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뭐야. 요즘 애들은 약하네. 이걸로 겁먹은 거야?”
“-아, 아저씨…!”
“서현아. 이 아저씨 살리고 싶지? 착한 서현이가 마법진을 안 그리면, 아저씨는 다음에 이걸로 여길 찔러 버릴 거야. 그럼 이 아저씬 ‘으악!’ 하고 죽겠지? 자, 마지막 기회야, 서현아. 어서 그려 줘.”
영연이 다시 종이와 펜을 내밀다가, 펜이 간수의 피에 젖어 있는 걸 보고 쯧 하고 혀를 차며 제복에 대충 벅벅 닦아 건네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서현이 덜덜 떨며 겨우 펜을 받아들자 영연이 피에 젖지 않은 손으로 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착하다. 어서 그려 줘. 시간은 걱정하지 마. 여기엔 내일까지 아~무도 안 오니까.”
내심 다른 사람이 이상을 알아차리고 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서현의 기대가 산산조각 났다.
*
영연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현이 수감된 감옥에서 나왔다. 제복 주머니에는 서현이 그린 마법진이 들어 있었다.
그는 속으로 흥얼거리며 유유히 복도를 걸었다. 이대로 1층으로 내려가서 사역마를 통해 마법진을 본체에 전달하면 계획대로였다.
이 본래 몸의 주인은 그저 업무 중에 깜빡 졸았다고 생각할 테고, 서현은 영연의 협박에 이도 저도 못 하고 고뇌하다가 아무 말도 못 한 채 끝내 사형당할 것이다.
너무나도 쉽게 끝난 계획에 뿌듯한 나머지 영연은 종이가 든 제복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지금 움직인 팔은 서현의 앞에서 펜을 찔러 넣었던 팔이었다.
영연은 아픈 기색도 없이 팔을 내렸다. 아니, 실제로 아프지 않았다. 다치지 않았으니까.
간수의 팔은 멀쩡했다. 펜으로 찌른 자국도, 동맥이 끊긴 것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제복 소맷자락을 적신 자국도 없었다. 당연했다. 영연은 서현에게 환상을 보여 주었을 뿐, 간수의 육체에 상처 입히지 않았다.
‘애초에 진짜 찌르면 의식이 깨어날 테고~ 내가 바보도 아니고~.’
영연은 청신처럼 강한 마법사가 아니다. 세뇌 마법이 주특기이긴 하지만, 이렇게 마법사의 정신을 빼앗고 육신까지 원격으로 움직이는 일은 그에게도 몇 날 며칠은 앓아누워야 할 정도로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서현에게 마법을 가지러 온 것은 다 서도유 때문이었다.
‘진짜 꼬여도 재수가 없지.’
마법의 행방을 겨우 알아내고 헐레벌떡 왔더니 서도유가 서현을 카단으로 데려가는 장면을 보고 얼마나 기겁했던가.
원본을 손에 넣고 싶었지만 영연은 자신의 실력을 알았다. 지금 카단의 본사에 쳐들어가면 죽는 건 자기밖에 없다는 걸.
그렇기에 그는 이 건물을 노렸다. 이곳의 감시도 엄중하긴 했지만 본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영연보다 약한 마법사들도 제법 있어 정신계 마법을 사용해 지금처럼 움직이는 게 가능했으니까.
실제로 성공했다. 이대로 돌아가 마법식에 마력을 좀 더 불어넣고 보완을 하면 서도유를 꿈속에 재워 버리든, 꿈에서 깨어나도 자살하게 만들든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잠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층 1층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옆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영연이 고개를 돌렸다. 간수와 똑같은 제복을 입은 감청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염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이한 머리카락 색이었지만, 유명한 마법사 가문에서만 나오는 특유의 머리카락 색임을 알아봤기에 영연은 어렵지 않게 이름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유량. 한때 마법 결계로 유명했던 대기업 천약(天籥)의 희망인 유일한 마법사. 그러나 망나니로 큰 둘째 도련님.
영연은 일단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량을 보았다.
“너 지금 김서현에게 다녀온 거지?”
“네, 점심 식사량이 적어서 배가 고프지 않을까 하여 다녀왔습니다.”
미리 생각해 뒀던 변명을 꺼내자 량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연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며 량에게 고개를 숙인 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영연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을 막은 결계에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 네 주머니에 든 거 내놓고 가. 뒈지기 싫으면. 걔 몸도 되돌려 놓고.”
확고한 어조에 영연은 진심으로 놀라며 되물었다.
“와, 어떻게 알았어?”
“너라면 평소 나한테 무슨 트집 잡힐까 무서워서 눈 깔고 다니던 놈이 갑자기 눈을 똑바로 보는데 못 알아채냐?”
“너 정말 듣던 대로 망나니구나?”
영연은 악의 없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물었다. 량은 그의 말에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그의 손이 허공을 틀어쥐는 듯하더니,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명하지만 푸른빛을 띤 채찍이었다.
“이름 모를 쥐새끼도 서도유도 날 머저리로 보고…! 널 잡아서 고문실로 데려가 주마!”
량이 노기를 띤 목소리로 소리치며 채찍을 휘둘렀다. 영연은 들킨 김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량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과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량의 내부를 가득 채운 분노와 증오를 느끼고 생각을 바꿨다.
‘와, 뜻밖의 수확이네!’
영연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량의 채찍을 요리조리 피했다. 채찍의 끝이 사정없이 영연이 서 있던 곳에 내려쳐진다.
채찍이 닿은 바닥과 그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영연은 량을 어떻게 써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멈춰 섰다.
갑작스레 영연이 멈춰 서자 량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채찍으로 그의 몸을 묶었다. 마법이 시전되며 그의 채찍이 빛을 품었다. 일순 채찍에 떠오른 마법식을 빠르게 읽고 이해한 영연은 어이없어하면서 물었다.
“내가 악귀야?”
량이 시전한 건 악한 것을 쫓아내는 마법이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영연에게 던졌다. 시전 중이던 마법이 발동하고, 량이 던진 아티팩트에서 발동된 마법이 충돌했다. 영연은 당황했다.
“너, 이 몸이 죽어도-!”
“상관없어. 네가 죽이게 된 거니까.”
확신하는 어조였고, 궤변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일단 이곳에 침입한 영연이 간수를 ‘공격’한 건 맞으니 량이 침입자를 잡기 위해서 간수를 죽였다 하면 그건 량의 잘못이 아니라 영연의 잘못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영연은 간만에 감탄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와, 너 정말 성격 맘에 든다.”
“닥쳐.”
충돌의 여파가 공간을 흔들었다. 솟구치는 것처럼 채찍에서 튀어나온 물줄기가 영연의 몸을, 아니 간수의 몸을 꿰뚫었다.
지금까지는 전혀 느낄 수 없던 고통이 영연의 진짜 몸에 느껴졌다.
욕이 나올 정도로 끔찍한 고통에 몸의 원래 주인인 간수의 의식이 점점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영연의 의식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달라진다. 하나는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량이 보이는 시야. 또 하나는 본체인 영연의 시야.
‘아, 저놈만 아니었어도 성공했는데.’
“다음번엔 네 진짜 몸에 구멍을 뚫어 줄 테니까 기대해.”
유량의 조소 가득한 목소리와 동시에 간수의 시야가 완전히 끊겼다.
“하….”
원래 몸으로 돌아온 영연은 한숨부터 쉬었다.
서현이 그린 종이를 가져가지 못하고 육체를 돌려주게 되었으니 성공적이었던 계획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아니지. 완전한 실패는 아닌가.’
서현이 마법진을 그릴 때 전부 외워 두기는 했다.
다만 자신이 복제할 경우, 처음부터 마법진에 수식과 마력을 새겨 넣는 과정에서 시간이 조금 걸리기 때문에 바로 쓸 수 없었다.
가급적이면 마법진을 얻자마자 곧바로 도유에게 가서 사용하고 싶었던 영연은, 계획의 뒷부분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
재판이 일어나기 전 벌어진 일로 카단은 잠시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서현이 습격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유는 드물게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내가 가서 봐야겠어.”
“도유 형.”
“습격한 인간이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 현장에 남은 흔적이 불분명하다고 했잖아. 내 눈으로 가서 보면 되겠지.”
“도유 형, 진정해요.”
청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도유를 달래며 그의 몸을 끌어안아 왔다. 속을 홧홧하게 달구는 분노의 열기에 취하듯 그대로 청신을 밀어 버리고 서현이 있던 감옥으로 가려던 도유는, 미인의 슬픈 얼굴을 보고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응? 도유 형. 부탁이에요. 오래 붙잡진 않을게요. 진정될 때까지만 잠시 이러고 있어요.”
이렇게까지 달래는데 바로 밀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도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도유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저를 안고 있는 청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도 화가 나.’
곱씹을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다시는 마법진을 그리지 않겠다고 카단과 스스로에게 맹세했던 서현은, 간수의 목숨을 붙들리고 협박당하자 다시 마법진을 그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간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유량이 습격자를 막아 그의 몸을 되찾은 덕분에 마법진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서현은?
‘아이가 견뎌 낼 수 있는 환상이 아니었겠죠.’
그 일이 있은 직후 조사관은 서현의 몸에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탐지 마법은 본래 마법적인 흔적만 탐지해 내지만, 이따금 대상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은 감정도 함께 찾아냈다.
그리고 탐지 마법은 아이의 몸에 정신계 마법의 흔적과 공포와 절망의 감정이 진득하게 남아 있는 걸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