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성희유는 직접 상자에서 팔찌 형태의 아티팩트를 꺼내 도유에게 다가갔다.
저를 신뢰하는 듯 가만히 서 있는 도유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며 그가 외관과 똑같이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헛소리하는 인간 있으면 이걸로 죽여 버리세요. 지금 주는 아티팩트들은 대상 지정이 가능하고, 대상이 반경 50km 내에 있으면 어지간한 마법 결계는 다 뚫어 버리고 대가리나 심장에 바람구멍을 내 줄 수 있어요. 들킬 염려는 안 해도 돼요.”
“네?”
“난 내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새X에게 XX같이 X같은 소리 듣는 꼴 못 봐요.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지. 보아하니 유량 씨 말고도 그 이전에 그딴 X같은 소리를 지껄였던 인간이 있었을 테니, 그 인간들 몫까지 드리는 거예요. 아. 부족하면 말해요. 더 있으니까. 그런 X대가리 같은 인간들에게 사용하기엔 과분한 아티팩트지만, X같은 인간들에게 도유 씨의 소중한 시간이 낭비되면 안 되잖아요.”
“…….”
오랜만에 듣는 성희유의 신랄한 말에 도유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유가 그러거나 말거나, 성희유는 주홍색 눈을 매섭게 빛내며 도유에게 물었다.
“도유 씨, 제 말 알아들었죠?”
“…예….”
“좋아요. 착하게 잘 자랐네요.”
*
성희유로부터 받은 아티팩트들을 반강제로 주머니에 넣고 팀장실을 나온 도유는 정신이 반쯤 혼미했다. 성희유가 그렇게 화가 나 있었을 줄은 몰랐다.
성희유는 분명 타 부서의 사람들이 도유를 볼 때마다 소곤거리던 소문까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수부라고 해도 다른 팀과의 교류가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기에 성희유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도유는 제1팀 소속이다. 즉 성희유의 사람이다. 그런 제가 면전에서 모욕을 듣고도 대처하지 않았다는 건, 크게 보면 성희유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희유는 그것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도유만을 생각하고 화를 내며 살상용 아티팩트까지 내주었다. 다음엔 죽여 버리라고. 도유는 성희유가 아티팩트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속으로 후회했다.
유량처럼 제게 면전에서 욕하는 인간들을 뒤에서 처리할 게 아니라 앞에서 처리해야 했었다고.
지금까지 도유는 선을 넘고 면전에서 저를 욕하는 인간을 비밀리에 처리했다.
즉, 상대방이 방심한 순간 반쯤 기절시켜 놓고 정신이 혼미할 때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철저하게 팼다는 뜻이었다.
도유는 효율적으로 때리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흔적이 남지 않되, 사람이 가장 고통을 느낄 부분만 콕콕 집어서 패 버렸다.
당한 사람은 제가 누구에게 처맞았는지도 떠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몸에 뚜렷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니 그저 몸살이라고만 생각하고 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성희유가 알 리가 없었다. 제가 했던 짓들을 제 입으로 말하기엔 너무 졸렬하고 부끄러운 행위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성희유에게 미안해졌다.
이런 착잡한 마음을 누르며 도유는 탈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일정은 이걸로 끝이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할 특수부 제2팀에서 지원 요청을 했을 때만 따라붙으면 되는 거라 당장은 한가해서 바로 귀가할 생각이었다.
“……!”
탈의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이의 얼굴에 도유는 움찔하고 크게 몸을 떨었다. 돌아간 줄 알았던 청신이 탈의실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황하기도 잠시, 도유는 결론을 내리고 탈의실의 문을 닫았다.
청신은 도유를 가만히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웃음기 없는, 그러나 결코 차갑지는 않은 무표정으로 도유를 응시할 뿐이다. 도유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제 사물함으로 향했다.
달칵. 사물함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도유는 사물함을 열어 놓고 제복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몸에 딱 들어맞는 제복의 재킷을 먼저 벗어 걸어놓고 조끼를 벗었다. 제복 셔츠의 단추를 풀기 전, 본부에 있을 때마다 착용하는 카단에서 지급한 목줄을 풀었다.
그사이에도 청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도유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차라리 그가 먼저 물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도유는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닫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내게 신입 교육받고 있는 것 말야, 네가 원한다면 교육 담당으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붙여 달라고 요청할게.”
청신이 카단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도유에 관한 소문은 이번에 처음 들었을 것이다. 도유 딴에는 나름의 배려였다. 그는 청신이 자신을 거북해하리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도유의 소문을 알게 된 신입들이 보였던 반응과 같은 반응을 보이다가 끝내 멀어지리라.
그렇기에 바로 돌아올 줄 알았던 대답이 지체되자 시간이 무게로 변한 것처럼 몸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그 무게가 버거워질 즈음, 청신이 소리를 냈다.
“음.”
대답이라고 하기엔 호응에 불과한 미묘한 목소리였지만, 도유는 그것을 알아차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제 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호흡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고 말하는 것처럼 힘겨웠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그리고 네가 했던 말들, 전부 잊을 테니까 나한테 말 안 걸어도 돼. 졸업 작품도 어차피 잠입용으로 한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목소리를 쥐어짜 내느라 목깃의 단추를 풀던 손이 뚝 멈췄다. 도저히 청신의 얼굴을 보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였지만 제 얼굴을 감싸 쥐는 손에 의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청신이 고개를 뒤로 빼 제게서 벗어나려는 도유의 턱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형,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너도 아까 들었잖아. 내가 부모님 죽, 인… 쓰레기에. 팀원들까지, 다 죽이고 혼자 살아남은 놈이라고. 그러니까…. 난, 그런 놈이니까, 잊어도 돼. 아니, 잊어, 청신아. 그게 네게 좋을 거야.”
“…….”
제 입으로 직접 내뱉으려니 힘겨웠지만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이게 낫다는 걸 잘 알았다. 지금까지 도유는 이런 경우를 지겹도록 겪어 왔다.
아무리 자신을 잘 따르는 신입이나 팀원이 좋아 마음을 주고 열심히 가르치고,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 해도 타인의 말 한마디로 그들과의 사이가 너무나 손쉽게 금이 가 버리는 경우를.
차라리 금만 가는 게 나았다.
‘너, 어차피 자기 부모 죽인 패륜아잖아? 너 같은 놈보단 내 죄가 더 가볍지. 그러니 죽더라도 네가 죽어야 하지 않겠어?’
임무 중 위기의 순간이 닥쳐오면 신뢰했던 동료는 도유를 미끼로 쓰거나 제 방패로 삼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죄가 더 가볍다면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똑같이 타인의 인생을 앗아간 인간들이 죄의 무게를 논하며 도유를 미끼로 삼거나 방패로 삼으며 살아남고자 했다.
그렇기에 도유는 저항했다. 저항의 결과는 도유를 희생시키려던 팀원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거듭될수록, 타 부서에서는 도유가 사람들을 방패로 삼아 살아남는 야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멸시했다. 부모를 죽인 인간답다면서 말이다.
“그동안 잘 대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웠어. 지금 당장 팀장님께 가서 말씀드릴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퇴근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목을 찌르는 것처럼 아파 왔다. 도유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청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제게 이런 식의 애정을 베풀어 준 사람이 처음이었으므로 청신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청신이 붙잡고 있던 도유의 턱을 놓았다. 손이 떨어졌다. 도유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였다.
“날 봐요. 당장.”
분명 명령조였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는 청신의 목소리에 결국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청신의 녹색 눈이 형형하게 번뜩이는 걸 보며 도유는 주눅 들었지만 꿋꿋이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형. 도유 형.”
“…응.”
“형 말은 지금 그거잖아요. 아까 그놈이 형에게 했던 말이 사실이니까 자기한테 정떨어졌을 테니 떠나라고. 나보고 형을 잊어버리라고. 우리가 같이 지내 온 시간들을 잊으라는 말이잖아요.”
“…맞아.”
“근데 어쩌죠. 저는 그게 사실이라도 형 안 놓아줄 건데.”
“뭐?”
“상관없다고요. 형이 누굴 죽였든, 같은 팀을 희생시켜서 살아남았든 간에. 애초에 난 형만 살아 있으면 돼요. 딴 인간들이야 죽든 말든 신경 안 써요. 아니, 오히려 잘했어요.”
도유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청신의 눈을 보고 알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덕분에 이렇게 제가 형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거잖아요. 그러니 잘한 거죠. 하지만 한 가지, 화가 나는 게 있어요.”
청신의 손이 도유의 손을 꽉 잡았다. 손을 빼내기 전에 깍지를 껴 오며, 제 쪽으로 가까이 얼굴을 숙이는 까닭에 무심코 뒷걸음질 치자마자 다른 손에 의해 허리가 끌어안겨졌다. 한 팔로 끌어안는데도 벗어나기 어려운 강한 힘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의 힘 때문이 아니다.
도유는 저를 삼킬 듯 가까이에 있는 청신의 눈을 보았다.
녹색 눈이 다채롭게 빛난다. 도유는 입술을 달싹였다. 분노라 생각했던 감정은 그와 동시에 깊은 슬픔과 그에서 비롯된 옅은 원망으로 유난히 투명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