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휘야…? 왜 그래?”
도유를 받쳐 준 백휘의 눈이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날카롭고 서슬 퍼런 눈빛으로 형형하게 빛나며 도유를, 아니 청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유가 입을 벌리려던 때, 청신의 손이 움직였다. 도유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움직여 등을 받쳐 주고 제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덕분에 백휘에게 온전히 무게를 기대게 됐었던 도유는 다시 중심을 되찾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신은 도유를 안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도유는 매미처럼 달라붙은 청신을 슬쩍슬쩍 밀어 내며 백휘의 눈치를 살폈다.
백휘가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떤 임무를 가든, 인간의 밑바닥을 보고도 감흥 없던 표정만 지었던 백휘다.
그런 백휘가 잠깐 지하에 다녀온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겪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유의 푸른 눈이 침울하게 물들었을 무렵, 백휘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신입?”
“맞는데. 말이 짧으시네.”
청신이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도유는 청신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다가 청신이 지금 본부에서 쓰던 반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혼자 움찔하고 놀랐다.
“도유야. 신입이 강제로 널 만진 거야?”
여전히 도유의 옷 사이에 제집처럼 들어가 있는 청신의 손에 백휘의 시선이 닿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도유를 향해, 백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신입이 너를 추행한 거냐고 묻고 있는 거야, 도유야.”
“어, 어?”
생각지도 못한 백휘의 질문은 도유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도 궁금하네요. 도유 형.”
청신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호응했다. 뭘 잘났다고 흥미진진한 어조로 말하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도유는 백휘의 성격을 안다. 청신의 성격도 알았다. 만약 여기에서 도유가 ‘응, 추행했어.’라고 말하는 순간 백휘는 청신에게 자신에게 붙은 ‘풍전의 마법사’라는 이명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 줄 것이다.
그리고 청신은 ‘진짜 추행이 뭔지 알려 줄까요?’ 하면서 그의 집을 급습했을 때 했던 짓의 다음 진도를 뺄 것이 분명했다.
도유는 청신이 저를 만지작거리는 건 추행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에 그에게 역으로 덮쳐질 위기에 놓였을 때는 분명히 추행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청신은 도유를 강제로 만지지 않는다. 도유가 밀어 내도 면밀하게 기색을 살피고 정말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어쩔 수 없이 밀려나는 척 스스로 떨어졌다.
이를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 도유의 뺨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청신은 꽃봉오리를 벌리는 꽃을 보듯 애정과 온기를 고스란히 품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추행은, 추행은 아니야.”
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도유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도유는 청신과 같은 마음인 건 아니었지만, 이청신이라는 인간은 좋았다.
애초에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 주는 일을 겪는 것도, 매일 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행복하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도유 형, 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저를 안아 오는 것도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이 이상 진도를 빼면 반쯤 죽여 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렇구나. 그럼 됐어.”
백휘의 얼굴이 그제야 옅은 미소를 띤다.
“흐흡….”
이상한 숨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청신이었다. 미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음침한 웃음이 떠오른 걸 발견한 도유가 미간을 좁혔다.
사람에게는 이상한 본능이란 게 있다. 특히 이청신을 상대로는 그 본능이 유독 강해질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도유는 본능대로 행했다.
청신의 멱살을 잡고 밀어 낸 것과 그가 제 입술을 들이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형, 왜요? 제가 형 사랑하는 걸 인정해 줬잖아요.”
“네가 이렇게 들이대면서 허구한 날 사랑한다는데 모르면 멍청이지. 아, 팀장님 오신다. 머리 치워. 그리고 조사부 오기 전에 가면 써.”
“제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아세요? 제 기쁨을 좀 더 누릴 수 있도록 키스하게 해 줘요.”
“개소리 말고.”
단칼에 끊어 내자 청신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서운한 얼굴로 떨어졌다. 그사이 백휘는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도유와 청신을 한 번씩 보고 성희유를 맞이했다.
성희유가 가까워지자 도유의 시선이 저절로 그를 향했다. 단숨에 굳은 도유와 백휘의 얼굴을 본 성희유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냄새가 심한가요?”
“…네.”
도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백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희유에게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피 냄새는 생각보다 사람 몸에 배는 게 쉽지 않다. 피를 뒤집어쓴다면 모를까. 단순히 그 근처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피 냄새가 이 정도로 배려면 오랫동안 있으면서 계속 피가 흘러야 했다.
성희유의 옷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았음에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백휘가 성희유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그의 몸을 살폈다.
도유나 백휘는 성희유가 석주언 따위에게 부상을 입거나 당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희유를 아예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제 피가 아닌 거 알잖아요, 백휘 씨. 도유 씨도 표정 풀고요.”
“석주언의 피입니까?”
“네. 사형할 수 있도록 목숨은 붙여 놨으니 걱정 마세요.”
“알겠습니다.”
성희유가 차에 오르려고 하자, 그의 존재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여전히 도유만 바라보던 청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성희유의 몸에 진득하게 스몄던 피비린내가 씻겨 나간 듯 사라졌다.
“청신 씨, 고마워요.”
“도유 형이 고양이처럼 털을 세운 모습도 귀엽지만, 본부로 가는 내내 그러면 너무 지칠 것 같아서 사용한 것뿐입니다.”
팀장을 향한 말치고는 버르장머리가 없었지만 확실히 그의 마법 덕분에 예민해졌던 감각이 한결 나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도유는 쥐고 있던 청신의 멱살을 놓아주고 제가 움켜쥔 탓에 구겨진 제복 목깃을 직접 손으로 펴 주는 걸로 칭찬을 대신했다.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신이 수줍게 뺨을 붉히며 말했다.
“도유 형, 우리 신혼 같지 않아요? 신혼부부가 이렇게 목깃도 펴 주고 넥타이도 정리해 주잖, 윽! 아무리 저라도 목을 이렇게 조르면-.”
“청신아. 가면 어딨어?”
얄짤없는 단호함에 청신은 힘없이 도유가 준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
도유는 청신의 목을 졸랐던 넥타이를 적당히 풀어 주며 말했다.
“이제 내려.”
“네?”
고개를 갸웃한다.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가면 아래 드러난 날렵한 이목구비와 붉은빛이 도는 입술, 그리고 고개의 움직임에 살며시 흔들린 머리카락까지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이 청신에게 있었다. 도유는 그런 청신을 매몰차게 떠밀며 다시 말했다.
“내리라고. 조사부 일이 궁금해서 왔다면서? 현장 경험 잘하고, 잘 배우고, 네가 대신 써 준 보고서는 정말 고마워. 요긴하게 잘 제출할게.”
“전 도유 형이랑 같이 돌아갈 건데요?”
“청신아, 네가 한 말은 지켜야지. 협회장님께 조사부 일이 궁금하다고 말해서 여기까지 왔다며.”
도유는 상냥한 선배의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난 자기가 말한 거 안 지키는 놈은 질색이야.”
“…….”
그렇지 않아도 무미아 사건 때 도유로부터 ‘너 같은 새끼는 딱 질색이야.’라는 말을 들었던 청신은 크게 동요했다. 어느덧 말없이 조수석에 탄 성희유가 코미디 영화 보듯 저를 구경하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청신은 힘없는 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한편 도유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한 번쯤은 더 치근덕거릴 것을 예상했는데, 저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순순히 말을 따르니 제 말이 심했나 싶었다.
“그럼 본부에서 보자, 청신아.”
“…네. 연락할게요, 도유 형.”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여전히 축 처진 청신의 모습에 도유가 좌불안석이 됐을 때 청신이 덧붙였다.
“보고 싶을 거예요.”
“알았어. 근데 불필요하게 연락하지 마.”
개인 연락처가 없어서 업무상으로 지급된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이 내용들은 임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회해 볼 수 있었다.
저 때문에 청신에게 영향이 갈까 봐 급한 마음에 덧붙였던 것인데 청신이 휙 뒤돌아서 도유를 본다.
앞 좌석에 앉은 성희유가 ‘도유 씨, 되게 매몰차네요.’ 하고 중얼거리듯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유는 지금이라도 청신에게 사과할까 하다가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걸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도유 형의 이런 냉정한 면도 예쁘게만 보이는 걸 보면, 제가 정말 도유 형을 많이 사랑하나 봐요.”
“잘 가.”
탁!
냉정하게 문을 닫아 버리자 청신이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사이, 지금까지 조사부의 위치를 확인하며 바깥에서 대기하던 백휘가 돌아와 운전석에 앉는 걸 보고 도유가 말했다.
“휘야, 네가 운전하게?”
“피곤하잖아.”
“아니야. 내가 운전할게.”
“백휘 씨 말대로 해요. 신나게 뛰어다녔잖아요.”
“…보셨어요?”
석주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보였을 뿐이지만 성희유는 그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돌아가서 오미자청 담가 줄게요. 석주언 씨가 어떻게 담갔는지 알았으니까.”
“네, 네?”
“맛있다면서요?”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에 맞춰서 예의상 대답한 것뿐입니다. 아, 저기 조사부가 옵니다.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아, 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