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
날이 밝아 오자 석주언은 전날 저녁과 마찬가지로 직접 아침 식사를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으로 배를 채우고, 후식으로는 매실차까지 얻어 마신 도유는 석주언에게 이 마을에서 가 볼 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가 볼 만한 곳이라….”
석주언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이윽고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강현 아우님처럼 젊은 청년이 좋아할 만한 곳이 어디일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 어렵군요. 저와 비슷한 나이대였으면 약초를 캐는 곳을 알려 드렸을 텐데.”
“약초요?”
이런 산에 약초라고 할 만한 게 있나? 하고 의문을 그대로 떠올린 도유의 눈빛에 석주언은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바깥에 비친 건 역시나 산이었다.
“산에 있는 대부분의 식물이 모두 약초이지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약초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보다 강현 아우님과 강우가 갈 만한 곳이 어디가 좋을까요. 이 마을은 정말 경치가 좋고 물도 좋고 산도 좋은데 그게 다 저 같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좋은 거라.”
“예전에 타지인들이 오면 주로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다들 마을만 돌아다니고 등산만 갔다가 돌아오는 게 다였어서….”
석주언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의 일정은 어제처럼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하로 갈 수 있는 입구를 수소문하는 것이었다.
대놓고 지하 입구를 거론하지 않고, 이 지역 전설이나 구전 같은 것을 마을 어르신들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것이었지만 성희유가 정했기에 따라야만 했다.
‘어제 가게 주인과 그 아내분의 반응을 보고 알았어요. 도유 씨는 어르신들에게 먹히는 얼굴입니다. 잘생겼고, 훤칠하고, 키도 크고. 그분들 눈빛에 써 있던데요? ‘잘 붙잡으면 일 잘하는 소가 굴러들어 오겠구나’ 하고 말이죠.’
한순간에 일 잘하는 소 후보가 된 도유는 잠시 씁쓸함에 쓴웃음을 짓다가 손뼉을 치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있다! 있어요.”
“어디요?”
“이 마을 사람들은 안 가는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 타지인들이 자주 갔었습니다.”
“계곡이요?”
석주언이 만들었다는 마른 사과칩을 묵묵히 씹어 먹던 성희유가 고개를 들었다. 호기심 어린 행동. 석주언은 대화에 내내 관심 없던 아이가 관심을 보여서 기쁜지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런데 말로만 계곡이지, 그냥 커다란 물웅덩이 같은 느낌입니다.”
“어째서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가지 않는 거죠?”
“저도 잘은 모릅니다. 얼핏 듣기로는 옛날에 거기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해요. 특히 그 물웅덩이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곳이 있는데 물이 새까맣고, 거기 빠지면 시체도 못 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 사례가 있었어요?”
도유는 겁에 질린 척 물었지만 실상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이 마을에 오기 전, 카단에서 제공한 정보에는 없던 거였다.
마을 사람들을 취조할 때 묻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숨겼을 경우도 있었다. 마을을 번영시키고자 관광 상품을 만들자고 추진하던 때였다면 더더욱 숨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말로만 들었지, 그것도 제가 여기 터를 잡은 후부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형님이 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마을에서 30년을 넘게 살았는데 형님이 말씀하시길 그냥 물놀이 사고가 과장된 것뿐이라 했습니다. 게다가 거기 찾아갔던 타지인들도 멀쩡하게 돌아왔고요.”
어디까지나 기우였지만 확인해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도유는 사람 좋게 웃으며 석주언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위치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 강우가 계곡에 가 본 적이 없어서 한번 가 보려고요.”
*
높게 자란 나무에 파란색 천이 묶여 있다. 그 표식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도유는 손에 든 나뭇가지로 앞에 드리워진 나무나 풀 따위를 한쪽으로 밀거나 쓰러트렸다.
성희유가 가는 길을 터 주기 위해서 나름 노력한 것이지만,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은 듯한 길은 앞을 보고 걷는 것도 시원찮았다.
“괜찮으십니까?”
도유가 걱정스레 뒤돌아보며 물었다. 묵묵히 그를 따라 올라오던 성희유가 생긋 웃는다. 마치 ‘네가 지금 감히 내게 물었니?’ 하는 살벌한 웃음이다.
“저는 괜찮은데 도유 씨는 안 괜찮은가 봐요. 훈련소에 한 달짜리 코스 잡아 드릴까요?”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도유는 훈련소라는 단어를 듣고 비 맞은 고양이처럼 파르르 떨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석주언 씨가 말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뭔가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석주언이 가르쳐 준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지표로 묶어 뒀다는 파란색 천이 가는 길마다 있었다.
산을 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환한 대낮의 산속 풍경과 사방을 휘감은 자연의 마력의 흐름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 멀미가 일 지경이었다.
도유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진 것을 본 성희유가 권유했다.
“백휘 씨에게 옮겨 달라고 할까요? 아니면 약을 드릴까요.”
환한 대낮에 백휘가 대놓고 마법을 사용하면 눈에 띌 수 있다. 그렇다고 마나 감응력을 낮추는 약을 흡입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었기에 어느 쪽도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희유가 기꺼이 권유해 준 이유는 하나뿐이다.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래도 쓰러질 것 같으면 말해요. 참고 참다가 중요한 순간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게 더 문제니까. 게다가 도유 씨가 저와 함께한 임무에서 쓰러졌다는 걸 청신 씨가 알게 되면 굉장히 난리를 칠 거거든요.”
“…예?”
청신의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성희유를 돌아보고 만 도유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물었다.
“그 녀석이 왜 나옵니까?”
“백휘 씨의 합류가 출발하고 나서야 정해진 거잖아요? 청신 씨가 도유 씨와 저만 임무에 간다 하니 제게 찾아와 그러더군요. ‘도유 형이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만약 형이 다쳐서 돌아오면 저도 제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요.’라고요.”
“…….”
미친놈. 도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임시로 특수부에 소속되었다고는 하나, 성희유는 그의 직속 상사였다. 물론 협회장의 아들인 이청신이니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있기야 하겠지만 저 때문에 대놓고 성희유에게 경고를 할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성희유가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도유 씨. 요즘 젊은 애들이 연애하는 걸 보는 건 참 보기 좋거든요.”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저런 다 늙은 아저씨 같은 소릴 하니 말문이 막혔지만 도유는 일단 정정해야 하는 게 있기에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연애하는 게 아닙니다. 이청신이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겁니다.”
“후후, 제게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리고 청신 씨의 일방적인 구애라기엔 도유 씨도 즐거워 보이던걸요.”
“아닙-.”
“잠시만요.”
성희유가 말을 끊고 걸음을 멈췄다. 장난기를 담았던 성희유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아 한 곳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도유의 시선도 자연히 그곳으로 향했지만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참 만에 성희유가 물었다.
“도유 씨. 뭔가 보이나요?”
“…아뇨. 보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봐도, 기척을 더듬어 봐도 딱히 뭔가 보이거나 느껴지진 않았다. 성희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봤나?”
“뭔가 보셨습니까?”
“사람의 형상을 봤거든요.”
도유의 푸른 눈에 이채가 돌았다. 사람이었다면 도유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 ‘그’ 걸어 다니는 시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연히 몸이 굳었다. 성희유는 멈췄던 걸음을 이어 나가며 말했다.
“일단은 마저 가 보죠.”
“예, 알겠습니다.”
*
석주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의심할 즈음에 도유와 성희유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산길이 탁 트이더니 석주언이 말한 계곡이 나왔다.
그의 말대로 계곡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곳이기는 했다.
거대한 바위들과 이끼와 그 주변을 감싼 풀잎들이 개울처럼 얇게 흘러내려 가는 중에 평평한 바위처럼 보이는 땅에 기이한 물웅덩이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 도유가 아는 계곡과는 달랐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도유는 성희유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물웅덩이들은 대체로 성인 남성 하나가 충분히 누울 만한 크기였다. 물이 맑아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물웅덩이에서도 물고기가 살 수 있는지 이름도 모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도 보였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가다가 다른 물웅덩이보다 유독 큰 물웅덩이를 보고 도유가 걸음을 멈췄다.
‘특히 그 물웅덩이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곳이 있는데 물이 새까맣고, 거기 빠지면 시체도 못 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보자마자 알았다. 석주원이 말했던 물웅덩이가 이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드는 불길한 색이었다.
맨정신으로 여기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