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분명히 처음에는 죽이고 싶었어. 모든 원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도유는 손을 들어 올려 제 손바닥을 보았다. 비어 있는 손 위에 환상처럼 제 어린 날의 손바닥이 겹쳐졌다. 작은 손바닥 위에 놓인 반듯한 종이. 그 종이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
“범법자는 어째서 내게 그 마법을 줬을까.”
주먹을 쥐자 환상이 무너져 내렸다.
“범법자의 마법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건 잘못된 일이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면, 그자는 어째서 나에게, 사람들에게 마법을 주는 거지?”
그의 마법으로 인해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부분 투입됐던 도유였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졌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걸 알기 전까지는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저는.”
주먹을 쥔 손 위로 청신의 손이 겹쳐졌다.
“도유 형이 범법자를 찾고, 그 이유를 알고, 선택을 할 때까지 곁에 있을게요.”
“…….”
도유는 잠깐, 아주 잠깐 동안 ‘지금 내가 범법자를 평생 찾지 못할 거라는 뜻인가?’ 하고 고민했다.
도유에게 사랑한다면서 평생 함께 있을 것처럼 말하고 다녔던 청신이 이리 말하니 정말 평생 범법자를 찾아내지 못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니지. 도유는 생각했다.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당장 제 앞에 있는 청신을 보고 있으니, 난생처음 느껴 보는 충동이 도유를 두드렸다.
도유는 잠시 망설였다. 충동에 따라도 될지.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지.
하지만 눈물로 젖은 녹색 눈을, 이 순간에도 도유를 향한 애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청신을 눈앞에 두고도 도저히 그 충동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고마워. 청신아. 잠시 손 좀 놔줘.”
청신은 곧바로 꼭 잡고 있던 도유의 손을 놓아주었다. 도유는 가만히 제 말을 기다리고 있는 청신의 양팔을 잡았다.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는 듯, 순순히 몸을 내어 주는 모습은 신 앞에 선 신자처럼 경건하게도 보였다.
그렇기에 망설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도유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슬픔과 닮은 감정에 물먹은 솜처럼 젖어 있던 녹색 눈이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그것을 본 도유는 망설임 없이 벌어진 입술 틈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
어지간히 놀랐는지 작게 숨을 들이켜는 것이 맞닿은 혀와 입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그 감각에 도유가 웃음을 머금고 눈을 감은 순간, 청신이 강하게 도유를 끌어안아 왔다.
도유는 손을 내려 그를 마주 안으려다가 제 움직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하게 혀를 얽어 오기 시작한 청신의 혀에 움찔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서툴지만 청신의 열기에 응답하듯 혀를 움직였다.
숨결이 섞였다. 야릇한 감각에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감고 있는 눈꺼풀 위로 청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때때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 주기에 어둠을 택했다.
진득한 키스와 쾌락을 닮은 열기에 취하듯, 도유는 어느덧 저를 소파에 반쯤 눕히는 청신의 손길에 가늘게 눈을 떴다.
키스만 할 생각이었지 다음 단계를 밟을 생각은 전혀 없었던 도유가 당황해서 머리를 뒤로 빼려고 하자, 청신이 짐승처럼 달라붙었다.
“아니, 하읍, 잠, 깐.”
말하는데 입술 좀 그만 들이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도유가 손을 들어 청신의 입을 막았다.
열기로 번들거리는 녹색 눈이 도유를 가만히 응시한다.
어울리지 않게 정말 짐승 같은 눈빛이라고 생각하며, 도유는 마치 대리 만족이라도 하겠다는 듯 청신이 입을 틀어막은 제 손을 잡아 곳곳에 입을 맞추고 물고 빨고 핥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당장 도유를 눕혀 버리고 싶다는 욕망 가득한 눈으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해 온다.
동시에 야릇한 움직임으로 손에 키스하는 걸 보니 도유는 조금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금 뭉근하게 내부를 누르는 걸 느꼈다.
“이 이상은 안 돼.”
“결계 칠게요.”
“그게 아니라….”
“그 이유가 아니면 뭔데요? 봐요, 도유 형. 처음이라서 걱정돼요? 걱정 마세요, 형. 거칠게 하는 게 취향이어도 우리 처음이니까 상냥하게 할게요.”
“너 진짜 입, 입!”
흥분하면 입이 거칠어진다는 건 예전에 청신을 급습했을 때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듣기 싫어요? 응?”
“읏, 그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라서 문제였다. 아름다운 미인이 귀에 착착 감기는 미성으로 노골적인 말을 하니 묘하게 흥분됐다.
도유는 잠시 자괴감을 느꼈다. 나는 변태였나? 내가 정말 이런 취향인가 하고 자괴감에 젖어 있는 사이, 도유가 방심했다는 걸 눈치챈 청신이 빙긋 웃으면서 바지 사이로 손을 넣으려는 듯 움직였다.
“잠, 청신아, 잠깐….”
“걱정 마세요, 도유 형. 끝까지 안 할게. 근데 형도 본부에서 이러고 다니고 싶진 않을 거 아녜요? 이것만 해결해 줄게요.”
나쁜 놈. 도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마 가만히 내버려 두면 가라앉을 것을 지금 제 손으로 집요하게 자극해서 흥분시켰으면서, 마치 제 죄는 없다는 어조에 기가 막혔다.
청신은 고개를 숙여 다시금 도유와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혀를 넣지 않고 장난치듯 쪽쪽거리며 입을 맞춘다.
“자국도 남기고 싶은데. 이따가 남겨도 돼요?”
도유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청신이 속삭였다. 도유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움찔움찔 떨며 청신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손에 잡힌 그의 제복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걸 알았지만 힘을 뺄 수 없었다.
“하으, 응…. 눈에, 흣. 안 띄는 곳이라면….”
“고마워요.”
도유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려고 했지만 청신이 고개를 들어 다시금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는 탓에 끄덕이지 못했다.
잠시 후, 도유는 청신이 허락을 구한 ‘자국’을 남긴 부위가 제가 예상했던 곳이 아니라 다른 곳임을 알게 되고 깊이 후회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요망한 놈…!’
*
서현의 재판은 처음 예정되었던 날로부터 2주가 지난 뒤에 열렸다. 재판이 시작되었을 시간에 도유는 청신의 집에 있었다.
가급적이면 재판의 결과를 빨리 듣고 싶었기에 본부에서 대기하려던 것을 청신이 이유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도유 형, 저 형 애인이에요.’
도유의 입장에서는 정말 뜬금없는 발언이었으나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청신은 신성한 재판장에 제 사역마를 보냈다.
그리고 청신의 사역마는 재판장에서도 가장 특등석에 앉아 재판을 관람했다.
바로 재판장의 가장 중심이자 상석 쪽에 앉은 협회장 송유원의 어깨에 자리 잡은 것이다.
청신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채로, 사역마의 시야를 빌리고 있던 도유는 날갯짓하던 새가 송유원의 어깨에 앉은 걸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청신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형, 안대 쓰고 이렇게 제 멱살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흥분돼서 그런데, 다른 곳을 잡아 주실 수 있나요?’
라는 청신의 정중한 요구에 곧바로 손을 놓았지만.
어쨌든 청신 덕분에 도유는 재판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시야만 공유할 뿐, 소리까지 들리는 건 아니어서 사역마에 묶어 놓은 소형 통신 기기를 통해 이어폰을 끼고 들어야 했지만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그리고 재판의 결과가 나왔다.
“……내가 뭘 본 거지.”
안대를 벗으며 도유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서현이 사형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에, 도유는 느릿느릿 손을 들어 제 뺨을 꼬집어 보았다. 청신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워요, 형. 꿈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게 도와드릴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도유의 몸을 만지작거리던 청신의 손이 옷 사이로 냉큼 들어온다.
도유는 청신의 손목을 잡아 요망하게 바로 바지를 벗기려는 손길을 막아 냈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자꾸 1단계가 아니라 홀로 10단계까지 가려는 건지 모르겠다.
손을 막자 이제는 상체를 들어 제게 입을 맞추려는 청신의 입을 들고 있던 안대로 대충 눌러 막으며 도유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방금 사역마의 시야를 빌려 본 재판정의 풍경과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고성들을 한 글자씩 머릿속에서 분해해서 살펴보고 재조립한 뒤 쥐어짜 내듯 물었다.
“지금 서현이가 제작부에서 일하는 걸로 끝난 거 맞아?”
입이 막혀 있는 청신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유가 눈을 깜빡였다. 얼얼한 표정이다. 스르륵, 청신을 막았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무방비해진 연인의 모습에 청신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유의 몸을 껴안아 제 위에 완전히 몸을 겹치게 만들었다.
도유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으나,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세워 살며시 빗어 주기 시작하니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청신은 도유가 충분히 생각하고 이해하기를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 덕분에 도유는 현실을 이해할 시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서현이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대신에 제작부에서 평생 일할 것을 선고받았다.
다만 그동안 살아온 환경 때문에 학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당장은 제작부에서 근무할 수 없고, 카단에서 협회원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근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