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구경꾼들 앞에서 하는 게 취향인 줄 알고 내버려 뒀는데, 아니었나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저것들은 뭐예요?”
청신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감싼 분위기가 달라졌다. 처음으로 느끼는 위압감에 버둥거리던 도유마저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성희유는 태연히 웃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청신 씨. 저는 카단의 특수부 제1팀 팀장, 성희유입니다.”
그 증거라는 듯 성희유의 앞에 마법으로 이루어진 카단의 문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팀장들만 할 수 있는 고유의 마법이었다. 명확한 증거.
청신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성희유를 노려보았다. 도유를 볼 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곱지 않은 시선은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듯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성희유의 뒤에 서 있던 팀원들이 긴장하는 것이 도유의 눈에도 보였지만, 성희유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저희 쪽에서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청신 씨를 여러 사건에 연루된 범법자로 오해하여 체포하려고 했습니다만, 바로 조금 전에 이청신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연락을 협회장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카단은 무능하네요.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나중에 또다시 의심되면 지금처럼 남의 집에 불법 침입하고, 문도 부수고, 결계도 건드리고,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면서 급습할 텐데?”
비아냥이 청신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 말에 성희유의 시선이 잠깐 청신의 밑에 깔린 도유에게, 아니 명확하게는 도유를 만지고 있는 청신의 손에 닿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은 이 순간에도 착실하게 도유의 몸을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다. 손이라도 멈추고 말하면 신빙성이 있었을 텐데 대놓고 즐기고 있는 주제에 말은 청산유수다.
그러나 성희유는 팀장이었다. 청신의 말이 이상하다는 걸 지적하는 대신에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불쌍한 도유가 분명하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일로 일어난 모든 손해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배상하겠습니다. 카단 협회장님의 아들이신 이청신 씨의 정보가 철저하게 보호되어 있어, 이런 일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은 없을 것입니다. 거듭 사죄드립니다.”
성희유의 입에서 나온 ‘협회장 아들 이청신’이라는 말에 도유는 숨을 크게 삼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주마등처럼, 일주일 전에 청신 몰래 들어갔던 서재에서 본 사진 속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까.
‘가엾구나. 너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청신이 어머니라고 했던 사진 속 그 여성은 분명히 도유가 12살에 사형수에서 벗어나 성희유의 손을 잡고 카단 본부에 갔던 날, 딱 한 번 봤던 카단 협회장의 얼굴이었다.
도유는 진지하게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그동안 도유는 정보부가 줬던 청신의 정보가 어떻게 그렇게 ‘깔끔’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청신이 협회장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의문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야 깔끔할 수밖에 없겠지. 도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단의 협회장 아들이라면 정보 조작을 하면서까지 신변 보호를 하는 게 당연하니까!
도유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여전히 제 위에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청신을 올려다보았다.
청신은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성희유를 노려보고 있었다.
와중에도 손으로는 착실하게 제 몸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는 청신의 손을 보고 정말 이놈이 불쾌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저희는 원상 복귀를 마치는 대로 이만 철수하겠습니다. 이청신 씨의 수면 시간을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성희유가 정중하게 말했다. 도유는 희망을 품었다.
일단 협회로 불려 가면 시말서를 작성하거나 벌을 받을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제 팀원들 앞에서 협회장 아들 아래 깔려 있는 모습보단 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신은 쯧, 하고 혀를 찼을 뿐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수면 시간’을 방해했다고요?”
도유는 청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왜 갑자기 나를 보는 건데. 성희유의 시선도 청신을 따라 도유에게 향했다.
도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격렬하게, 굉장히 창피했다. 반쯤 흐트러져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하필 성희유다. 성희유가 제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도유는 울고 싶어졌다.
“정정하겠습니다. ‘연애 사업’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끝나면 말씀해주시죠.”
“팀장님-!”
자신을 구해 줄 줄 알았던 성희유가 배신을 하자, 도유는 절박하게 성희유를 불렀다. 멀뚱히 상황을 구경하던 팀원들을 먼저 내려보낸 성희유가 도유를 돌아봤다.
“도유 씨도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즐기다 와요.”
아이의 얼굴 위로 사람 좋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걸 본 도유는 성희유가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저런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배신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모든 난리가 자신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고, 성희유와 팀원들은 자신을 믿어 주다가 휘말린 것뿐이다.
원인이자 원흉인 자신이 청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지 않고 본부로 간다면 더 큰일이 벌어질 것임을 알기에 성희유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한 번은 예의상 구해 주는 척이라도 하면 안 되나? 도유가 속으로 울먹이고 있을 때, 청신이 도유의 귓가에 은밀한 어조로 속삭였다.
“드디어 방해꾼이 갔어요, 선배. 이제 우리 둘뿐이에요.”
소름 끼치는 말에 도유가 숨을 삼켰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청신 씨, 방금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카단 특수부 제1팀 소속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청신 씨를 급습했던 겁니다. 제가 한 오해로 이청신 씨가 피해를 입게 된 이상, 읍!”
“왜 이렇게 딱딱하게 말해요, 선배. 서운하게.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청신아’라고 불러 줘요. 응?”
입을 막은 손이나 치우고 지껄이면 덜 짜증 났을 것이다. 와중에 다시금 입술을 제 가슴팍에 붙이는 청신의 모습에 도유는 경악했다.
달빛으로만 채워진 방 안, 그 위에 훤히 드러난 제 가슴 위에 입술을 대는 미인의 얼굴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혹할 정도로 굉장히 색정적이고 관능적으로 보였다.
“역시 도유 선배 체향이 제일 좋아요. 삼키고 싶어.”
“……!”
가슴팍에 느껴지는 청신의 숨결에 도유의 몸이 크게 떨렸다. 도유의 입을 막았던 손이 사라졌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잠, 잠시만요, 이청신 씨-.”
“한 번만 더 이청신 씨라고 하면 바로 박아 버릴 거예요.”
무엇을, 어디에. 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도유는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 돌연 청신이 도유의 얼굴을 보더니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불길함을 느낄 즈음, 청신이 상체를 들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아래로 내려오던 청신의 입술이 치워진 건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방심했다.
“선배 원래 머리카락 색, 연갈색인가요? 너무 예쁘다. 검은색 머리카락도 잘 어울리지만, 연갈색이 더 잘 어울려요.”
그렇게 말한 청신이 도유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도유의 몸을 만지던 손은 부드럽게 휘감기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쓸었다.
손길만으로도 애정을 느낄 수 있다면 지금의 청신의 손길이 그러한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제 반응을 하나하나 보면서 즐거운 듯 웃는 청신의 얼굴과 듣기 좋은 미성에 도유는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겁먹었다.
이윽고 제 입술에 입술을 붙이려는 청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막아 내기 위해 손을 들었을 때, 도유는 침대에 딱 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던 손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깨닫자 도유는 곧바로 행동했다. 자신을 다 잡은 먹잇감으로 보고 방심하고 있던 청신의 손을 잡아 그대로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신은 도유의 행동을 예측했다는 듯 대응했다. 저를 걷어차려던 무릎을 한 손으로 잡아 누른 후 그 위에 무게를 싣고 손을 꺾어 쥐려던 도유의 손을 잡아 그대로 깍지를 끼고 침대에 다시 누른 것이다.
“이런 거친 플레이 좋아해요? 어쩌지. 난 취향 아닌데.”
“이거 놓으십시오! 저는 정말 당신과 잘 생각이 없습니다!”
여전히 놓아줄 기세가 아니다. 도유는 쌍욕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잘 들으십시오. 저는 당신을 여러 사건과 얽힌 용의자로 보고 당신에게 장단을 맞췄던 겁니다. 분명하게, 다시 말합니다. 저는 이청신 씨… 는 아니고 이청신 님과 이런 사적인 관계를 맺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청신 씨라고 하면 바로 박아 버리겠다는 말을 떠올리고 서둘러 호칭을 정정한 도유는 최대한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제 위에 올라탄 청신을 올려다보았다.
협회장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되자 차마 쌍욕을 할 수 없어 눈으로만 욕했다.
청신이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가만히 도유를 내려다봤다. 시선이 길게 오갔다.
도유를 제압했던 청신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이윽고 청신이 도유의 위에서 내려와 그대로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