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상황을 이해한 도유는 몸에서 힘이 풀려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청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사형이나 특수부에 들어오는 것보다는 나았다. 제작부는 내근직밖에 없었다.
가끔씩 유지 보수를 이유로 외부 출장을 가긴 하지만 그 외에는 카단에서 위험도가 가장 낮은 부서다.
목숨이 위험해질 일은 특수부와는 비할 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고, 끔찍한 현장을 보거나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거나 하는 등의 감정적인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됐다.
부서 내의 서열 다툼 따위는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재판 중에 서현을 사형시키자는 의견을 냈던 이사회 임원에게 핏대를 세우며 말한 제작부 팀장을 보면 팀 내 괴롭힘을 허용할 것 같지도 않았다.
‘댁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머리만 굴리고 있으니 모르겠지! 이 답답한! 인간들! 이런 인재를 사형시킨다고? 잘 들어, 댁들 목숨 부지시키는 아티팩트가 뚝딱하면 나오는 줄 알아?! 어?! 재룟값은 또 얼마고! 마법을 새기는 과정도 얼마나 까다롭고 번거로운데! 나는 천재니까 실패를 안 하지만 카단이든 아니든 다른 곳에선 매번 이 과정에서 재료 날려 먹고 우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야! 근데 얘는! 봐! 그냥 종이랑 펜만 있어도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아티팩트가 짠! 하고 만들어진다고! 뭐, 마력이 딸려서 효력이 약해? 어으으으!! 자연의 마력을 흡수하는 거면 한 공간에 자연계의 마력을 방사해 놓고 밀도를 최대한 높인 후에 그리면 되잖아악! 아, 혈압! 혈압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던 제작부 팀장은 그렇게 말하더니 정말 목뒤를 잡고 쓰러졌다.
대기하고 있던 치료부의 치유 마법사가 급하게 그를 치료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숨이 넘어갔으리라.
그렇게 되살아난 제작부 팀장은 임원들이나 그간 재판에서 서현의 사형을 주장한 이들에게 매년 제작부에서 소요되는 돈과 쥐꼬리만 한 예산으로 최상의 것을 만들어 내는 자신들의 노력을 설파했다.
애매하게만 알았던 예산이며 아티팩트를 만드는 비용의 액수가 명확하게 나오고, 거기서 서현을 잘 키워서 제작부에 넣을 경우 예상되는 이익을 말하니 임원진 대부분이 서현을 제작부에 넣자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는 이도 있었다.
그에 제작부의 팀장은 임원을 설득하는 대신 송유원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파업 선언합니다. 다른 부서엔 좋은 인재 낚아다 주면서 우리 부서만 핍박하고 이렇게 좋은 인재를 주기는커녕 사형시키는 카단에 실망했습니다. 일할 의욕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건방지다고요? 자르십쇼, 그럼. 잘라 보쇼.’
제작부의 팀장은 그렇게 승리를 얻어 냈다. 미래의 노예를 얻은 제작부 팀장은 굉장히 때깔이 좋아진 얼굴로 당당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재판은 어영부영 끝나고 말았다.
“이제 안심이 되죠?”
“안심이 되긴 한데…. 좀 이상하네. 어쩐지 임원 대부분이 제작부 팀장님한테 꼼짝 못 하는 것 같은데 뭔가 이유가 있는 거야?”
도유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청신의 손이 도유의 목덜미로 내려왔다. 그는 피아노를 치듯 도유의 목덜미부터 등, 허리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네. 현 제작부 팀장은 인맥이 좋기로 유명한 전대 협회장이 가장 아끼는 조카거든요. 전대 협회장이 명예 회장으로 있는 이상 싫어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죠.”
“…….”
빌어먹을 혈연 사회.
도유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번에는 그것이 호재로 작용했다는 걸 자각하고 잠시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여 청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바로 도망갈 줄 알았던 도유가 얌전히 제 몸 위에 길게 늘어져 있는 걸 본 청신이 기쁨보다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유 형, 어디 아파요?”
“재판 보는 내내 긴장해서…. 잠깐 이러고 있자.”
“저야 좋죠.”
청신이 웃으니 그의 탄탄한 상체가 울리는 게 전부 느껴졌다.
그마저도 편했다. 도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청신이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리는 소리마저도 좋아서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내가 정말 피곤하긴 했구나.’
긴장이 풀리니 피로가 몰려오며 눈꺼풀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슬슬 잠들려던 순간이었다.
“도유 형, 자요?”
무시하기에는 굉장히 신경 쓰이는, 미묘하게 기대감 어린 목소리에 도유는 망설이며 물었다.
“…혹시 내가 잠들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잠든 연인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침대에 눕혀 줘야죠.”
상식적인 대답에 안도한 도유가 잔다고 대답하려던 때 청신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다음엔…. 음. 잠들면 만지기만 할게요.”
“나 안 자.”
보란 듯이 도유가 눈을 번쩍 뜨자 청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쉬워라. 어쩔 수 없네요. 편히 기대 있어요. 괜찮아요.”
청신의 손이 도유의 등을 토닥였다. 자장가를 불러 주는 부모처럼 일정 간격으로 토닥여 주는 손길에 정말 이 녀석이 저를 재우려고 하는 건가 의심이 든 도유는 미심쩍은 눈으로 청신을 보았다.
불순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미인의 사랑스럽고 밝은 미소가 도유를 맞이한다.
“도유 형. 오늘부터 아카데미도 방학인데 우리 어디 놀러 갈까요?”
“놀러 가긴 어딜 놀러 가. 본부로 출근해야지.”
본부로 출근해서 아카데미에서 범법자를 찾는 임무를 되짚어 보고, 얼마 전에 세웠던 가설 - 소원 나무에 대한 것 - 도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 중간에 다른 임무가 들어올 것이 분명하니 쉴 틈이 있을 리가 없다.
“카단에도 휴가는 있는데요?”
청신의 순수한 질문에 도유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청신이라 하더라도 특수부 제1팀이 왜 1팀인지 모르는 듯했다.
“우리 팀은 휴가 없어. 연차도 없고, 반차도 없고, 보너스도 위험 수당도 없고 휴가비도 없어. 그냥 있는 게 없어. 노동법 적용이 안 되는 부서라. 그냥 인권이 없다고 보면 돼.”
타인의 생명을 앗아간 자들만 모이는 특수부 제1팀은 그냥 노예다.
본부에서 삼시 세끼 제공해 주는 식사가 도유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복지일 정도로, 제1팀에겐 복지가 없었다.
“없다고요….”
청신이 나른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도유는 이 녀석이 협회장의 유일무이한 아들이라는 걸 떠올리고 흠칫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청신아. 괜한 짓 하지 마. 알았지?”
“…네에.”
대답이 조금 늦고, 어쩐지 평소보다 살짝 길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일단 대답했으니 청신은 도유의 말을 어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말로 어기지 않았다.
정정한다. 어기지만 않았다.
“저, 팀장님. 이번 임무는….”
다음 날 카단에 청신과 함께 출근한 도유는 출근하자마자 임무를 내린 성희유와, 제 손에 든 임무 내용과 곁에 서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청신을 번갈아 본 뒤 최종적으로 성희유를 보며 물었다.
“한 재력가가 소유한 개인 섬에 ‘갑자기 수상한 현상’이 나타났으니 7박 8일 동안 ‘현장 조사’를 하되, 보고서는 ‘작성하지 않아도’ 되고, 의식주에 필요한 비용은 ‘금액 제한 없이’ 모두 지급해 주는 것… 으로 이해했는데 맞습니까?”
“네, 맞아요. 제대로 이해하셨어요, 도유 씨.”
“팀장님, 이 임무 혹시….”
도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짓으로 청신을 가리켰다. 매번 도유에게 임무를 줄 때 평온한 표정이거나 웃는 얼굴이었던 성희유는 이번만큼은 좀 질린다는 눈으로 청신을 보며 대답했다.
“뭘 생각하든, 이번만큼은 도유 씨는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도유는 허탈하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혈연 사회.
*
도유는 벌어지는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성희유에게서 받은 자료를 통해 현장의 정보는 받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가는지에 대한 자잘한 정보는 ‘자율’이라는 단어 아래 파묻혔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요, 도유 형.”
청신의 목소리에 도유가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었다.
“청신아….”
“네, 형.”
“우리 그냥 일반적인 배로 가는 거 아니었어?”
“저것도 배잖아요?”
무엇이 문제냐는 듯 청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한다.
바닷바람에 유독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미인의 입가에 옅게 걸린 웃음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유독 눈부시게 보였다.
어떤 명화를 봐도 지금 이 순간 제 눈에 보이는 청신보다 아름답지 못하리라. 잠시 동안 청신의 얼굴에 넋이 나갔던 도유는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두 사람의 짐을 옮기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아무리 이런 면에서 무지하다지만 저건 보면 알겠어. 저거 개인 요트 아니야?”
“네, 맞아요.”
담백한 긍정이 돌아왔다. 도유는 입을 떡 벌렸다. 청신이 눈을 깜빡이더니 빙긋 웃으며 제 턱을 감싸 쥐고 키스를 하려는 걸 한 손을 들어 막고는 요트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개인 거고, 비싸 보인다.
부자들만 가지는 고상한 취미에 도유는 관심조차 없었지만 몇 번 임원들의 개인 임무를 수행한 덕분에 저 정도 크기의 요트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저만한 크기는 제 평생에 벌어도 손에 넣지 못할 금액이란 것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