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분명 빌린 걸 텐데.’
아무리 청신이라도 저런 걸 빌렸다면 카단에서 과연 지불을 해 줄까? 송유원은 청신에게 약한 듯 권력의 지팡이를 휘두를 수 있게 해 주었지만 협회장이라 하더라도 협회 돈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부만 지급할 가능성이 높다. 도유는 매달 월급날이 되면 급여가 들어온 지 3시간 만에 텅텅 비고 마는 마법이 일어나는 자신의 통장 잔액과 저축액을 계산해 본 뒤 청신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도유는 제가 바보 같은 고민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도유의 심각한 표정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던 청신이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강아지 같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도유에게 말했다.
“비용 걱정이라면 말아요. 제 개인 소유라서요.”
“…….”
“저게 마음에 들면 선물해 드릴까요?”
“아니.”
부담스러운 데다 관리도 못 한다. 도유의 칼 같은 거절의 말에 어째서인지 청신은 수줍은 듯이 빙그레 웃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알고 싶지도 않지만 뺨까지 살며시 붉히며 수줍다 못해 기뻐 보이기까지 하는 반응이 이상해서 결국 묻고 말았다.
“왜 그렇게 웃어?”
“우리가 결혼하면 제 것이 도유 형 거잖아요. 도유 형은 그걸 알아서 거절한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랑, 도유 형이 나와 결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 기뻐서….”
“어서 타자. 기다리신다.”
승무원이 두 사람이 타기를 기다리며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기에 도유는 요트에 올랐다. 청신이 뒤따라오며 ‘수줍어하지 않아도 돼요, 도유 형’ 하고 헛소리를 했지만 무시했다.
마법사들이 일반인보다 상상력이 뛰어난 건 알았지만 청신은 유독 더한 것 같다. 거절의 말에 어떻게 결혼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와중에 청신이 결혼까지 서슴없이 입에 담을 정도로 둘이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슴이 설레는 기분에 몸에 열이 움텄다.
청신의 말대로 그와 결혼하게 되면 행복할 것 같긴 했다. 지금도 이렇게 도유의 행동 하나하나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보는 청신이다.
헤어진 뒤 몇 시간 만에 다시 봐도 보고 싶었다며 사랑스럽게 웃는 사람이 결혼까지 해서 같이 살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속이 다 간질거렸다.
“도유 형, 이쪽이에요.”
얌전히 뒤따라오던 청신이 도유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를 따라 걸으면서 도유는 생각했던 것보다 요트 안에 방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하나하나, 청신의 집이 그랬던 것처럼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알고 의문에 잠겼다.
마력의 흐름에 따른 구성식을 전부 상세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마법의 계열마다 그 흐름의 분포도가 조금씩 달라 알아보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 연구라도 해?”
“그럼 좋겠지만, 이 요트에 타는 승무원과 요리사들은 전부 일반인이라서요.”
일반인이 있는 곳에서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마법사의 윤리에 어긋난다.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걸리기만 하면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을 악용하는 일반인들도 과거에 몇몇 있어서, 마법사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 보험사도 있을 정도였다.
“이 배에서는 주로 사냥을 해서 걸어 둔 것뿐이에요.”
“사냥?”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도유가 흠칫하며 되물었다.
머릿속에서는 청신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배 안을 배경으로 한 공포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도유의 안색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 가자 청신이 웃음을 터트리며 도유를 꼭 끌어안고 얼굴에 입을 맞추려고 달려들었다. 예상했던 바였기에 도유는 미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아 밀어 내며 재촉했다.
“사냥이라니? 무슨 사냥? 서, 설마 사람을…?”
“도유 형은 제가 그렇게 사이코패스로 보이세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청신의 표정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감각을 느낀 도유가 크게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닌데, 방에 결계 마법까지 걸면서 사냥을 한다는 건 이상하잖아.”
“어떻게 형은 겁먹은 모습도 이렇게 예뻐요?”
“이청신, 대답해.”
“궁금하면 열어 봐요, 형. 저는 형 좀 맛봐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도유가 밀어 내든 말든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마와 인중, 눈썹, 눈가, 콧등, 뺨 등. 쪽쪽거리며 입을 맞춰 오는데 대체 어떻게 보란 말인가.
이윽고 입술 위에 포개지는 체온에 결국 분위기에 휘말린 도유가 입을 열자 청신이 작게 웃으면서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숨결 하나하나 아쉽다는 듯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혀를 얽어 오는 탓에 도유가 점점 열에 들뜰 때쯤, 청신이 떨어졌다.
와중에 침으로 번들거리는 도유의 입술이 사탕처럼 보였는지 사탕을 핥는 것처럼 핥고 살짝 물었다 빨기를 반복했다.
“이제 됐지? 떨어져.”
“진도 더 빼도 돼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몸을 더욱 붙여 오자 도유는 단호하게 청신을 밀어 냈다.
아직 방에도 안 들어갔는데 타자마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다시금 달라붙으려는 청신을 무시하고 도유는 수상한 방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도유는 청신이 말한 사냥이 뭔지 알게 됐다. 생각보다 넓은 사방이 막힌 방 안에 허공을 유영하듯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그란 빛 덩어리들이 보였다.
육안으로 겨우 쫓을 수 있을 정도의 속도다. 문 근처에는 총 형태를 한 특별 아티팩트가 놓여있었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도유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사냥이야?”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사냥이라고 하길래요.”
“…….”
이 방이 마법사든 일반인이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굉장히 비싼 마법 게임을 위해 꾸며진 방이라는 걸 깨달은 도유는 어이가 없었다.
허공에 날아다니는 저 빛 공 같은 게 하나에 천만 원이 넘는다. 그런 공이 수십 개다. 저걸 쏴서 맞추는 내기를 하는 형식인 걸 들어선 알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요트는 방이 10개밖에 없거든요. 원래는 손님용으로 꾸며 놨었는데, 우리는 방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객실로 쓰던 건 전부 형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싹 리모델링했어요. 여기 말고도 서재도 하나 만들어 놨고, 운동할 수 있게 꾸며 놓은 곳도 있고, 아. 위에 해먹이랑 수영장도 있으니까 거기서 쉴래요? 마침 햇볕도 좋으니까.”
오랫동안 서민으로만 살아온 도유는 청신의 말에 그저 기함할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신은 가만히 서 있는 도유의 몸을 노골적으로 만지작거리면서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작게 숨을 불어넣는 청신에 도유가 움찔하며 그를 보자, 청신이 흥분으로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기서 색다른 걸 해 보는 건 어때요?”
도유는 청신의 멱살을 잡고 내던지지 않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 맞아. 도유 형 밥부터 먹여야겠어요. 한 번씩만 돌아보고 바로 위로 올라가죠.”
자신의 욕망보다 도유의 한 끼에 더 집착하는 청신은 망설임 없이 도유를 놓아주었다. 아주 빠른 반응에 도유는 무심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청신의 말대로 곧 있으면 평소 둘이서 함께 점심을 먹던 시간이 된다.
청신이 스스로 물러난 것이 도유의 입장에서는 참 다행이었지만,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만약.
둘의 관계가 이보다 더 발전해서 정말 몸까지 섞는 사이가 된다면. 관계를 가지는 도중에 식사 시간이 되면 청신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요즘 들어 도유의 끼니에 굉장히 신경 쓰는 청신이다.
주말에도 만나지 않을 때는 먼저 연락을 해서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항상 ‘식사했어요?’ 하고 묻는 청신이기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수작질을 하다가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니 저렇게 칼같이 끊어 내는데, 할 때는 어떨까.
한번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굉장히 궁금해졌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청신과 나란히 걸으며 도유는 그를 흘끔거렸다.
“도유 형, 계속 그런 식으로 예쁘게 쳐다보면 굉장히 흥분돼서 그런데 할 말 있으면 해 주면 안 돼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상소리를 내뱉는 청신에 도유는 고개를 저었다.
직전의 키스로 청신이 아직 흥분한 상태라는 걸, 흥분했는데도 도유의 한 끼를 위해 인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더한 걸 하더라도 안 챙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 줘요. 응?”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녹색 눈이 유독 맑아 보인다. 간절함을 호소하듯 도유의 손을 맞잡은 청신이 손을 작게 흔든다.
말해 주지 않으면 몇 시간은 달라붙으며 계속 캐물을 것 같은 집념까지 보이는 눈빛이라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
“만약에 그, 우리가 그런 걸 하다가…. 왜?”
도유의 말에 청신이 빈손으로 입을 막는 걸 보고 도유가 미간을 좁혔다.
“아…. 형이 그런 말을 하니까 너무 흥분돼서요.”
“말 안 해.”
“죄송해요, 형. 입 다물게요.”
제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듯 제 입을 손바닥으로 딱 막아 버린다. 그 모습에 결국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하던 도중이라도 네가 내 밥 챙겨야 한다면서 바로 멈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그럴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던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