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도유는 헛된 희망을 담아 물었다.
“부자지간이라는 게 돈 많은 부자겠죠? 그렇죠?”
“도유 씨도 농담을 할 줄 아네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도유 씨가 일찍 아내를 여읜 젊은 ‘아빠’ 역할을 할 거고, 저는 당신의 금지옥엽 어린 ‘아들’ 역할을 할 거예요. 우리는 정착할 곳을 찾아서 그 마을에 여행을 간 거죠.”
“…….”
성희유에게 ‘아들아’라고 말하는 것보다 직장 상사에게 ‘아빠~!’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유는 기절하고 싶어졌다.
*
청신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날 이후부터 도유는 종종 그와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게 되었다.
본부에 들락날락하지 않는 날이 많았기에 자연히 도유의 집이 아닌 청신의 집이나 아카데미 근처의 숙소가 주로 그 장소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청신에게는 굉장히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얼굴에 꽃이 피셨습니다.”
대화를 나눌 때 좀처럼 불필요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은하의 말에 청신이 웃으며 답했다.
“이게 사랑의 힘이죠. 요즘 신혼 생활을 하는 기분이에요. 아, 정말 이러다 바로 결혼식부터 올리면 어쩌지?”
혼자서 이미 모든 단계를 건너뛰고 미래를 그리는 청신의 얼굴은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존재할지 의문일 정도로 아름답고 빛이 났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얼굴이었기에 은하는 기쁜 한편 불안해졌다.
현재 청신의 행복과 기쁨이 누구로부터 기인했는지 알았기에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하는 청신이 ‘바깥’에 나온 뒤부터 그의 곁을 지켰다. 그의 곁을 지키고, 그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기에 보았고, 알게 되었다. 처음 바깥에 나왔던 이청신이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이라는 건 언제 허무하게 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단어라는 것을.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본인과 그를 지지하는 이들도 노력하고 있었지만 가끔씩 그것이 유독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초조함을 누르지 못한 은하는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말을 입에 담았다.
“청신 님. 이제 의뢰를 받으셔야 하는 때가 아니십니까?”
“그렇긴 하죠.”
청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하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넘겼다. 단조로운 디자인의 웹사이트 화면에 떠오른 글 목록을 읽어 내려가던 그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슬슬 주기가 돌아오는데 아무런 이상이 일어나지 않아요.”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으셨습니까?”
“아직까지는요. 주기가 오기 전에 반드시 행했으니까요. 옛날에 도유 형이 그랬거든요. ‘사람이 많이 죽는 게 싫어.’라고요. 그래서 귀찮아도 꾹 참고 했죠.”
“폭풍 전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신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영연이는요? 소식이 없네요.”
“아카데미에서 보지 못하셨습니까?”
태블릿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걔가 아카데미에 있다고요? 그 머리로?”
비꼬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순수한 의문이 가득한 어조에 은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영연 씨는 청신 님께 그, 바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마법과 관련된 아카데미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인재입니다.”
“신입생 목록에 없었는데.”
“신분을 산 듯합니다. 제가 알기로 현재 3학년의 신분으로 아카데미에 재학 중입니다.”
“할 짓 없는 건 알았지만 자처해서 아카데미에 다닐 줄은 몰랐네요. 뭐, 상관없어요. 도유 형한테 접근만 안 하면 걔가 뭘 하든 상관없….”
청신이 아, 하고 짧은 신음을 흘리더니 이마를 감싸 쥐었다. 미인의 얼굴에 떠오른 짜증에 은하는 재빨리 그가 좋아하는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스스럼없이 마시고 속을 가라앉힌 청신이 말을 이었다.
“그 새끼 때문이었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서늘한 어조에 은하가 되묻기도 잠시, 청신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번 의뢰는 그걸로 하죠.”
자연스레 화면을 본 은하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곧 그는 표정을 지워 내며 청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 다시 뵈면 되겠습니까.”
이청신이라는 인간은 굉장히 바쁜 인간이었다.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뛰어나고, 아티팩트를 만드는 실력도 대단해서 그에게 수억을 넘게 주고 개인 의뢰를 넣는 이들이 많았다.
청신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의뢰들을 매년 한두 개씩 받으며 적당히 돈을 벌어 왔다.
그러나 최근, 명확하게는 서도유와 아카데미에서 거리를 좁히게 되자 ‘도유 형에게 평생 사치 부려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결혼 선물로 줘야겠어요.’라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더니 의뢰를 더 많이 받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이 이야기한 ‘의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어차피 도유 형이 오늘부터 성희유 팀장과 함께 임무를 나가서 할 일도 없거든요. 오늘 바로 만들죠.”
“……?”
“왜 그래요, 은하 형?”
청신이 고개를 갸웃한다.
“따라가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은하는 잠깐 둘러댈까 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유의 집에 초대받았던 날 이후로 달라진 청신의 행동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신은 시간만 비면 적극적으로 도유를 쫓아다녔다.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사역마로 집요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지금까지 특별하게 자신의 흥미를 끄는 이가 아니면 관심은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던 청신이 스토커 같은 행동을 하는 모습은 은하에게 있어 이제 낯선 것을 넘어 무서운 수준이었다.
과거, 청신도 눈에 띄는 외모와 매력 - 본인 말에 따르자면 - 때문에 그에게 홀린 불행한 이들로부터 스토킹을 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는 은하에게 한숨을 포옥 내쉬며 이렇게 말했었다.
‘아, 지겨워. 죽일 수도 없고…. 전 스토킹을 하는 사람의 심리는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대체 왜 스토킹을 하지? 더 없어 보이게.’
그랬던 청신이 현재 말로만 듣던 ‘내로남불’을 하고 있었다.
“따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도유 형이 지금 사역마로 지켜보는 것도 억지로 참고 있는데, 임무까지 따라오면 사적으로 만나는 시간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
결국 들켰구나. 와중에도 은하는 도유가 청신의 사역마를 눈치챘다는 것에 기함했다.
청신은 사역마들을 사용하는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자연물에 가까운 존재를 만들어 냈기에 들킬 확률이 거의 없었다. 그 희박한 확률을 깨고 도유가 청신의 사역마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은하는 마음 같아선 청신을 위해 도유에 대해 깊이 조사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청신의 손이 제 목을 틀어쥘 걸 알아서 그저 속으로만 앓았다.
이런 은하의 속을 전혀 모르는 청신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은하 형이 보조해 줘요. 주영연 그놈한테 나대지 말라고 언질도 좀 하고.”
“알겠습니다.”
은하는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의뢰’ 또한 많은 인명 피해를 낼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여느 때처럼 청신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제 역할에 임하기로 다짐했다.
*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는 차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도유는 혹시라도 차에 함께 탄 이들이 멀미하는 기색을 보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백미러로 눈을 굴렸다. 곧, 제 걱정이 괜한 기우였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뒷좌석에 앉은 이들은 멀쩡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특히 성희유는 손에 태블릿까지 들고 내용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도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복 차림의 성희유가 아예 낮선 것은 아니지만, 그 외형의 또래 어린아이처럼 최신 인기 캐릭터가 들어간 옷을 입은 그의 ‘어린아이다운’ 모습은 정말 낯설었다.
도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앞으로 있을 상황들을 떠올리니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이번 임무의 특성상 도유는 성희유를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물론 가명으로 부를 테지만 그래도 암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그보다 더한 게 하나 남아 있었다. 다시금 자각한 현실에 도유의 손이 달달 떨렸다.
“아무래도 산골 깊이 위치한 마을이다 보니,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입을 닫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커요. 그렇지 않아도 최근의 조사 때문에 주민들의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더 심해졌거든요. 백휘 씨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후방에서 지원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본디 성희유와 도유만 투입되었을 임무에, 어제 급하게 추가된 연백휘가 고개를 끄덕인다.
성희유는 흡족해하며 자기가 입은 티셔츠에 그려진 캐릭터와 똑같은 캐릭터가 그려진 샛노란 가방에서 초콜릿을 한 움큼 꺼내 백휘에게 건넸다. 백휘는 진중한 표정으로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도유가 그 모습을 착잡하게 보았다. 청신의 집을 급습했을 때 잠시 지원을 나왔던 백휘가 기존의 임무를 끝내고 무사히 복귀한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가 하루도 쉬지 않고 바로 작전에 투입된 것을 알았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미러 너머로 백휘가 도유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도유야, 왜 그래?”
부드러운 물음에 도유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