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43)화 (43/159)

#43

‘정신 차리자.’

스스로에게 중얼거린 도유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차 안에 뒀던 임무용 태블릿을 꺼내 이 마을에 온 뒤 만났던 사람과 파악한 신원 명세, 그리고 석주언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보고를 할지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라도 해 둬야 본부로 복귀했을 때 30분이라도 일찍 퇴근할 수 있다. 유익한 시간 운용을 위해 손가락을 타닥타닥 움직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유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흠칫했다.

‘아카데미에도 졸업 작품 진행 보고서 내야 하는데.’

심지어 제출 기한도 있었다. 도유는 태블릿에 기재된 날짜를 보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이렇게 운명 같을 수가 있을까? 제출 마감 기한이 바로 내일까지였다.

현재 시간은 다섯 시. 카단으로 복귀하면 최소한 9시. 이번 임무 보고서 작성 및 컨펌까지 받으면 새벽…….

쿵!

도유는 차창에 머리를 박았다. 아카데미에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지금 빌린 연구실에서 얄짤없이 쫓겨난다.

심지어 도유는 청신의 인맥으로, 명목상 같은 7학년 학생이 멀쩡히 사용하던 연구실을 빼앗은(?) 상황이라 담당 교수가 그다지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똑, 또똑!

일정한 소리가 아니라 뭔가 얇고 가는 것이 두드리는 듯 차창을 두드렸다. 도유가 고개를 들었다. 파란색의 새가 쉴 새 없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부리로 열심히 차 유리창을 쪼고 있는 모습을 본 도유는 눈을 깜빡였다.

‘이건 뭐지?’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의아해하며 창문을 내린 순간 새가 사라졌다.

“…!”

갑자기 사라진 새에 의문을 품기도 잠시, 도유는 제가 바라보던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에서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화드득 놀라며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은 상대방의 손에 가뿐하게 막혔다.

“저예요, 도유 형.”

“이청신…?”

도유는 눈을 끔뻑이며 제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고 꼭 쥐어오는 청신을 보았다. 분명 보지 못한 시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그의 얼굴에 홀려 멈칫하고 만 도유는 청신이 제 기색을 알아차리고 수줍게 웃는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도유 형도 절 보고 싶었던 거죠? 마음이 통했네요. 키스해요.”

감미로운 목소리로 도유를 유혹하며 슬쩍 얼굴을 들이대는 청신을, 도유는 망설임 없이 밀어 내며 되물었다.

“묻잖아.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조사부가 와야지 네가 왜 와?”

아주 잠깐 동안 청신이 제 말을 어기고 조금 전의 파랑새처럼 사역마를 이용해 저를 지켜본 게 아니었을까 의심했지만 곧 지웠다.

도유가 아는 청신의 성격이라면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인 시점에서 나타나 도유를 구해 내고 ‘많이 무서우셨죠?’ 하면서 들이댔을 테니 정말 지금 막 도착한 거였다.

“현장 견학이요. 조사부가 하는 일이 궁금하다고 협회장님께 말씀드렸더니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셔서 오게 된 거죠. 같이 오려고 했는데 너무 느릴 것 같아 저 혼자 먼저 와 버렸어요.”

“…….”

권력의 찬스를 썼다는 뜻이다.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눈빛을 쏘아 보내니 용케 도유의 눈빛을 읽은 청신이 노골적으로 섭섭해하며 도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사이사이 얽히는 청신의 손길이 어쩐지 야릇하다.

“청신아, 내가 정말 많이 바빠.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많이 바빠서 오늘 너와 놀아 줄 틈이 없어.”

“정말 섭섭한데요. 전 형이 보고 싶어서 조사부보다 먼저 달려온 건데. 도유 형은 제가 안 보고 싶었나 봐요.”

미인의 눈시울이 툭 건들면 눈물을 흘릴 것처럼 젖어 든다.

도유는 잠시 짜증도 잊고 순순히 감탄했다. 이런 놈이 연기를 했어야지 왜 마법사나 하고 있는 건지. 도유는 청신의 손을 떨쳐 내고, 차 밖에서 성희유와 백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물론 청신은 차 안에 가둬 놓고서.

행동으로 옮기려던 때, 청신이 깍지를 끼고 맞잡은 도유의 손 곳곳에 입술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저 도유 형 말대로 형 미행도 안 했고 감시도 안 하고 얌전히 기다렸어요.”

“조사부랑 같이 여기 오다가 그 사람들 버리고 혼자 온 건 잘한 거야?”

“느려 터졌는 걸 어떡해요. 그리고 형, 저 형이 말씀하신 대로 많이 바쁠까 봐 이것도 열심히 만들어 왔는걸요.”

이거가 뭔데.

눈빛으로 묻자 청신이 도유의 무릎에 있는 업무용 태블릿으로 손을 뻗어 조작했다. 청신의 긴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태블릿 위를 누빈다. 그가 화면에 띄운 건 카단 내의 이메일 앱이었다. 도유는 눈을 끔뻑였다.

“야, 네가 어떻게 내 계정 비밀번호를 알아?”

“사랑만 있으면 뭐든 다 돼요.”

“되긴 뭐가 돼? 너 이거 어떻게 알았어? 어?”

“형이 제 앞에서 대놓고 비밀번호 입력하는 걸 봤는데 그걸 어떻게 몰라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도유 형.”

중요했다. 도유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본부 사무실 앞에서 잠깐 타닥거린 걸 봤다고 해서 20자나 되는 무질서한 비밀번호를 다 암기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혹시라도 청신이 제가 틈틈이 힐링을 위해 메일함에 저장해 둔 귀여운 고양이와 레서판다의 사진과 작고 소중한 금액이 찍힌 월급 명세서를 보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 몸이 굳었다.

…후자는 청신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니 좀 슬퍼졌다.

청신은 도유에게 이메일함 목록을 보여 줬다. 최근 받은 이메일 목록에 청신의 이름이 있었다.

[발신 : 이청신]

[제목 : 졸업 작품 진행 보고서]

도유는 홀린 듯 손을 움직여 메일 제목을 눌렀다. 메일 내용에 적힌 [수고비는 도유 형의 키스로 부탁드립니다.]라는 헛소리는 무시하고 첨부 파일을 열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도유가 떨리는 손으로 바뀐 화면에 뜬 내용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내용과 첨부된 사진을 전부 확인한 도유가 입을 떡 벌리고 청신을 보았다. 청신은 방긋방긋 웃으며 도유의 반응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세, 세상에….”

너무 놀라 쥐어짜 낸 목소리마저도 떨렸다. 도유는 정말 놀랐다. 맨날 청신이 눈치 없이 치근덕거리기에 정말 눈치가 없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 바보 같았다. 이 인간은 그냥 눈치가 없는 척한 것뿐이다. 도유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청신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어.”

“부족한 부분 있으면 말해 줘요, 도유 형.”

“부족하긴, 완벽해!”

내일까지 아카데미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청신이 대신 작성한 것도 고마운데 청신은 도유의 문체까지 따라 하여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어 냈다. 잠시 도유가 보고서를 쓸 때의 문체를 어떻게 알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약간 돋았지만 곧 그것도 괜찮아졌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며 카단과 아카데미의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암담한 미래에서 몇 시간은 잘 수 있다는 사실에 도유는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그럼 상으로 키스-.”

도유는 청신을 꽉 끌어안았다. 키스까지는 못해도 칭찬의 토닥임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기에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듯 청신의 등을 두드렸다.

“정말 고마워, 청신아.”

“그러니 키스해 주시면 안 돼요?”

“그건 안 돼.”

“그럼 빨게 해 주시겠어요?”

퍽!

훈훈한 기분이 청신의 상스러운 말로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토닥이던 손에 힘을 줘서 청신의 등을 때리자 청신이 부르르 떨었다. 도유는 당황했다. 물론 소리가 크기는 했지만 정말 강하게 때린 건 아니었다.

“미, 미안. 많이 아팠- 흣! 야! 이청신!”

이놈이 흥분하는 포인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다.

키스하면 도유가 역정을 낼 걸 알기에 도유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으며 문 쪽으로 몰아붙이는 청신의 눈빛이 맛이 간 사람처럼 보였다.

제 위에 몸을 반쯤 겹치듯 눌러 오는 청신의 무게와 그의 황홀하게 웃는 얼굴에 잠시 홀리고 만 도유가 멈칫한 사이에 청신의 손이 도유의 상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허리를 움켜쥐는 손길에 도유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 허리가 여성의 허리처럼 그렇게 얇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청신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까. 도유는 의문을 품었다.

손이 은근히 커서? 아니면 맨살에 닿는 손바닥이 뜨거워서 이런 걸까? 어쨌거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분명한 건 불쾌감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결국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어서 도유는 발버둥 쳤다.

“얻다 주둥이를 들이대. 안 떨어져?”

“키스는 안 할게요. 도유 형 부끄러움 많은 거 저도 아니까. 대신에 여기 핥고 빨고 싶어요. 허락해 줘요. 응?”

청신의 젖은 숨결이 목에 닿는 감각에 도유는 바르르 떨었다. 와중에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에 목 정도면 허락해 줘도 되지 않나 하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도유는 제가 한 생각을 자각하고 소스라치며 청신의 어깨를 잡았다.

“안, 으아악!”

갑자기 차 문이 열리면서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차 문에 완전히 상체를 맡기고 있던 도유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려던 때였다. 뒤에서 단단한 손이 도유의 등을 받쳤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청신에게 매달렸던 도유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휘와 눈이 마주쳤다.

도유는 반갑게 외쳤다

“휘야!”

“…‘휘야’?”

낯선 어조로 청신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듯했지만, 도유는 그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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