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잊으라고요. 전부 잊으라고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도유 형을 잊으라고요?”
얼마나 화가 난 걸까. 그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었던 청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따지듯이 말했다. 맞닿은 몸을 통해 목소리만큼, 그의 몸 또한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느끼고 도유는 숨을 들이켰다.
“도유 형은 내게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난 형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형이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랑 똑같은 일을 겪게 하란 거예요. 내가,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데. 내가….”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다고, 도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슬픔에 살이 에일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청신은 울지 않았다. 눈시울을 적시지도 않았다. 이미 너무 울어서 더는 울 기력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가여워 보였다. 동시에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도유는 청신의 양 뺨을 감싸고 고개를 들어 청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처음으로 도유가 먼저 행한 행위에 청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청신의 입술이 달싹이자마자 도유는 금방 그에게서 떨어졌다.
“미안해.”
청신이 제게 그러했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도유가 말을 이었다.
“내 소문을 듣고 나를 믿지 못했던 사람들은 임무 중에 죽었거든. 1팀은 특성상 혼자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하는 부서니까.”
어떤 식으로 임무에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청신이 알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너도 그들과 똑같이 그런 식으로 죽게 될 바엔 차라리 인연을 끊어서 네가 살아남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뿐이야. 하지만 지금 널 보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내가 미안해.”
“도유 형….”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었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호흡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가벼워지고, 떨리던 몸은 평온을 되찾았다. 저를 끌어안은 청신의 팔이 그 어떤 버팀목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내가 널 사랑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제는 너를 친한 지인으로서 좋아한다는 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
청신의 뺨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걸 보며 도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말마저도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 녀석이 귀엽게 느껴졌다.
“도유 형.”
“응?”
도유의 웃음이 뚝 멈췄다. 이 녀석은 왜 갑자기 이렇게 눈을 번뜩이는 걸까?
심지어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는 까닭에 청신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유가 본능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기 전, 그가 요염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지금 제게 몸을 맡기면 ‘좋다’는 감정이 당장 ‘사랑’으로 바뀌게 해 드릴 수 있는데, 어떠신가요?”
“거절할게.”
목적이 뻔한 질문이다. 가차 없이 일갈하는 도유에 청신은 서운한 듯 미간을 좁히며 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그럼 뽀뽀라도 한 번 더 해 주세요. 사람을 이렇게 설레게 해 놓고 무시하는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이제 대화 끝났지? 놔. 옷 갈아입게.”
도유는 제게 비비적거리며 달라붙는 청신을 떼어 놓고 마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도유를 보던 청신은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쉬워했지만 이내 이런 그의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애정을 가득 품은 눈으로 도유를 지켜봤다.
“나가. 뭘 빤히 보고 있어?”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쫓겨났지만, 탈의실 밖으로 쫓겨나는 청신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도유의 일상은 새벽 5시부터 시작된다.
5시에 기상해서 2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아카데미나 본부로 출근하기 전까지 식사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한다. 남는 시간이 있으면 독서나 공부를 하며 뇌를 깨웠다.
카단 협회에 다닌 뒤부터 꾸준히 몸에 들인 습관이 이러하다 보니, 슬프게도 평일이든 주말이든 타협 없이 새벽 5시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도유는 주말이 된 오늘이야말로 늦잠을 자겠다는 마음으로 늦게 잤던 것이 허사가 됐음을 알았다.
저절로 눈이 떠지자마자 보인 알람 시계가 ‘05:00’라는 숫자를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었으니까.
한번 잠에서 깬 몸은 다시 잠들기를 거부했다. 억지로 자 봤자 다음에 일어났을 때 더 피곤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도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로 와 있는 호출이나 메시지는 없었다. 제2팀에서 이번 범법자의 마법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가는데도 도유에게 서포트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범법자의 마법을 지니고 사용한 ‘피해자’가 어디에서 마법을 사용했는지 파악해 내지 못했다는 뜻이거나, 그도 아니면 이번 사건이 이대로 끝나 버려 ‘피해자’가 누군지 영영 알 수 없게 된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잠시 본부에 연락을 넣어 수사 진척도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서포터의 역할이 아니었고, 그 어린 신입인 유량이 연락을 받기라도 하면 새벽부터 짜증 나는 말만 듣게 될 테니 얌전히 기다리는 게 나았다.
솔직히 이대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이 피 같은 주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유는 핸드폰을 조작해 미리 스크랩해 놓은 정보를 화면에 띄웠다.
[50년 전통 하나둘 베이커리 – 탕종식빵과 수제 블루베리콩포트의 조합]
한 달 전부터 도유는 이 베이커리의 기사를 읽고 반드시 이곳의 식빵과 블루베리콩포트를 사 먹겠노라 목표를 세웠다.
그간 업무 때문에 바빴고, 주말의 대부분이나 평일의 비는 시간을 보고서 작성 같은 서류 업무나 청신에게 끌려다녔으므로 가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연락만 오지 않는다면, 여유롭게 집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시외에 위치한 오래된 빵집에 후딱 다녀와서 식빵을 도톰하게 잘라 생크림을 얹고 그 위에 블루베리콩포트까지 잔뜩 올려 먹을 수 있었다.
‘제발 별일 없길.’
도유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가벼운 스트레칭 후에 욕실로 들어갔다.
*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수고하세요.”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넨 도유는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의 양손에는 목적으로 했던 것 외에도 자잘한 빵들이 한 봉지씩 빵빵하게 들려 있었다. 도유는 마음을 가득 채우는 행복감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카단에서 아카데미 잠입용으로 제공한 숙소에서 왕복 3시간 거리에 위치한 베이커리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인터넷으로는 볼 수 없었던 맛있어 보이는 빵이 잔뜩이어서 기쁜 마음으로 한껏 사 버렸다.
이번 주말은 몸 관리는 잠시 제쳐 두고 반드시 삼시 세끼 탄수화물과 당분만 섭취하겠노라 다짐한 도유는 가벼운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빵을 사기 전까지만 해도 다 팔리지 않을까 싶어서 쫓기는 사람처럼 빠르게 걸음을 옮겼던 터라 주변을 살피지 못한 탓일까. 걸으면 걸을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에 도유는 의아해했다.
‘뭐지. 분명 이쯤에 버스 정류장이 있던 것 같은데?’
체감상 버스 정류장이 나와야 하건만, 엉뚱한 골목길이 나왔다. 도유는 잠시 걸음을 멈춰서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 지도를 비교해 봤다.
그는 곧 너무 들뜬 나머지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왔다는 걸 깨닫고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임무 중이었으면 죽었겠군.’
주말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풀어져 버렸을 줄이야. 자신의 멍청한 실수에 스스로를 질책하며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걸으니 이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외로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많았다.
대다수의 집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창문이 깨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채 방치되고 있었다.
상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길에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대부분 파리만 날리고 있는 게 보였다.
슬슬 문제가 된 갈림길이 가까워질 때쯤, 도유는 한 식당 앞에 서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남루한 차림새의 소년은 멍하니 식당의 문 앞에 붙여 놓은 음식 사진을 보고 있었다.
오래 보고 있지 않아도 도유는 저 소년이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행색도 행색이었지만, 옷 너머로 드러난 소년의 몸이 너무나 비쩍 말랐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도유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소년이 신경 쓰였다. 보호받지 못하고 배가 고파서 서 있는 모습에 동정심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밀도가 다르다.’
임무 중이 아니기에 약으로 시야를 조절하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봤을 때 소년의 주변에 머무는 마력의 밀도가 다른 사람보다 유독 높은 게 보였다.
마법사는 아닌 듯했다. 마법사였다면 배를 곯을 일이 없으니까. 어째서 자연을 떠도는 마력이 저 소년의 주변에 몰려든 걸까?
저처럼 마나 감응력이 높은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마나 감응력이 높다면 저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어지럼증을 호소하거나, 마력의 빛에 시야가 가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테니까.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면 뭔가 있긴 하다는 거다. 도유는 잠시 고민한 뒤에, 일부러 기척을 내며 소년의 뒤를 지나쳤다.
툭.
실수인 척 지갑을 떨어트렸다. 소년이 몸을 돌리는 걸 느끼면서 계속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