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도유 형….”
“이제 돌아가자. 조용환 씨를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 해.”
“형이 지금 한 고백은, 정말, 제가 평생 못 잊을 거예요.”
“…고백?”
“정말로, 진심으로. 제가 만약 치매에 걸려도 지금 형의 말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다 기억할 거 같아요. 아 이렇게 멋진 고백이라니….”
“……헛소리 그만하고 돌아가자.”
“정말 제가…. 이렇게-.”
“알았으니 빨리 이동시켜 줘. 아니면 나와 조용환 씨만 이동시키던가. 넌 여기서 머리 좀 식히고.”
청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도유는 이대로 두면 그가 끝도 없이 헛소리를 내뱉을 것 같아 손으로 입을 아예 막아 버렸다.
그 손길마저 좋다고 배시시 웃는 청신의 얼굴에 도유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 되었다.
*
어둠이 어둑어둑하게 내려앉은 밤. 청신은 제1팀의 사무실로 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하거나 숙소로 돌아간 터라 몇 개의 불만 켜 놓은 어두운 복도를 소리도 없이 걸어 나가는 청신의 모습은 광고 모델처럼 근사했다.
그러나 주말의 밤이라는 시간적 특성 때문에 타인이 봤다면 이 시간에 회사에 있는 것 자체로 청신을 가엾게 여겼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약 두 시간 전까지 청신과 함께 야근을 하다가 먼저 퇴근한 도유가 측은해하며 청신을 보았겠는가?
오늘 저녁, 청신과 도유는 카단 본부로 출근해 이번 ‘무미아 사건’의 일을 완전히 종결시키고 보고서를 써서 제출했다.
원래대로라면 보고서를 제출하고 바로 퇴근해야 함이 옳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보고서를 훑은 성희유가 청신을 지목해서 추가로 자료를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도유와 함께 퇴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힘내.’
도유는 가차 없이 청신을 버리고 퇴근해 버렸다.
청신은 야근에 별생각이 없었고 저를 응원해 주는 도유의 모습조차 앙큼하고 깨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서 기분이 잠시 좋아졌지만, 도유가 퇴근하는 모습을 보자 서글퍼지고 말았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갑작스레 들어온 부가적인 서류 업무에 시달려 기운이 쭉 빠진 도유는 정말, 파도에 정처 없이 흔들리는 미역처럼 흐느적거리며 퇴근했다.
청신은 그 모습을 보며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때 도유를 집에 데려다주거나, 제집으로 납치해서 맛있는 걸 먹여 주고 씻기고 껴안고 진득하게 키스를 하면 받아 줄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내려 준 기회를 이렇게 놓치니 어찌 서글프지 않을 수 있을까.
똑똑똑.
벌컥.
“이런. 굉장히 화가 나셨군요.”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제 마음대로 문을 열어젖힌 청신의 모습에 성희유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
청신이 팀장실로 들어와 문을 닫자 잠금장치가 저 혼자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이 오늘을 골랐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성희유 씨.”
“이해해 줘요. 지금이 아니면 당신과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어려워서요. 앉아요, 청신 씨.”
청신이 자리에 앉자 성희유가 직접 차를 내왔다. 녹차였다. 입맛이 까다로운 청신이 유일하게 예의를 차릴 때 그나마 마시는 차였다. 성희유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지금은 입맛이 변했을까요?”
“비슷할 것 같은데, 성희유 씨는 달라졌나 봐요.”
흘끗, 하고 청신의 녹색 눈이 성희유가 제 몫으로 준비한 음료수로 향했다.
거리가 있음에도 코에 스며든 단 향이 딱 도유 취향이었다. 단것과 맛있는 걸 좋아하는 도유의 모습을 떠올린 청신은 다음에 기필코 제가 만든 것을 잔뜩 먹여 주리라 다짐했다.
“저는 단걸 선호하지는 않지만, 혹시나 나중에 ‘이 아이’가 돌아왔을 때 입맛에 영향이 갈까 봐 맞추고 있어요. 쓴 걸 못 먹고, 단걸 많이 좋아하던 애였거든요.”
성희유의 어린 얼굴에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제 몫으로 가져온 음료수를 한 번 홀짝이고 내려놓았다.
“당신과 만나는 건 그날 이후로 처음이죠. 그 작았던 애가 정말 많이 컸어요.”
“그러는 성희유 씨에게는 작아지셨다고 해야 할까요?”
성희유는 웃고 말았다. 어릴 때도 ‘작다’는 말에 유난히 민감했던 청신을 알았기에, 여전히 똑같은 반응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성희유는 웃느라 음료수를 흘릴까 컵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청신 씨가 준 마법의 결과니까요. 이 애를 살릴 수 있다면, 저는 제 몸 따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요.”
표정은 온화했지만 목소리는 곧았다. 청신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성희유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성희유의 등 뒤편을 보았다.
오롯이 청신과 성희유의 눈에만 보이는 공간. 잠시 물끄러미 그것을 보던 청신은 성희유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일단은 당신도 무사한 듯하네요.”
“네, 이 또한 청신 씨 덕분이죠. 평생에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어요.”
“…….”
“청신 씨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청신 씨의 근황이야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 아카데미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이번만큼은 무표정했던 청신의 표정이 달라졌다. 청신은 기가 찬 표정으로 성희유를 노려봤다.
“‘그 작았던 애’가 저라는 걸 알면서도 저를 급습하라는 명령을 내린 거군요?”
“청신 씨가 도유 씨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빚 하나 지게 할 겸 어울려 드렸죠. 봐요, 덕분에 도유 씨의 곁에 합법적으로 붙어 있을 핑곗거리도 얻었잖아요?”
“성희유 씨가 돕지 않았어도 도유 형은 제게 넘어왔어요.”
청신은 아카데미에서 도유를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새끼 곰같이 귀여운 분장을 한 도유가 상체를 웅크리고 신입생들에게 설계도를 보여 주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뒤집혔는가.
마치 청신의 인내를 시험하듯 제게만 찾아오지 않았던 도유에게 제 발로 찾아가니, 그제야 사랑스럽게 웃어 주고 예쁜 목소리로 예쁜 말만 골라서 해 주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본인은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청신 씨. 도유 씨는 청신 씨 같은 성격을 많이 거북해해요. 그 상태로 두 달만 지났으면 먼저 도망쳤을 거라고 장담하죠.”
“형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청신의 눈빛이 조금 몽롱하게 바뀌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조용환과 도유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을 때, 도유는 청신의 기준으로 청혼을 했다.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말보다 더 달콤하고 든든한 말을 도유가 해 줬다.
‘물론, 네 지금의 파트너는 나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거지만.’
넌지시 하는 말이 쑥스러웠는지 살짝 달아오른 뺨, 헝클어진 연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고 별의 강이 흐르는 밤하늘처럼 밝은 푸른색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도유.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당장 도유에게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어여뻤다.
“…조용환 씨가 한 시간 전에 사망했다더군요. 사형은 면했으니 다행이죠. 고인을 보내는 건 그의 가족들이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성희유는 도유가 작성해서 올린 보고서를 가져와 화제를 전환했다. 도유를 주제로 계속 이야기했다간 청신이 계속 저 상태일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팔락팔락. 성희유의 손이 도유가 반쯤 앓으며 필사적으로 쓴 보고서를 넘긴다. 생각에서 빠져나온 청신은 제가 작성해 온 추가 자료를 넘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애초에 그게 성희유가 저와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 만든 핑곗거리라는 걸 알았기에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여기에 온 거였다.
“청신 씨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어떤 의미죠.”
“범법자의 마법이 일으킨 ‘변이’ 현상이 나타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예요. 슬슬 힘에 부치는 거면 말해 줘요. 저도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청신이 멈칫하며 성희유를 보았다.
“…첫 번째가 있다고요?”
“네. 첫 번째는 도유 씨의 부모님이었어요. 양부모지만.”
“…….”
청신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깊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제 몫의 녹차만 노려보았다. 성희유는 느긋하게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제 몫으로 가져온 음료수를 마셨다.
“도유 형이 특수부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들어서 알았지만… 왜 그런 표정이시죠?”
내내 여유로웠던 성희유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가득한 걸 보고 청신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성희유는 얼떨떨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도유 씨가 직접 말했다는 게 의외라서요. 매번 보고할 때마다 당신 이야길 하긴 했지만 벌써 그것까지 말해 줬을 줄이야.”
“당장 보여 주시죠.”
주어가 없었으나 성희유는 알아들었다. 그는 미리 인쇄해 두었던 짤막짤막한 보고들이 담긴 파일철을 넘겼다.
청신은 곧장 파일철을 열고 도유가 올린 보고들을 읽었다.
“풋.”
청신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청신이 아침부터 토스트를 만들어 왔습니다. 야채와 베이컨과 소스만 들어갔는데 모든 게 완벽한 맛이었습니다. 후식으로 딸기를 먹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먹은 딸기는 딸기가 아니었나 봅니다. 아니면 이청신이 뭔가를 넣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청신과 아티팩트에 새길 마법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