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70)화 (70/159)

#70

최대한 줄이고 줄인 말이었지만 알아듣기에는 어렵지 않으리라. 청신은 제 입을 가린 손을 내리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뿐이었다.

“저는 멈출 수 있어요. 도유 형 건강이 제 욕망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청신이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형이 식사 따윈 됐다면서 더 매달리게 될 테니까 그 전에 든든하게 먹여야죠.”

“…….”

“많이 배고프실 때는 식사 말고 다른 걸 먹여 드리면 되겠고.”

귀에 달짝지근하게 달라붙는 미성이 속삭이는 음담패설에 도유는 저가 괜한 걸 물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못 믿는 것 같은데, 식사 후에 증명해도 될까요?”

“됐다.”

“혀엉.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청신이 엉겨 붙으려는 걸 도유는 단호하게 밀어 냈다. 진짠데, 하면서 미인계를 사용하려는 청신에게 애써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도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저 형이 엉엉 울면서 매달릴 정도로 잘할 수 있어요. 응?”

도유는 목 아래로 치밀어 오른 말을 꾹 삼켰다.

알고 있다고. 도유가 먼저 키스를 했던 그날, 청신은 흥분한 도유를 달래 준다며 이미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키스만으로도 쾌락에 몸에서 힘이 풀리는데 그 손길은 더했다.

키스 실력과 손길만 해도 그런데, 본격적으로 몸을 섞으면 대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숨이 떨려 왔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날의 열락을 떠올리자 좀 전의 키스로 움텄던 열기가 다시금 불을 지피려는 게 느껴지기에 도유는 애써 생각을 끊어 냈다.

*

목적지로 한 섬에 도착한 건 반나절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그 반나절 동안 청신은 죽다 살아났다. 언어 그대로의 의미다.

도유는 걱정을 숨기지 못한 채 제게 힘없이 기댄 청신을 보았다.

요트가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게 돌아다니면서 수작질을 할 줄 알았던 미인은 아티팩트까지 설치한 덕분에 거의 흔들림이 없는 배에서 혼자만 멀미를 하는 기적을 보여 줬다.

그렇기에 도유는 내내 청신의 곁에 착 달라붙어 청신의 요구에 따라 그를 만져 주고, 물을 먹여 주기도 하며 보살펴 줬다.

“업어 줘?”

“괜찮아요.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가느다란 숨. 희게 질린 얼굴. 파르르 떨리는 마른 입술과 젖은 녹색 눈이 안타까울 정도로 약해 보이다가도, 식은땀으로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절묘한 각도로 달라붙어 선정적으로 보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답답한지 목 아래까지 채우고 있던 단추를 풀어 목선과 쇄골 아래까지 전부 드러낸 터라 그 효과가 더욱 강렬했다.

도유는 결국 청신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사이, 승무원들이 배에서 꺼내 온 청신과 도유의 짐을 목적지까지 들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듣자 하니 섬 안에 있는 별장에 따로 상주하는 인원이 있어서 의식주를 모두 제공한다고 했기에 별걱정은 없었지만, 돌아갈 때 또 배를 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괜스레 청신이 불쌍해졌다.

“청신아. 너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

배 안에서 멀미 때문에 도유를 끌어안은 채 반쯤 늘어져 있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안색이 나쁘지는 않았다.

배에서 내렸으니 좋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청신의 안색은 더 나빠졌고, 이쯤 되니 도유는 그가 멀미가 아닌 다른 이유로 아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마에 손을 올렸다. 서늘할 정도로 차갑다.

“잠시만요.”

도유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댄 청신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섬을 둘러싼 녹음보다 더 선명하고 푸르른 녹색이 눈꺼풀 아래 잠기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도유는 내색하지 않았다.

“…!”

그러다 돌연, 도유는 청신의 주변에 넘실거리는 마력의 흐름을 보았다. 그것들은 빠르게 허공으로 안개처럼 산개하며 사라졌다. 갑자기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아무런 이상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이제 가요. 형.”

“괜찮… 아 보이네.”

“네. 이제 멀쩡해요.”

언제 아팠냐는 듯,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있다.

힘없이 축 늘어지듯 기대어 있던 몸에도 힘이 돌아와 손을 냉큼 맞잡아 왔다. 도유는 청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봤다.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아 보여서 놀라웠다.

“방금 치유 마법 쓴 거야?”

“음, 그건 아닌데 비슷해요. 그보다 형,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왜일까.

청신은 어째서인지 조금 화가 난 듯 보였다.

의아했지만 길게 생각하진 않았다. 도유는 보기 좋게 길을 만들어 놓은 섬 안쪽으로 들어가며 내심 청신이 말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끝끝내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

별장에 도착한 뒤에도 혹시나 청신의 상태가 다시 나빠질까 걱정했던 도유는, 씻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거의 헐벗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가운 차림으로 저를 맞이한 청신의 모습에 제가 괜한 걱정을 했음을 깨달았다.

욕실에 들어간 사이에 옆방에 있어야 할 청신이 방 안으로 들어온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청신이 보란 듯이 기척을 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이청신, 옷 입어.”

“이리 와요, 형.”

그렇게 말하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와인을 딴다. 딱 봐도 밤을 같이 보내려는 수작질인 게 훤히 보였다.

도유는 골치가 아파 오는 걸 느끼며 젖은 연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런 도유의 모습을 마치 미식가와 같은 세심하고도 예리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청신이 입술을 핥았다.

당장 덮치고 싶다는 뜻을 다분히 담은 형형한 시선을 무시한 도유는 일단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사이, 활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신아.”

“네, 도유 형.”

청신은 착실하게 대답하며 투명한 와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많이 해 본 솜씨다.

와인에 대한 조예가 전혀 없는 도유의 눈에는 저게 그냥 와인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청신은 이 와인 한 병이 도유의 월급을 가뿐히 뛰어넘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생색내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도유가 사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오래 지켜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자기가 받는 돈이 적지 않은 액수임에도, 도유는 자신이 버는 수익의 절반 이상을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동을 위해 기부하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생기는 여분의 돈조차 도유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사는 대신 다른 시설에 기부를 했다. 본인을 위해 쓰는 돈은 딱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것뿐이다.

궁색하게 사는 건 아니었다. 도유는 말끔하고 단정한, 그린 듯한 ‘올바른’ 삶의 표본이었다. 그런 도유의 모습은 청신에게 특수부의 삶이 서도유라는 개인의 균형을 무너트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발악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기에 청신은 더욱, 도유를 챙겨 주고 싶었다.

“네가 서류를 조작하면서까지 이렇게 좋은 곳에 데려와 준 건 진심으로 고마워. 그런데, 그런데 말야….”

최대한 청신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혹여나 그가 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까 봐 도유는 최대한 부드럽게 어르는 어조로 속내를 털어놨다.

20년 넘도록 카단에서 ‘임무’ 때문에 한 출장은 많았다. 7박보다 더 많이 임무지에서 대기하며 목표물을 처리한 적도 많았다.

그때는 매일매일이 팽팽하게 당겨진 실과 같았다. 언제 끊어질지 몰라서 두려움에 떨던 나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청신이 휘두른 권력의 지팡이 덕분에 ‘임무’라는 명분의 ‘휴가’를 얻게 된 20년 차가 넘은 직장인은 너무나 좌불안석이었다. 요트에서부터 계속 그랬다.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한 시간에 다섯 번 꼴로 떠오르고, 가만히 앉아 청신과 떠들고 있으면 ‘진짜 이래도 돼?’ 하는 생각이 1분 간격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유가 없었던 직장인은 처음으로 ‘임무’라는 명분으로 누리게 된 ‘자유’가 너무나 낯설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대놓고 놀기에는 내 양심이 너무 찔려.”

“음…….”

청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웃는 건지 기가 찬 건지 짐작도 되지 않는 미묘한 웃음을 짓더니 도유에게 와인 잔을 내밀었다. 안에 찰랑이는 붉은빛의 와인이 조명 탓에 유독 투명하게 보였다.

“안 마셔.”

“저도 어지간하면 강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도유 형이 불안해 보여서 드리는 거니까 한 모금만 마셔 볼래요?”

즉 알콜의 힘을 빌려서라도 일단 진정하라는 뜻이다. 도유는 그 말에 따랐다.

술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간 한두 번 마셔 봤던 와인들과는 달리 부드럽게 넘어가는 와인의 향이 풍부해서 제법 좋다. 그러나 더 마시는 대신 도유는 잔을 내려놓았다.

임무지이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즐기지 않는 태도. 딱 공과 사를 구분하는 철저하고 경계 어린 모습에, 청신은 아쉬워하면서도 더 권유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도유가 어느 정도 이 와인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만족했다.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잊지 않았다.

“어때요? 안주가 필요하면 말해 줘요.”

“좋네. 안주는 됐어.”

도유의 ‘좋다’나 ‘괜찮다’가 굉장히 맛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청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도유 형, 먼저 형이 말한 것 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요.”

“잘못된 부분?”

“네.”

도유는 제가 청신에게 바로 조금 전에 한 말을 곱씹어 봤다. 딱히 ‘잘못된’ 건 없는 듯했기에 말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청신이 와인 잔을 들며 대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