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영연이 눈을 반짝였다. 만약 정말로 청신이 의뢰인에게 준 마법에 서도유가 휘말려서 죽는다면? 아무리 수호를 받는 이청신이라 해도 그 순간만큼은 취약해질 테고, 그때 영연이 청신에게 세뇌 마법을 걸으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청신이 의뢰인에게 준 마법만 본다면, 영연이 복제할 수 있었다. 청신처럼 조금의 마력을 불어넣은 것만으로 광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한 명만을 목적으로 하고 사용하면 충분한 효과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영연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던 바닥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분노와 짜증으로 이글거리던 마음이 즐거운 상상 덕분에 가벼워졌다.
*
아카데미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청신이 도유에게 와락 안겨 왔다. 아니, 안아 왔다. 도유는 반사적으로 청신에게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고 제압하려다가, 이제는 하도 안기는 바람에 익숙해진 그의 체향을 알아차리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오늘은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저 걱정했어요?”
기대 어린 목소리로 눈을 반짝이며 묻는 청신은 긍정의 대답만 하면 입을 맞출 기세였다. 도유는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청신을 가차 없이 밀어 내고는 다시 작업대에 앉으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으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음. 무슨 일이 생겨서 늦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청신이 의자에 앉은 도유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슬쩍 입술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도유는 제 귓가를 간지럽히는 청신의 숨결에 눈살을 찌푸리며 가차 없이 그의 얼굴을 밀어 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려고 했어.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으니 오늘 작업이나 시작하자.”
“저 ‘무슨 일’ 있어요.”
도유가 고개를 들었다. 놀람과 걱정이 그대로 스민 푸른 눈. 청신은 저 눈을 핥으면 그 어떤 꽃에서 나온 꿀보다 더 달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도유 형이 키스해 주지 않아서 주말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도와주실래요?”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서글프게 만드는 건 무시다.
도유는 청신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아 걱정하며 핸드폰을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한 자신의 한심한 행동을 속으로 질책하며 청신을 무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신은 도유의 옆에 자기 의자까지 끌고 와 본격적으로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형. 도유 혀엉.”
“오늘따라 왜 이래?”
결국 패배를 선언한 도유가 묻자, 청신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형이 그랬잖아요. 저를 좋아한다고.”
“지인으로서 좋아한다고 했지.”
“네. 이렇게 멋있고 잘생기고 예쁜 저를 계속 보면 금방 사랑으로 바뀔 테니까 자주 봐 주세요.”
맞는 말이라 딱히 반론할 생각도 없었고,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말하면 청신이 ‘저 예뻐요?’ 하면서 더욱 얼굴을 들이밀 테니 도유는 침묵을 지켰다.
“…!”
청신이 도유의 손목을 잡았다.
안정화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일종의 코팅 용액을 바른 붓을 들고 있던 터라 도유가 그를 떨쳐 내는 것보다 먼저 반대편 손으로 붓을 치웠다.
용액이 맨손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청신의 손은 의외로 크고, 선이 굵은 남자다운 손이었지만 화상 자국이 생기면 볼 때마다 속상해질 게 뻔했다.
아니. 그런 외적인 이유보다는 그냥 청신이 아픈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생각할 틈도 없이 멋대로 손이 움직이고 말았다.
그 사실을 자각한 도유는 아주 잠깐 동안 제 행동을 곱씹어 보다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따지듯 말했다.
“야, 이청신. 위험하잖아.”
“형.”
“왜?”
“이 아티팩트 누구에게 받은 거죠?”
갑자기 손을 잡기에 또 이상야릇한 손놀림으로 제 손을 주무를 줄 알았던 도유는, 질투를 고스란히 드러낸 부루퉁한 청신의 질문에 어이가 없어서 대답해 줬다.
“팀장님께서 주셨지.”
“이거 카단이 아니라 개인 소장품이죠? 왜 성희유 팀장이 도유 형에게 아티팩트를 줘요? 나도 아직 못 줬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아티팩트를 빼 가려다가 도유에게 저지당하고는 못마땅한 듯 녹색 눈을 가늘게 뜬다.
“개인적인 일로 잠시 빌려주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개인적인 일이요?”
청신이 입을 다물었다. 도유의 사적인 일까지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듯했다.
그러나 곧, 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모습에 도유는 이놈이 속으로 뭔가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청신아, 입 열기 전에 잠시 심호흡해 봐.”
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고 빠르게 말하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청신이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그 짧은 행동으로 이성을 되찾았는지 눈빛이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도유가 안도할 무렵, 청신이 생긋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놈이 도유 형 괴롭혀요? 설마 그 유량이라는 놈이 또 도유 형 괴롭혔어요? 그럼 이거 사용하죠. 제가 대상 지정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팔찌를 발동시키려는 듯 슬쩍 마력을 움직이는 청신의 행동에 도유가 황급히 그를 말렸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윤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다른 이유였다.
제힘만으로도 충분히 몰래 죽일 수 있는 대상을 죽이기 위해, 최소한 연봉 2년 치는 거뜬히 뛰어넘을 값비싼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도유의 행동을 오해한 청신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왜 막아요?”
“유량 씨는 만나지도 못했어. 그리고 그런 일로 일일이 사람을 죽이면 아티팩트가 남아나질 않을 거야.”
아티팩트로 죽이든, 다른 수단을 사용해서 죽이든 간에 자신에게 짜증 나는 존재라고 닥치는 대로 죽이면 인간들의 문명이 이만큼 발전하지도 못했으리란 틀에 박힌 이야기를 잠깐 해 줄까 하다가 그냥 그만뒀다.
지금은 그런 걸 말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대충 얼버무린 도유는 진짜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이걸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겪고 싶지는 않아.”
물론 이걸 임무 중에 사용할 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른다. 일단 성희유가 준 것이니 도유는 이걸 알차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현장을 직접 뒹굴고 다니는 도유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특수부 1팀은 목숨이 오가는 현장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는 팀이다. 그렇기에 이런 아티팩트는 굉장히 소중했다.
지금까지 도유가 겪었던 팀원 중에는 실제로 아티팩트를 마구 낭비하거나, 챙기지 않았다가 충분히 살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급사한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신입 마법사들이 그러했다.
본인이 마법사이기에 카단에서 제공한 아티팩트가 필요 없다고 하던 이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나 바로바로 마법이 필요한 순간에 대처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도유가 구해 주려고 했지만 공포에 질린 그들은 스스로 안전지대를 벗어나 죽거나, 도유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든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이건 안 쓸 거야. 청신아, 나를 위해서 화를 내 주는 건 고마운데 난 이런 좋은 아티팩트를 내 사적인 감정에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해해 줘.”
쿡 찌르면 ‘히잉’ 하고 우는 소리를 낼 것만 같은 풀 죽은 미인의 얼굴에 도유의 말은 자연히 설득 조로 변해 버렸다.
“아티팩트 소모가 걱정이라면 걱정할 것도 없어요. 저 돈 많고, 이런 건 백 개든 천 개든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이런 ‘유’의 아티팩트를 네가 만들 수 있다고?”
도유가 일순 눈을 빛냈다. 그러나 완벽한 타인이 만든 수제 아티팩트를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질투에 눈이 먼 청신은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뻐기며 대답했다.
“그럼요. 도유 형은 저 뒷조사했으니 아시잖아요.”
“아, 그…. 미안.”
카단을 통해 뒷조사를 했으니 청신이 알지 못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이렇게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너 내 뒷조사 했잖아.’라는 말을 들으니 드물게 죄책감이 밀려왔다.
고개를 숙이는 도유를 애정 그득한 눈으로 보며 청신은 도유의 손목에 도드라진 뼈마디부터 길게 쓸어 올리듯 손을 움직여 그의 손등을 감싸 쥐고 토닥였다. 괜찮다는 듯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관심 가져 주는 일만큼 기쁜 일은 없잖아요. 어쨌든, 기업에서는 비밀리에 제게 이런 유의 아티팩트와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도 제작 의뢰를 하거든요. 그때마다 만들어 줘서 제가 못 만드는 건 없어요.”
마법사가 세상에 섞여 들기 시작한 후, 자연사를 가장한 암살이 수월해졌기에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제 몸을 보호하거나 상대방을 죽일 아티팩트들을 경쟁하듯 끌어모았다.
하지만 그런 유의 아티팩트는 공급이 굉장히 적어서 부르는 게 값이었고 지금 도유가 찬 팔찌도 청신이 알기로 10억은 거뜬히 넘는 거였다.
게다가 이 팔찌를 만든 마법사는 최근 잠적을 감춘 까닭에 더는 그가 만든 새로운 아티팩트가 시장에 나오지도 않을 예정이었다. 즉, 부르는 게 값이 된 아티팩트였다.
그러나 청신은 도유에게 그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제 손목에 있는 게 10억을 넘어간다는 걸 알게 된다면, 도유가 식겁하며 성희유의 책상에 던져 놓고 올 걸 알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