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75)화 (75/159)

#75

“어머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범법자가 아카데미 내에 있었다면 제가 먼저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아카데미에서 능력이 되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괜한 고생 하는 걸 원치 않거든요.”

청신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란 단어에 송유원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청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알았다. 그런 아들이 처음으로 ‘사랑’을 입에 담았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그럼, 고려해 보마.”

“고마워요. 그럼 저 이것들 좀 챙겨 갈게요.”

청신은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청신이 이곳에서 직접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 전부 들고 가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덕분에 양손 가득 챙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 그럼 좋은 밤 되세요.”

“청신아.”

협회장실을 나가기 직전. 송유원이 청신을 불렀다. 살짝 달라진 어조에 청신은 곧바로 멈춰 서고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경애를 고스란히 담은 눈빛. 그러나 송유원은 저것이 잘 꾸며진 가면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아직도 그를 원망하니?”

“음.”

청신은 빙긋 웃었다. 이 방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아들이 보이는 진심 어린 미소에 송유원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가면으로 가려진 탓에 청신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가 말했다.

“제 대답은 이전과 같아요.”

우악스럽게 어린 청신을 붙잡던 대중 없던 힘.

어린 청신의 앞에 무릎 꿇은 사람들을 바로 곁에서 내려다보며 ‘네가 희망이란다’ 하고 속삭이던 뱀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청신은 대답할 수 있었다.

“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아요. 아버지 덕분에 도유 형을 만났는걸요.”

‘도유’를 입에 담는 순간, 청신의 입가에 떠오른 진득한 미소와 녹색 눈에 떠오른 광채가 보였다. 이 짧은 사이 도유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미인의 뺨이 살짝 붉었다.

송유원은 그런 청신의 눈빛이, 그가 2살 때 흉성(凶星)을 섬기는 사이비 교단으로 청신을 납치했던 제 아비와 닮았다고 일순 생각했으나 곧 제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송유원의 손으로 직접 사살했던 남편의 눈빛엔 생기가 없었으나, 청신의 눈은 지금 이 순간 유리 파편에 비친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기에 그녀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그럼 가 볼게요, 어머니.”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청신은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방을 나갔다.

*

“이곳에 신원 정보 기재 부탁드립니다.”

도유는 무뚝뚝한 사건 보관 자료실의 접수 직원의 말에 따라 서류를 작성했다.

소속 부서와 이름, 사원 번호와 나이, 어떤 정보를 열람할 것인지에 대해 기재를 마친 뒤 제출하자 접수 직원은 눈으로 한 번만 훑은 뒤 도유에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제7 자료실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몇 번 와 봤던 곳이긴 했지만 임무가 아닌 개인적인 용무로 이곳을 방문한 건 처음인 터라 자연히 몸이 긴장되었다.

제7 자료실로 향하는 도중 마주친 몇몇 다른 부서의 제복을 입은 이들이 특수부의 제복을 입은 도유를 보고 멈칫했다.

도유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앞만 응시하며 걸었다. 이럴 때 시선이 마주쳤다가 귀찮아지는 경우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으니까.

띡.

목적지에 도착해서 카드를 가져다 대자, 제7 자료실이라 적힌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보부의 제복을 입은 여성이다. 그녀는 손에 든 태블릿과 도유를 번갈아 보더니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특수부 제1팀 서도유 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열람 신청하신 사건 자료는 이쪽 방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를 받아 안쪽에 있던 방으로 들어가니, 디지털 자료는 벌써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 떠올라 있었다.

[사건 번호 제742321 - 적성(赤星)교 집단 자살 사건]

[사건 개요], [현장], [사건 처리], [피해자], [생존자], [담당자 및 관련 부서 보고서]

도유는 화면에 떠오른 사건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이비 종교 중 하나인 ‘적성교’에서 여러 신자들이 함께 집단 자살한 사건은 한때 세간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저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과 연예인이나 기업이 예상보다 많았기에 더욱 화제가 되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서도유에게는 3개월 동안의 기억이 모조리 증발한, 암흑으로 점철된 시간이 존재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12살의 서도유가 유일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암흑으로 가려진 시간.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품에 큰 종이 상자를 안은 정보부의 여성이 들어왔다. 얼결에 도유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절한 뒤 테이블 위에 안정적으로 내려놓고는 말했다.

“관련 문서 자료는 이쪽에 내려놓겠습니다. 모니터는 이 리모컨으로 조작하시면 됩니다. 정보 열람 후 이곳에 그대로 두시고 떠나기 전에 제게 한 번 언질만 해 주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다시 혼자 남게 된 도유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자료를 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리모콘을 조작해서 생존자 탭을 눌렀다.

[생존자 : 1명

이름 : 서도유 / 나이 : 12세 / 성별 : 남

거주지 : 남동 고아원

특이사항 : 단기 기억 상실증. 2월 3일 고아원에서 실종 신고를 한 것을 확인. 적성교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 정신적인 충격으로 적성교에 납치당한 뒤의 기억이 없음. 발견 당시 심각한 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음.

(상세보기)]

환자복을 입은 도유의 사진과 고아원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화면 하단에 나열된다. 도유는 다시금 글을 훑었다.

이렇게 기록으로 된 것을 읽으니 남에 대한 정보를 읽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만큼 생소했다.

도유가 기억하는 당시의 기억은, 읽고 싶었던 새 도감을 빌리러 가던 중에 자고 일어났더니 병원이었다는 식이 다였다. 긴 실을 잘라 중간 부분을 태워 버리고 다시 매듭을 지어 이은 것과 같았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당황했던 기분이 지금도 기억났다.

카단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린 도유가 겁먹지 않게 얼굴이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으며 적성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도유는 정말 하나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자기가 도서관이 아니라 새까맣게 불타 버린 시신들 사이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길 듣고 꿈처럼 느꼈던 기분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섬에서 정령이 청신을 보며 했던 말의 의미를.

자만하는 건 아니었지만 도유는 스스로가 기억력이 좋다는 걸 잘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동안 자신이 몇 년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적어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령이 말한 것에 관해서는 전혀 짐작되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도유는 그동안 남의 일처럼 느꼈기에 알아보지 않았던 적성교에 대한 정보를 찾으러 왔다.

아니, 정령의 말만 있었다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3개월간의 시간을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유에게 이 사건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준 건, 예전에 청신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도유 형은 내게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난 형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형이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랑 똑같은 일을 겪게 하란 거예요. 내가,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데. 내가….’

울지도 못하고 고통에 가까운 슬픔에 함몰되어 애처롭게 말하던 청신의 목소리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도유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단순히 이 녀석이 감정이 격해져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청신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그를 괴롭게 만든 사람을 떠올리고서, 도유의 ‘잊으라’는 말에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난 형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만약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도유였다면? 12살의 도유는 어렸던 청신과 이미 만났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의심에 도유는 오늘 이곳에 왔다.

도유는 리모컨을 조작하여 디지털 자료와 현장 사진 등 도움이 될 만한 여러 내용, 그리고 당시 작전 지휘를 맡았던 송유원과 성희유, 그리고 지금은 모두 죽은 특수부 제1팀원들이 올린 보고서를 소상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자료들을 아무리 봐도 역시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심지어 청신으로 추정되는 이의 정보도 없었다.

그렇게 디지털 자료를 비롯한 실물로 된 종이 서류들까지 모두 훑은 뒤, 도유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자료만 보고는 떠오르는 게 전혀 없어. 역시 현장에 가서 직접 봐야겠다.’

그동안 사건 사고 현장을 헤치며 쌓아 온 경험이 도유에게 말하고 있었다.

직접 현장을 살펴보면 뭔가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정령이 다시 뭔가 말할지도 모르지.’

솔직히 후자에 기대를 걸고 있기에 도유는 열람을 끝낸 자료들을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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