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아무것도 아니야.”
“초콜릿 먹고 싶어?”
백휘가 질문과 동시에 곧바로 초콜릿을 까서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딱히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백휘의 친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던 도유는 재빠르게 몸을 기울여 초콜릿을 받아먹고 다시 앞을 보았다. 입 안에 들어온 초콜릿이 무척 달았다.
“도유 씨는 최대한 자상하고 아들에 헌신적인 아빠의 모습을 보여 주세요.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그럴 때는 ‘매뉴얼’과 어제 말씀드린 제스처를 취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빠른 대답에 흡족하게 웃은 성희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태블릿을 백휘에게 넘겼다. 백휘가 허공에 태블릿을 끼워 넣는 듯한 행동을 취하자 순식간에 태블릿이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슬슬 마을 입구네요. 백휘 씨.”
“예. 그럼 조심하십시오.”
태블릿과 마찬가지로 백휘의 모습이 지워 낸 듯 사라졌다.
차 안에 성희유와 단둘이 남게 된 도유는 백휘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능력만 됐다면 백휘처럼 모습을 공간과 공간의 사이에 숨긴 채 조사를 하거나,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유는 마나 감응력만 높은 비마법사였기 때문에 몸으로 직접 뛰어야 했다.
“도유 씨.”
“네, 팀장님.”
“이제 슬슬 연습해 볼까요?”
“뭐, 뭘 말입니까?”
뻔히 알면서도 도유는 바보의 흉내를 냈다. 성희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빠.”
“…!!”
“와 아들의 모습을 연습해야죠.”
일순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고 성희유가 웃었지만 도유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애써 모른 척했던 현실이 코앞에 들이닥치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짜 해? 진짜 하는 거야?’
도유의 혼란을 무시한 채 성희유가 물었다.
“안 할 거예요?”
평이한 어조였지만 안 하면 강제로라도 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도유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가, 가, 강우야.”
“차 세워요.”
성희유의 말에 도유는 반사적으로 그의 명령을 따랐다. 성희유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에 도유는 생각했다. 사방을 둘러싼 이 야산에 제 목 아래로 땅에 파묻어 버리고 연습을 시키려나 보다.
도유가 잔뜩 주눅 들어 운전대에 머리를 박을 때, 마침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성희유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지으며 말했다.
“도유 씨. 아무리 가명이라고 해도, 도유 씨가 저를 친근하게 이름만 부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해내야 해요. 실종자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 도유 씨는 잘 알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시간이 너무 흐른 탓에 실종자들이 살아 있을 확률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가족은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못한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찾기를 바라며 덧없는 희망을 틀어쥐고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12살에 특수부 1팀에 들어와 많은 진창을 구른 도유는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실종자의 가족들이 얼마나 심적으로 괴로워하는지 잘 알았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 그럼 다시 해 보죠.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출발할 생각 마세요.”
“네. 강, 강우야.”
“다시. 요즘 시대에 자식에게 존댓말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강우야!”
“누가 그렇게 자식을 잡아먹을 것처럼 불러요?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손도 잡고요.”
직장 상사의 말은 절대적이다. 도유는 속으로 울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성희유를 몇 번이고 가명으로 부르고, 그의 명령대로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등의 ‘자상한 아버지’의 행동을 연습한 끝에 성희유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리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정도면 되겠죠 뭐. 제게 손을 뻗을 때나 손을 쥘 때 참나무처럼 뻣뻣하게 굳는 것만 신경 쓰시면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아직 마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도 잔뜩 지쳐 버린 도유를 한 손으로 토닥여 주며 성희유가 말했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 아빠!”
또래 아이답게 해맑은 웃음.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뱉어진 ‘아빠’라는 단어에 도유는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미소로 화답했다.
성희유를 아들로 대하는 것보다, 그에게 ‘아빠’라고 불리는 것이 제일 무서운 일이라는 건 이 직장 상사는 아마 절대 모를 거다.
도유는 충격으로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떨림을 억누른 뒤,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
과거 해 질 녘의 풍경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다 하여 이름 붙여진 천화 마을은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할 정도로 외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옛날에는 인구가 그나마 천여 명 안팎으로 유지되고 나름 그 고장에서 풍광이 좋기로 이름난 명소였지만, 인구가 급격히 도시로 빠져나가고 젊은 층의 유입이 거의 없게 되면서 현재는 1백여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대로 노후화되고, 잊혀진 채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만 남게 되는 게 아니냐며 마을 주민들이 걱정할 때였다. 한 사진작가가 이 천화 마을의 풍광을 찍은 것이 방송을 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외지인들이 조금씩이지만 천화 마을에 놀러 오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젊은 청년뿐 아니라 가족 단위로 놀러 오는 그들을 환영해 주었다.
이것이 입소문을 타며 외지인들이 점점 많이 찾아오고, 마을 주민 사이에서도 마을을 본격적으로 상업화시켜 보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을 즈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진짜 그거 생각만 하면 속이 이렇게 답답해. 죽겠어.”
허름한 구멍가게의 평상에 앉은 가게 주인이 가슴을 두드린다. 도유는 그런 가게 주인이 굉장히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요?”
“여기에 아들이랑 살러 왔다면서. 아무것도 몰라?”
가게 주인이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도유는 처연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본 가게 주인의 아내가 가게 주인을 퍽! 하고 때렸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이 양반아, 저렇게 어린 아랑 둘이서 이런 구석탱이에 살아 보려고 온 거 보면 모르겠수?!’ 하며 가게 주인을 힐난했다.
도유는 그 소리를 다 들었지만, 듣지 못한 척하고 열심히 음료수를 홀짝이는 성희유를 애틋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다시 가게 주인 내외를 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죄송합니다. 그저 먼저 떠난 아내가…. 이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온 게 전부라서요.”
이 마을에 들어오기 직전, 차 안에서 성희유가 각인시키듯이 했던 말들을 - 최대한 슬프고 처연한 웃음을 짓고 곤란할 때는 우는 척하라는 - 떠올리며 도유가 대답하자, 성희유가 한술 더 떠 음료수를 내려놓고 도유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아빠, 울지마.”
“강우야, 괜찮아. 아빠 우는 거 아냐.”
도유의 목소리가 떨렸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귀에 익숙하지 않은 성희유의 아빠라는 호칭과, 상사의 완벽한 어린아이 행세로 인한 거부 반응이었지만 가게 주인 내외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과연, 잘생긴 데다 훤칠한 젊은 청년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홀로 온갖 짐작을 하던 가게 주인 내외는 저들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곧장 반응했다.
“아이구야. 이렇게 젊은데 아를 내버려 두고 먼저 떠났어? 어째. 가여워서 이를 어째…. 상심이 많았겠으이.”
“괜찮습니다. 강우가 제 곁에 남았으니, 강우와 함께 오래오래 살아야죠.”
“그럼, 그럼!”
“오면서 보니 여기가 자연 친화적인 환경이라 몸이 약한 강우에게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다시 고민해 봐야겠네요.”
“안 좋은 일이긴 뭐! 아니, 안 좋기는 헌데! 우리는 관계가 없어!”
아내가 없다는 걸 알자 태도가 좀 많이 바뀐 듯했지만 도유는 기회를 걷어차는 대신 가게 주인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인지 알려 주시겠어요?”
다시금 반복된 질문에 가게 주인 내외가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몇 번 소곤소곤하더니 이내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도유 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주변을 둘러보는 척 눈을 굴리며 작은 목소리로 그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마을에 놀러 왔던 외지인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몇 년에 걸쳐 수십 명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지역이 발칵 뒤집혔다.
심지어 마을 주민이 실종자로 보이는 사람이 부패해 가는 몸으로 걸어 움직이는 것까지 목격하기 시작하자 외지인들의 걸음은 뚝 끊기고 조사를 나온 경찰들의 발걸음만 이어졌다.
처음에 마을 주민들은 괴기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두려운 현상에 겁에 질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협조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주민들이 하는 말을 전부 거짓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어떻게 시신이 걸어 다니며, 저녁도 함께 먹은 외지인이 어딜 갔는지도 모를 수 있냐며, 산골에 들어가는 걸 말리지 않았느냐며 마을 주민을 다그쳤다.
그러고는 최종적으로 실종된 이들이 자살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거라고 저들끼리 이야기를 맞췄다. 몸이 부패해 가는 사람이 산속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증언은 다 마을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꾸며 낸 이야기라며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