색했다.
“양이 엄청 늘었네.”
“네.”
짧게 대답한 은하는 영연이 말했던 커피를 내려 주며 냉장고에서 다과를 꺼내 왔다.
단것을 싫어하는 청신이었지만, 이따금 아티팩트 주문 제작을 하러 오는 손님을 맞이할 때가 있어 주기적으로 구비해 놓는 거였다. 영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은하는 영연이 다과를 먹는 걸 흘끗 보다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청신이 자리에 없는데도 청신의 자리를 비워 둔 채다. 영연은 처음 봤을 때부터 한결같은 은하를 보며 다쿠아즈를 꿀꺽 삼켰다.
“청신이 어디 갔어?”
“직접 물어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냉정하네. 아직도 나 의심하고 있는 거야? 이미 카단에서 밝혀졌잖아.”
“사실을 여쭤본 것뿐입니다.”
“청신이가 나 차단했어. 도유 형한테 번호 딴 게 있어서 형한테도 전화해 봤는데, 도유 형도 날 차단한 것 같아.”
영연이 투덜거렸다. 실제로 청신이 도유 몰래 동의 없이 주영연의 번호를 차단시킨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같았기에 영연은 ‘상처받았다’라는 표정으로 커피를 술처럼 들이켰다. 은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청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말했다.
“청신 님께서는 한 달 동안 카단의 훈련소에 계실 예정입니다.”
“‘의뢰’도 안 받고? 아직 주기는 아닐 테지만…. 늦어질수록 아플 텐데?”
“…….”
“뭐, 알았어. 한 달. 청신이가 훈련소에 짱박혀 있다, 이거지.”
“청신 님께서 영연 씨께 괜한 짓 할 생각 말라는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같이 사고 치는 줄 알겠네.”
은하는 정말 모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는 금방 사무적인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재미없는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영연은 열심히 다과를 먹다가 테이블 끄트머리에 놓인 신문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사들에게만 유통되는 마법사 전문 신문이다.
“이런 재미도 없는 쓰레기를 청신이가 읽는다고?”
“그런 ‘재미도 없는 쓰레기’는 제가 읽습니다.”
“아, 정말? 그치만 형은 비마법사잖아.”
“청신 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읽을 수 있습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케이스에 넣어 놨던 안경을 꺼내 든다.
영연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지, 아니면 이번에 김서현 건으로 영연을 의심하게 되면서 그랬는지 몰라도, 산은하에게 실험하려던 계획이 물 건너가고 말았다.
만일 그에게 실험을 한다면 그 즉시 청신이 알아차리고 영연을 죽이러 올 거다. 영연은 말끔하게 포기하고 신문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 좀 때우다가 다른 실험체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내용을 쭉쭉 읽던 영연의 눈이 한 기사에 멈췄다.
‘500년 전 사라졌던 성화(晟火)의 마도서, 그 흔적이 발견되다.’
그는 기사를 읽어 내리며 눈을 빛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마도서란 성배와 마찬가지다.
현재 소재지가 파악된 마도서는 수천(水天)의 마도서와 도연(道連)의 마도서, 그리고 녹서(綠曙)의 마도서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영연은, 신문에 나온 이름들을 한 번씩 훑어본 뒤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다 드셨으면 이만 가 주십시오. 일이 바쁩니다.”
“알겠어~ 근데 형, 이 신문 가져가도 돼? 재밌는 기사가 많아.”
“가져가셔도 됩니다.”
“고마워!”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 영연은 곧바로 신문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미련 없이 바로 떠날 준비를 하는 영연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은하의 표정을 무시하고, 영연은 손까지 흔들며 그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