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대체 이 짧은 사이에 무슨 상상을 그렇게 심도 있게 하는지, 살짝 몽롱한 듯 보였던 녹색 눈이 순식간에 아쉬움에 젖어 든다.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낸 시무룩한 표정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도유는 청신이 빙긋 웃는 걸 보고 나서야 제가 청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는 걸 자각했다.
황급히 손을 내리려고 하자, 청신이 도유의 손등에 손을 겹치며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만 더 쓰다듬어 줘요. 도유 형.”
그러면서 머리를 기댄다. 아쉬움에 젖었던 녹색 눈이 기쁨으로 물들어 햇살이 비친 유리 조각처럼 반짝인다.
싱그럽게까지 보이는 옅은 웃음을 띤 청신의 미모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도유는 조금씩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사이 얽히는 청신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의 감촉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진다.
제 손길 한 번에 행복한 듯 웃는 청신의 모습에 그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어서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얼마든지 손을 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어린 날의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에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미 이루어진 건가.
도유는 청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애정을 가득 품은 녹색 눈이 기다렸다는 듯 응수해 온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청신은 자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유는 청신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엄마랑 아빠가 저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12살에 빌었던 그 소원의 대가를, 사랑받게 된 순간 찾아온 양부모님의 죽음과 끔찍한 사건을 전부 기억하기에 더욱 망설여졌다. 혹시라도 청신에게 사랑한다 말한 순간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더럭 겁이 났다.
도유가 사용했던 범법자의 마법의 영향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만약’의 상황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도유 형.”
“…응?”
“아는 애가 누구예요? 누군데 형이 아카데미 입학까지 챙겨 주려고 해요?”
알사탕처럼 달고 투명하게 구르듯 매끄러운 목소리가 자아낸 질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느슨하게 풀어졌던 도유의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고 있지만, 대답 여하에 따라 청신이 귀찮게 질척여 올 것임을 직감한 도유는 그가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 대답했다.
“우연히 만난 애인데, 마법사가 되지 못해도 마법과 관련된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하길래 알아본 것뿐이야.”
2주 전, 도유는 미리 약속을 잡아 뒀던 지원 센터에 서현을 데려다주었다.
서현은 그날 이후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되었다. 서현의 사연을 듣게 된 다른 기관들이 합심하여 아이의 주민 등록을 비롯한 당장의 생활을 위한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서현은 굉장히 기뻐했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진짜 이름이 생겼다면서. 이제는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며 웃었다.
행정적 처리는 지난주에 반절 정도가 끝났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했기에 서현이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도유는 걱정이 없었다.
서현은 정말 똑똑한 아이였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매일매일 걸어가서 책을 읽고, 거기서 만난 아이들이 준 교과서를 받아 혼자 공부했다고 했을 때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지만, 도유가 몇 가지 문제를 시험 삼아 내 봤을 때 서현은 대부분을 맞췄다.
특히 수학을 잘했다. 여전히 마법사로서의 재능은 없었지만, 한 번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바로바로 외우고 계산해 내는 재능은 분명 또래 애들보다 더 우수했다.
게다가 마나 감응력도 일반인보다 높다.
도유는 최근 이카루스 아카데미에서 미성년자 대상으로 마법 인재가 될 청소년반을 운영하는 걸 기억하고 서현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음. 김서현이라고요. 도유 형이 계속 도와줄 건가요?”
“그건 아니지. 센터와도 연계해 줬고, 그쪽에서 앞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다방면으로 도와준다 하니 내가 더 신경 쓸 필요 없어.”
“다행이네요.”
청신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미지근한 반응에 내심 그가 질투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도유는 자신의 걱정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고 안도했다.
아무리 청신이라 하더라도 보호가 필요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질투하지는 않는구나.
도유는 생각보다 상식적인 반응에 흡족해하며 칭찬의 의미로 그의 머리를 더 슥슥 쓰다듬어 줬다.
청신이 그 손길을 만끽하며 나른한 고양이처럼 도유의 어깨 위에 머리를 올리고 허리를 안았다. 도유는 어째선지 생각에 잠긴 청신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얌전히 안겨 주었다.
*
“이대로 미제로 분류되는 건가.”
특수부 제2팀 소속 유량은 제 상사, 제2팀 팀장 하창연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푹 숙였다. 범법자의 마법을 사용한 ‘피해자’가 누군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팀 내 분위기도 조금씩 침체되어 가고 있는 걸 량은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꼈다.
이번 일의 서포트로 서도유가 붙는다는 걸 알고 그의 도움은 필요 없다며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던 것이 바로 저였기에, 눈칫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연은 량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량이 도유와 같은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반년마다 카단에서 자체적으로 행하는 테스트에서 한 번도 도유를 이겨 본 적이 없는 까닭에 그가 도유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 열등감을 해소하게 해 주고자 도유를 서포트로 붙여 달라 요청하고 량이 메인이 되도록 일을 맡겼다.
하지만 현재, 낙원을 부르짖으며 집단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더 이상 늘지 않고, 수사에 진전 없이 종결되게 생겼다.
범법자의 마법이란 딱 그 흔적을 잡아낼 수 있는 시기가 있었기에 또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좋든 싫든 이대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량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창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사건은 기존에 있던 사건들과는 달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현장에 고여 있던 피해자들의 혼도 기억하지 못한다 했으니 단서도 얻을 수 없었고.”
그간 범법자와 관련된 사건들은 한 번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수십, 수백 명씩 죽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해자가 많지 않았다.
다섯 번째 사건에서는 15명이 뛰어내렸으나 모두 살아남았고, 그들의 몸에 남은 마법의 흔적만으로 겨우 범법자의 마법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옅은 흔적만 남았다.
조사부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광기가 느껴질 정도의 집착 어린 조사로 ‘피해자’가 마법을 사용한 장소는 추려 냈지만 그뿐이다.
흔적도 남지 않았으며 범법자의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창연의 다독임에 량의 고개가 더 무거워졌다. 이대로 흐르는 분위기를 보면 사건을 종결할 수밖에 없다. 창연은 빙긋 웃으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1팀 서도유였다면 뭔가 찾아낼 수 있었을 테지만, 뭐. 량이 넌 다르니까.”
가벼운 어조로 내뱉은 말에 량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서도유를 언급한 순간 량이 살기를 흘린 것을 느꼈지만, 창연은 량이 올린 보고서를 서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럼 가 봐.”
“…예. 감사합니다.”
물걸레 짜내듯 쥐어짜 낸 목소리로 인사한 뒤 량이 팀장실을 나갔다.
량이 떠난 뒤, 창연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마시며 흥흥, 하는 이상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량에게 징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런 성격에는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는 게 징계야.”
뒤에서 들려온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창연이 즐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상대방은 명랑하기까지 한 창연의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서도유에게 괜히 시비 걸면 어쩌려고요. 성 팀장님 최근에 성깔 더 더러워진 거 아시죠?”
“이천아. 걱정 마. 그런다고 희유가 설마 내 부하 대가리를 베어 버리겠니?”
“25년 전에 한 번 그랬잖아요. 사유는 달랐지만.”
“그건 손잡이로 대가리를 후려쳤을 뿐이야. 안 죽였었어.”
당찬 대답에 창연의 비서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주이천은 묵묵히 그의 앞에 과자를 내려놓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과자부터 냉큼 집어 먹으며 창연은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제 맞은편에 앉는 주이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량이같이 자존심 센 애들은 자기가 분명하게 잘못했을 때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 ‘아 나에게 기대조차 걸지 않았구나’ 하고 말야.”
“실제로도 기대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럴 리가. 난 량이를 어엄청 아끼고 있는걸. 그 녀석은 잘 키우면 오래 쓸 수 있잖아. 서도유 그 녀석이랑 경쟁의식 좀 붙이면 더 쓸모 있어질걸.”
“그래서 계속 서도유와 비교하셨던 겁니까.”
창연은 유량이 입사한 뒤부터 서도유를 이용해 량을 자극해 왔다.
그가 자극을 받아서 서도유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질투를 하도록.
증오는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니, 다른 팀에 속한 뒷배 없는 인간을 이용하는 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명안이었다.
“그럼~ 이용할 수 있는 패는 써먹어야지.”
이천은 잠시 질린 눈으로 자신의 상사를 보았다. 저러니 성희유가 싫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