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좀처럼 사견을 말하지 않는 경력 많은 카단의 조사관이 넋을 놓고 있는 아이를 보며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이대로 둬선 안 돼요. 이 애의 마음은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해요.’
서현은 그렇게 그날, 카단의 병원으로 실려 갔다. 육신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으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기에 이대로 두면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걸 보고 이렇게 속삭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차피 범법자의 마법을 사용했으니, 일주일 뒤에는 사형수가 될 텐데.’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시적으로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하물며 아무리 협박을 받았다고는 해도, 서현은 카단에게 한 맹세를 어겼다. 재판을 받을 때 아이의 죄는 더 가중된 상태일 것이다.
도유는 자신이 서현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그 아이를 습격한 습격자를 찾아내 죽여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도유는 자기가 너무 불필요하게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다는 걸 자각했다.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일에 분노라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 앞서, 먼저 당장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고민한 후에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식을 듣자마자 무턱대고 현장에 가 보려고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애처럼 잔뜩 흥분해서는.
도유의 뺨이 점점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도유 형.”
나긋한 미성이 도유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고개를 드니 청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속삭였다.
“진정됐어요?”
“…덕분에.”
마치 잘했다는 듯, 도유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청신이 손을 올렸다. 날개뼈부터 허리까지 천천히 쓸어 주는 손길에 도유는 바로 조금 전까지 분노로 빠르게 뛰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이제 손 떼지?”
“요즘 계속 도유 형이 저 말고 다른 애한테 신경 써서 속상하니까 조금만 더 허락해 주세요.”
“이청신.”
“제가 형 만지는 거 싫어요?”
청신이 노골적으로 서운해하는 티를 팍팍 내며 미간을 좁혔다.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꽃잎처럼 안타깝고 처연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도유는 도저히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와중에 청신이 도유가 자신의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아차린 게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었지만, 그 의심을 드러내기도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게 웃어 보이는 얼굴에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아, 다행이에요. 제가 만지는 것도 싫다고 했으면 여기 눕혀 놓고 덮쳐 버리려고 했거든요.”
지극히 그다운 말이었다. 도유는 이번에야말로 청신을 떼어 냈다. 아니, 떼어 내려고 했지만 평소 도유가 있는 힘껏 밀어 내면 순순히 물러났던 청신이 되레 힘을 주어 버티자 놀라 그를 보았다.
“농담이라고 생각해요?”
“…!”
옷 위로 도유의 등을 어루만지듯 쓸어내렸던 커다란 손이 도유의 상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맨살에 닿은 청신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금 전과 비슷한 움직임이었으나 그보다 더 농밀해진 손길이었다.
“손 치워.”
“싫어요?”
청신이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도유는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거짓말.”
옷 안으로 들어온 청신의 손이 몸을 지분거리자 도유는 이상한 열감에 청신의 팔을 잡았다.
“싫다면서 왜 몸을 자꾸 붙여요?”
“그런 적 없어…!”
도유는 혼란스러웠다.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래에 유독 비비적거리는 걸 얌전히 내버려 뒀던 것이 문제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도유가 고뇌하는 사이, 청신은 손을 내려 도유의 허리를 쓸었다.
“흣-! 미친, 이청신!”
그대로 제 바지 사이로 파고드는 손길에 도유가 결국 청신의 뺨을 때렸다.
버릇대로 주먹으로 치려다가 손바닥으로 때린 게 가까스로 붙잡은 이성의 한계였다.
짝,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고, 청신이 도유를 놓아주었다. 도유는 당황했다. 그냥 맞아 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린 속도고, 평소의 청신이라면 제 얼굴을 때리는 걸 막을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청신은 막지 않고 맞았다.
“청신아…? 괜찮아?”
때린 장본인이 물어볼 말은 아니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제 뺨을 감싼 청신이 물끄러미 도유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청신과 알게 된 뒤로 처음으로 자각한 불편한 침묵에 도유가 거북해할 때쯤, 청신이 의아해하며 중얼거렸다.
“…착각이었나?”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청신의 중얼거림을 고스란히 들은 도유가 묻자, 그가 언제 분위기를 잡았냐는 듯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도유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도유 형, 어떻게 이렇게 예쁜 얼굴을 있는 힘껏 때릴 수가 있어요?”
진심으로 있는 힘껏 때리면 뺨이 살짝 붉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치아가 부러지거나 뼈가 어떻게 됐을 거라는 것쯤은 청신이 가장 잘 알 터였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있는 힘껏’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그의 노림수는 뻔뻔할 정도로 뻔했다.
도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거다. 지금도 그게 훤히 보였다. 자기가 한 짓이 도유에게 자칫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한 거였다.
애써 숨기고 있지만 그동안 청신과 가까이 지낸 탓에 도유는 새싹처럼 싱그러운 녹색 눈에 깃든 죄책감을 보고 말았다. 그에 잠시 화가 났던 것마저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청신도 도유의 푸른 눈에 언뜻 떠올라 있던 분노가 티끌 하나 없이 사라진 걸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톡 건드리면 당장 눈물을 뚝뚝 흘릴 기세로 도유에게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갔다.
한 손을 들어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니 청신은 말 잘 듣는 개처럼 딱 멈춰 선 채 눈망울만 반짝였다. 도유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채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곱씹어 봤다.
‘하나, 이놈이 갑자기 개수작을 했다. 둘, 평소 같지 않게 강제로 날 덮치려고 했다. 셋, 그런데 한 대 때리니까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왔다.’
청신이 중얼거린 말까지 되풀이해서 생각한 도유는, 이 녀석이 어떤 이유로 제게 뭔가를 시험해 봤다는 걸 알아차렸다.
“야, 이청신. 너 지금 뭐 한 거야?”
“뭘 해요? 도유 형, 저 너무 아픈데, 뽀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하며 처연하게 눈시울을 붉히는 청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 둘러메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제 청신의 미인계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도유는 흔들리지 않았다.
“너 뭐 했냐고. 얼버무리지 마.”
“…….”
“눈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유리구슬 굴러가듯 슬쩍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며 도유는 확신했다.
이윽고 청신의 표정이 바뀌었다. 한숨과 같은 웃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대답해 주면 용서해 줄 거예요?”
도유는 잠깐 동안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응. 용서해 줄 테니까 말해 줘.”
“……!”
말해도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청신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도유를 멍하니 보았다. 이윽고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에 도유는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꼈다.
“넌 내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거 알아.”
언뜻 보기에는 가볍고 장난 같은 손길로 만져 오지만 청신은 도유에게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항상 세밀하고 진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래서 도유가 청신의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게 된 거다. 처음에는 기대기는커녕 슬금슬금 피했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됐다.
인지하고 있든, 인지하지 않든 청신이 손을 내밀면 도유는 자각도 못 하고 그에게 의지한다. 그걸 청신이 알고 있고, 이렇게 스스로도 인정하게 되니 더더욱 민망했지만 지금은 고개를 떳떳하게 들어야 할 때였다.
“그럼 잠시만요.”
청신은 그렇게 말하더니 마법을 사용했다. 도유는 잠시 그와 자신을 감싸듯 마력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방음 마법까지 사용하면서 할 말이야?”
“도유 형에게 곤란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내게?”
“네.”
단호한 대답에 도유는 내심 걱정됐다. 진지한 분위기에 헛소리를 하면 이번엔 정말 힘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도유 형이 김서현에게 신경 쓰기 시작했을 무렵엔 그냥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오늘에서야 조금 확신이 들어서 실험해 본 거였어요.”
“…뭘?”
“도유 형의 눈이요. 형이 저를 볼 때마다 다른 것의 시선을 느껴서요.”
“다른 것의 시선…?”
도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청신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도유 형의 눈을 통해서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제가 형에게 밀접할 때마다 더 선명해져서.”
“…….”
‘저 애가 날 볼 때마다 꼭 다른 괴물이 날 보는 것 같아.’
‘도유야, 미안한데 날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분명 너 혼자 있는데…. 이상해. 꼭 너 말고 누가 있는 것 같아. 섬뜩섬뜩해져.’
목소리가 겹쳐진다. 처음으로 도유를 입양했던 부모와, 두 번째로 입양했던 부모의 목소리다.
그들은 도유와 함께 지내면서 언젠가부터 ‘시선’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뒤부터 점점 도유를 밀어 내더니 파양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