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침묵. 기나긴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애욕의 격정에 빛나던 녹색 눈이 어두워진다. 도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벗겨지기 직전이었던 제복을 서둘러 여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중에 청신이 막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청신은 가만히 있었다. 제복의 단추를 전부 여미고 재킷까지 단단하게 잠글 때까지 청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유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도유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이청신… 님?”
도유는 숨을 들이켰다. 달빛 아래, 아름다운 미인의 눈에서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을 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관능적으로만 보였던 모습은 조용히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 한 줄기로 인해 순식간에 처연하고 슬픈 애처로운 인상으로 바뀌었다.
분명 저 육체는 건강하기 그지없는 탄탄한 남성의 몸이건만,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아찔함까지 존재하는 까닭에 도유는 당황하고 말았다.
“왜, 왜 우십니까?”
“지금까지 저를 가지고 놀았던 거예요?”
“네? 제, 제가요?”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유는 당황해서 눈만 껌뻑거렸다.
“제게 꽃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던 것도,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서 한 것도, 제가 만져도 기꺼이 몸을 내맡겼던 것도 모두, 제가 선배를 사랑하는 걸 알고서 이용하려고 연기했던 거예요?”
“예??”
“제가 용의자라고 생각해서, 증거를 확보하려고 제 마음을 가지고 놀았던 거냐고요.”
미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그러나 녹색 눈은 살의가 아닌 상처 입은 사람 특유의 비참함을 담았다. 그리고 도유는 그런 눈빛에 약했다. 도유가 청신 쪽으로 다가갔다.
“잠, 잠시만요. 이청신 님. 저를 사, 사랑한다고요?”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어색한 단어였다. 그 정도로 도유는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거나 입에 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동시에 그 단어를 담아 질문을 내뱉은 순간, 대답보다 먼저 돌아온 청신의 눈빛에 도유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네, 사랑해요, 도유 선배.”
“…! 그만, 그만 우십시오. 제가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용의자가 피해자를 꾀어내기 위한 방법이라고만 생각했, 죄송합니다!”
뒷말을 하자마자 청신의 눈에서 다시금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목격한 도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청신이 그런 도유를 껴안았다. 도유는 제 어깨에 턱을 올리는 청신의 행동에 그를 밀어 내고 싶었지만 제가 죄인이었기에 얌전히 청신을 마주 안아 주며 그만 울라는 뜻을 담아 등을 토닥였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언제 울었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야릇한 미소를 짓는 청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청신을 달래고 집 밖으로 나오자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성희유와 바로 마주쳤다.
“벌써 끝났나요? 혹시나 해서 차폐 마법까지 걸어 드렸는데, 좀 더 즐기시지 않고요.”
“팀장님!”
“농담입니다.”
전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도유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따지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죄인이었다. 최고 직장 상사인 협회장의 아들을 범인으로 오인해서 체포하려고 한 죄가 너무나 무거웠다.
도유는 자기 때문에 발생한 인력 낭비와, 앞으로 타 부서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특수부를 비웃을 것을 떠올리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특수부 사람들 중에 그만큼 타 부서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그들의 원망이 제게 오면 얼마나 우울한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지쳤다.
“그럼 본부로 가죠, 도유 씨. 협회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 말에 도유는 지나가는 길에 강물에 뛰어들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성희유가 동행하는 한 실패할 게 뻔했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없이 걸었다.
그러다 바닥에 있던 뭔가에 걸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무방비한 상태에, 짧은 시간에 일어난 사달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중심을 잡지 못했다.
도유는 무력하게 쓰러지며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바닥에 머리나 박고 기절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도유의 소원은 강하게 제 몸을 붙든 손길에 의해 저지당했다.
“괜찮아?”
“휘야….”
특수부 제1팀의 마법사 중, 가장 악명 높은 마법사이자 도유의 선배나 다름없는 연차의 연백휘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도유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왜 가만히 있었냐’라고 탓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아 줘서 고마워.”
“그렇게 걱정하지 마.”
연백휘의 말에 도유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작전에 가장 멀리서 대기하고 있었을 이 무뚝뚝한 동료가 굳이 여기까지 걸음한 이유가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임을 알았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적으로는 곁을 내어 주지 않고 거리를 두지만 업무와 관련되어서는 도유를 잘 챙겨 주고 실책에 따듯한 위로를 해 주는 게 바로 연백휘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나 때문에 미안하다. 넌 임무 도중에 온 거잖아.”
도유가 완전히 중심을 잡고 서며 말하자, 백휘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바로 가 봐야 해. 그럼 나중에 봐.”
“응. 조심히 다녀와.”
백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코와 입을 가린 복면 때문에 입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와 마찬가지로 일순 그가 웃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색이 한결 나아졌군요.”
본부로 향하는 차에 타니 백휘와 도유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미리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성희유가 말을 걸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초코 맛 과자가 들린 것을 발견한 도유가 흠칫하며 눈을 굴렸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지금의 성희유를 본다면, 그냥 어린아이의 모습인 그의 외형만 보고 ‘애가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를 먹나 봐. 귀여워라.’라며 그저 흐뭇하게 볼 뿐이겠지만 진실을 아는 도유는 좌불안석이나 다를 바 없었다.
사복이 아니라 카단의 제복을 입은 성희유가 초코 맛 과자를 먹는 건 굉장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심기가 좋지 않은 원흉은 필시 도유 때문일 게 뻔했기에, 도유는 울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얌전히 운전대를 잡았다.
과자를 씹는 소리가 뒷좌석에서 들려오자,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운전을 시작하면 듣지 못한 척할 수 있었지만 출발하라는 명령 없이 과자 씹는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를 견디지 못한 도유는 석고대죄하는 죄인의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정말 죄송합….”
“도유 씨.”
와삭와삭 과자를 씹던 소리가 사라졌다.
“네.”
“분명히 말하지만 도유 씨가 죄송하다고 머리 숙일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오해해서….”
“도유 씨가 오해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제출한 자료는 카단이 움직이기에 충분히 합리적인 증거였어요. 그리고 이번 작전을 실행하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실행한 건 접니다. 제 잘못이고, 제가 책임을 지는 게 옳은 일입니다.”
“팀장님….”
“분명하게 다시 말하죠. 도유 씨는 죄스러워할 필요도, 고개 숙일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협회장님께 인사를 드릴 땐 숙여야 하겠지만요.”
뒤돌아보자 어린 얼굴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성희유의 말이 옳다는 건 알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건 사실이었다.
도유는 다시 초코 맛 과자를 먹기 시작한 성희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물었다.
“출발할까요?”
“아. 아직 출발하지 마세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몰랐지만, 적당히 팀원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한 도유는 얌전히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기다렸다.
성희유의 단호한 말 덕분에 좌불안석에서 금방 편안한 자리가 되었다.
협회장에게 호출당한 건 두려웠지만, 그래도 카단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는 조금은 마음의 긴장을 풀어도 된다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차를 향해 다가오는 이의 얼굴을 발견한 도유는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가 제 실책을 눈치채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겨우 떼어 놓고 왔던 청신이 왜 저렇게 멀끔하게 차려입고 이 차를 향해 다가오는 걸까?
도유는 청신이 그냥, 밤잠이 달아나서 산책 겸 나온 것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헛된 꿈에 불과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뒷좌석이 아니라 조수석에 앉은 청신은 연인에게 말을 걸듯 다정하게 물었다. 도유는 쭈뼛거렸다. 뒤에서 또다시 아작아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희유가 과자를 먹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도유는 불에 데인 사람처럼 눈에 띄게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다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팀장님, 팀장님이 말씀하셨던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이청신 씨가 맞습니까?”
“도유 선배, 제가 이청신 씨라고 한 번만 더 말하면 그냥 박아 버리겠- 읍.”
“도유 씨,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요.”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성희유의 육신이 어린아이의 것이라 하더라도 정신은 도유보다 더 나이가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청신의 입을 막을 필요는 없었지만, 도유는 타인의 앞에서 듣기에 민망한 말을 당당하게 하는 청신의 입을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