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72)화 (72/159)

#72

무미아 사건 때, 조용환의 몸을 삼켰던 그 힘과 동일해 보였다. 도유는 그때 청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 봤다.

부정적인 에너지. 사기라고도 부르고, 액이라고도 부르는 ‘절망과 증오, 슬픔 따위’의 부정적인 에너지라고 했던 청신의 목소리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흐름이 마치 상자를 보호하듯이 휘돌고 있는 걸까.

“사람들이 본 기이한 현상은 이것 때문이겠죠.”

도유는 상자에서 시선을 떼고 청신을 보았다. 청신은 생각에 함몰된 듯 보였다. 그는 어딘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청신아-!”

아무렇지도 않게 상자에 손을 뻗는 청신의 모습에 도유가 기겁하며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청신의 손이 상자에 닿았다. 그 순간 도유는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청신의 손이 상자에 닿자마자, 상자를 휘돌던 새까만 힘이 청신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아니, 상자 주변의 힘뿐만이 아니다. 마치 뭔가 뽑혀 나가듯 상자의 안에 있던 동일한 색의 힘이 청신의 손에 쑥 빨려 들어간 것이다. 도유가 보기에는 그랬다.

“괜, 괜찮아?”

“네.”

청신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는 듯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도유는 가늠하듯 그를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곧바로 멈춰 서는 수밖에 없었다.

“아읏, 윽…!”

일순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끔찍한 두통과 함께 도유는 땅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아니, 진동하는 건 도유의 심장이었다. 눈이 시큰거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한 냉기가 심장을 휘감는 감각. 그리고 산화하듯 시야에 비치는 요동치는 마력의 흐름과 제 발치에서 퍼져 나가는 강렬한 빛. 도유는 이 감각을 알았다.

“왜…!”

황망한 목소리로 도유가 소리쳤다. 청신이 도유를 불렀으나 도유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머릿속에, 뇌를 휘젓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청신의 목소리를 지워 냈다.

[어째서 함께 있는 것이냐.]

[저건 너를 ■■려고 했던 어린 ■■■ ■■■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를 밝히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은 것과 동시에 도유는 제멋대로 제 주변에 모여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보았다.

본래대로라면 의지를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오로지 하나의 의지를 품는다. 점점 도유 주변의 기온이 한겨울처럼 냉각되기 시작한다. 그것을 피부로 느끼며 도유는 알아차렸다.

자신과 계약을 맺은 존재가 지금 청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아무것도 모른 채 제게 손을 뻗어오는 청신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거절당했다는 것에 대해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뜨는 청신의 모습이 두통과 머릿속에 웅웅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도유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 왔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청신이 죽는다.

도유는 목석처럼 굳어 있는 청신으로부터 더욱 거리를 벌리며 손을 내려 허리춤을 더듬었다.

이 틈에도 귓가에는 오로지 도유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응결되는 소리.

청신을 단단하게 얼리고, 육신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 도유와 계약한 존재가 멋대로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허리춤을 더듬던 떨리는 손이 드디어 목적으로 하던 것을 손에 잡았다.

“도유 형-.”

도유는 손에 잡은, 범죄자 제압하기 위한 약물이 든 주사기를 제 목에 꽂아 넣었다.

‘빌어먹을, 아파 죽겠네.’

두통과 별개로 주사기 바늘이 목에 박히면서 느껴지는 고통과, 안에 있는 약물이 흘러들어 체내에 빠르게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청신의 손이 도유의 몸을 잡았다. 동시에 청신을 죽이기 위해 형태를 이루던 것들이 파훼되고, 머릿속에서 계속 웅웅거리던 저와 계약한 존재의 목소리가 청신의 목소리와 함께 흐릿해져 가는 걸 본 도유가 안도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이윽고 도유의 푸른 눈이 명멸하며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청신은 제 품에 힘없이 늘어지는 도유의 몸을 얼결에 끌어안으며, 정신을 잃은 도유의 얼굴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유 형?”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도유에게는 각인된 것처럼 새겨진 기억이 존재했다. 드높은 하늘,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의 색으로 가득한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 자리 잡은 형체 없는 존재. 그것은 도유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도유를 선택했다.

스스로의 의지가 없었으나 다른 의지들을 모아 만들어진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보다 신성했고 정순했으며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것은 도유를 선택한 이후에 도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인간을 알며, 스스로의 자아를 만들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한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도유는 같은 인간들로부터 버림받았다.

그것, 즉 도유가 ‘정령’이라고 정의한 그 존재가 도유의 눈을 통해 인간들을 볼 때면, 인간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인간들은 무의식중에 안 것이다.

가장 신성하고 정순한 존재는 자신과 반대되는 속성을 태생적으로 경멸하며 멸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정령과 도유가 사는 세계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기에 도유가 힘을 빌려주지 않으면 현실에 아무런 이상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정령이 도유의 몸을 일시적으로 지배하고, 처음으로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 의지를 밝힌 것이다.

도유가 그 사실에 소름 끼쳐 할 틈은 없었다. 정령이 강제로 도유의 몸을 지배했던 후유증이 너무 컸다.

도유는 의식이 떠오르기도 전에 전신을 두드려 맞은 듯한 통증을 느끼고 얕게 신음을 흘렸다. 숨을 쉬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조차 몸속을 난도질하는 고통이다.

‘죽고 싶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도유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이전에 천화 마을에서 언데드들의 발을 묶기 위해 정령의 힘을 빌려 썼을 때도 아프긴 했지만, 지금의 고통에 비할 바가 전혀 되지 못했다.

“깼어요?”

어둠 위로 성희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도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또다시 흐느끼듯 신음을 흘렸다.

“혹시나 해서 안대 씌워 놨는데, 몸은 어때요?”

도리도리. 말할 힘이 없어 도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겨우 보일락 말락 한 행위였으나 고통이 밀려왔다.

그래도 목 아래로 소리를 내려고 하자마자 느꼈던 통증보단 나았다. 빌어먹을. 도유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청신이 다칠까 봐 급하게 찔러 넣었던 주사기를 잘못 조준했나 보다. 실력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며 도유는 눈을 덮은 안대 아래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강 청신 씨에게 들었는데…. 음. 도유 씨는 지금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나중에 이야기해 줬으면 해요.”

성희유의 어조는 평이했다. 하지만 도유는 그의 어조에 미묘하게 숨은 동정심을 읽었다. 왜 동정하는 걸까. 성희유가 저런 어조로 말하니 괜스레 불안해졌다.

“다만 어떤 이유로든, 청신 씨 앞에서 자해를 하는 건 그리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봐요.”

자해가 아닌데.

대답이 목 아래까지 차올랐지만 내뱉기엔 너무나 고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청신의 입장에서는 멀쩡히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자해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유의 눈이 이상한 것이고 청신의 눈은 보통 사람들과 똑같으니까.

“그러니 잘 생각하고, 잘 말하고, 잘 풀어 봐요. 제가 그 섬까지 직접 가거나, 치유 인력을 보내기에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도와줄 수가 없으니까.”

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여 되물었다. 숨소리에 가까운 가냘픈 목소리만 나왔을 뿐이라 닿지도 못했는지 이후 성희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도유는 성희유의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했던 말을 곱씹어 보고 그제야 의문을 품었다. 여기가 어딜까? 성희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본사에 있고 도유는 아직 섬에 있는 상태다. 그렇다는 것은….

“도유 형.”

고요를 깨는 청신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도유는 속으로 낭패했다. 눈을 가린 안대와 전신이 으깨진 것처럼 아파 오는 까닭에 기척을 더듬어 볼 생각조차 못 했다. 자신은 아직 섬 안에, 그것도 방에 청신과 단둘이 있는 것이다.

청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만 겨우 틀었다. 일단 청신의 입장에서 그때의 도유의 행동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이미 성희유가 말해 줬기에 충분히 이해하고 반성하고 있었다.

사과. 무조건 미안하다고 빌어야 한다.

딱히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청신에게 설명도 하지 않고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행위를 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기에 도유는 납작 엎드릴 준비를 했다.

“약 어딨어요.”

청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안대 아래로 눈을 깜빡이며 도유는 생각했다. 무슨 약을 말하는 걸까.

목을 찌를 때 사용한 약인지 그 해독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만 후자는 이미 도유가 정신을 차렸으니 필요하지 않았기에 전자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강제로 재워 버리겠다는 뜻이 느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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