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내게 말해 줘.”
“도유 형에게요?”
덜컹! 차가 크게 흔들렸다. 큰 돌이라도 밟은 듯했다. 그에 혀를 씹을 뻔한 도유는 서늘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대답했다.
“응. 일단 나한테 말해.”
그럼 무슨 소용이냐, 하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청신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없이 운전만 했다. 그가 대답한 건, 저 멀리 훈련소로 가는 표지판이 보였을 즈음이었다.
“알았어요.”
그리고 그 이후, 훈련소에서 도유는 이때 청신이 대답한 ‘알았다’는 말이 어떻게 알아들었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확인하고 정정해야 했다고 이마를 짚으며 후회했다.
*
산골 깊은 곳에 위치한 카단의 합동 훈련소는 거대한 돔형의 새하얀 건물이다.
‘여긴 몇 번을 와 봐도 외계인 우주선 같네.’
도유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번이 다섯 번째였던가. 창문도 없는 건물 안은 마치 거대한 수용소처럼 느껴졌지만, 저 안에서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결계가 각 층별로 펼쳐진다는 걸 알기에 갇힌 기분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불쾌해.’
담배 형태의 약을 빨아들이며 도유는 미간을 좁혔다.
눈의 기능을 약화시킨 탓에 지금은 볼 수 없었으나 기이한 저 건물 안에는 자연을 떠돌아다녀야 할 자연계의 마력의 흐름이 잔뜩 고여 있었다.
그나마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면 좀 순환이 되는 것 같았지만, 한계가 있었기에 도유는 이곳에 올 때마다 이번에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도유 형.”
주차를 마치고 온 청신이 손을 내밀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얼결에 손을 잡으려고 했던 도유는 멈칫하며 손을 거뒀다. 청신이 고개를 갸웃한다. 반가면을 쓴 탓에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벌어진 미인의 입술을 보고 그가 의아해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도유는 다 타 버린 약을 휴대용 재떨이에 넣으며 경고했다.
“가면, 절대 벗지 마. 벗고 싶으면 나와 단둘이 있을 때만 벗어.”
“음.”
이상한 소리에 도유가 의아하기도 잠시, 청신이 도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찰나에 청신이 도유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없었지만 카메라에 찍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유가 청신을 밀어 냈다. 그러나 청신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도유의 귓불을 깨물어 왔다.
“읏, 야…!”
“그렇게 제 얼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싫어요?”
“뭐?”
“인정해요. 제가 예쁘고 잘생겼으니까 벌레들이 꼬일까 봐 그러는 거죠? 아, 너무 기뻐요. 도유 형이 저처럼 질투해 주니까 너무 좋아요. 형. 키스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요?”
이미 질문과 동시에 제 입술을 도유의 입술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너 나중에…!”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다른 이의 기척을 느낀 도유는 화들짝 놀라며 청신을 밀어 냈다. 청신도 기척을 느꼈는지 아쉬워하면서도 도유를 놓아주었다. 둘이 떨어지자마자 이쪽을 향해 오던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재수도 없지.’
제2팀 유량과 이다연이다. 그들도 도유와 청신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유와 청신에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도유도 같은 행동을 하며 량의 표정을 살폈다. 과연 그는,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괜한 바람인가 보다, 생각하며 도유는 청신을 봤다가 곧바로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들어가자.”
“네, 도유 형.”
순순히 도유를 따르는 듯했지만 도유는 보고 말았다.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가기 전, 반가면 아래로 청신이 유량을 훑는 모습을. 분명 작은 계기만 있으면 바로 회의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마법으로 량을 괴롭힐 것만 같았다.
“안 돼.”
어떤 부연적인 말도 없이 단호하게 내뱉은 한마디에, 청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도유가 다시 말했다.
“안 된다고 했어, 청신아. 대답해 줘.”
“네에.”
“…….”
이쯤 되니 도유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도유가 뭔가 하지 말라는 말을 했을 때, 사고를 치기 전에 ‘네에.’라고 길게 대답한다는 것을.
청신이 처음으로 특수부에 와서 그가 입을 제복을 가져다줬던 탈의실에서 도유를 덮치려고 했을 때도, 특수부 1팀에게는 휴가가 없다는 말에 강제로 휴가를 만들었던 때도 그랬다.
량이 은근히 청신의 눈치를 보는 걸 목격한 도유는 청신을 붙들고 맹세를 받아 낼까 하다가 그만뒀다. 량은 청신이 무서워서라도 도유를 건드리지 않을 테고, 청신도 도유를 아끼고 생각해 주니 량이 먼저 건들지 않는 이상은 꾹 참을 것이다.
도유는 부디 그러길 바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인간이란 학습하는 존재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우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반성한다. 실수하면 만회하고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에 대한 인식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 가능하다는 걸 도유는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저 사람이 ‘그’ 서도유구나. 량 씨 말로는 이번엔 새로 들어온 신입한테 빌붙었다던데, 어쩌나. 빌붙은 신입이 다른 팀이라~.”
킥킥거리는 목소리에 도유는 고개를 돌렸다. 량은 아니다. 다만, 유량이 저 무리에 섞여 있었다. 도유는 유량을 중심으로 한 타 부서의 그의 추종 무리를 곁눈질했다.
정보부 제8팀 소속 1명, 결계부 제3팀 1명, 마법 지원부 제5팀 1명. 량까지 포함하면 총 4명이다. 그리고 절망적이게도 이번에 도유와 한 조가 된 팀원들이었다.
각 팀에 1명이라고 해도 조는 총 35개 조로 나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구성이 가능한 걸까. 청신은 도유와 완전히 거리가 있는 끝자락의 35조로 배정되었다. 그렇다. 도유는 1조였다.
‘어떻게 이렇게 한 조가 될 수가 있지? 액땜인가? 이게 액땜이 맞다면 다음은 운이 좋을 테니 로또를 사야 하나?’
잠시 그렇게 생각하던 도유는, 유독 의기양양한 표정의 정보부 제8팀의 강이환을 보고 깨달았다. 이번에 조를 배정한 교관이 저 강이환의 친척이었다.
뇌물을 받았거나, 부탁을 받았거나. 어느 쪽이든 밝혀지면 얄짤없이 징계 위원회에 소환될 텐데 용감했다.
“나라면 저러고 안 살아. 애초에 마법사도 아닌 주제에 왜 우리랑 같은 팀이야? 어우, 재수가 없으려니.”
“애초에 특수부 1팀이면 인생 조져서 온 거지. 막살아서 부럽다~ 그렇죠, 유량 씨?”
비웃음 가득한 악의적인 속삭임에도 도유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팀별로 하게 될 훈련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는 데 집중했다.
도유가 아티팩트를 챙기는 것을 본 마법 지원부 소속의 팀원이 ‘아티팩트 챙기는 것 봐, 불쌍하다.’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지만 도유는 화가 나기는커녕 한숨만 쉬었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 같은 팀원이 된 마법사들이 모두 이 훈련에 처음 참여하는 거였다. 도유는 후에 저들이 겪게 될 고난을, 그리고 그로 인해 제가 얼마나 고생할지 떠올리자 밀려오는 두통에 입술을 물었다.
아티팩트를 비롯한 도구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듯, 도구와 장비를 착용하는 도유를 비웃는다.
도유는 잠깐 언질을 해 줄까 하다가 곧 그만뒀다. 유량이 같이 있는 무리들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만하게 도유를 바라보고 있는 꼴을 보니, 말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게 뻔했다. 이럴 때는 몸소 깨우치는 게 나았다.
‘그나마 개인적으로도 평가한다고 했으니, 그거라도 낙제만 피하면 되겠지.’
팀 평가 점수에서는 가차 없이 낙제하겠지만 이 훈련에 참여할 때마다 팀 평가에선 매번 낙제했으니 그냥 이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마법사는 정말 불쌍하네요.”
등 뒤로 여전히 쏟아지는 비웃음을 무시하며 도유는 마저 도구를 챙겼다.
*
훈련소에서의 첫 일주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아니, 조용히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조별 단위로 하는 훈련이 아니라 개인의 체력에 기인하는 훈련에 맞춰 진행됐기에 도유에게 시비를 걸 만한 녀석들은 모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사이, 도유는 훈련소 내부를 꼼꼼히 돌아다니며 감시를 피해서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했다.
훈련소에 한 번 들어오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다.
누군가가 과거에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현실이라는 건, 이제는 잘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이 거대한 외계인 우주선 같은 건물은 한 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다.
물론 사유를 제출하고 외출하는 건 당연히 가능했지만 특수부 제1팀인 도유에게는 상부를 납득시킬 만한 사유가 없었기에 그건 최후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유는 조금이나마 이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점심으로 챙겨 온 샌드위치를 씹어 삼켰다. 입 안에 씹히는 야채와 햄, 아보카도 등의 식감. 눈살을 찌푸리며 샌드위치를 내려놨다.
‘맛없다.’
지금이라도 식당으로 가면 뷔페식의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걸 알았지만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놓친 것이 없는지 다시 사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CCTV에 찍히지 않으며 출입 허가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숨겨진 출입구를 우연히 보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