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지나쳐 올 때 확인한바 거실과 주방의 거리가 조금 있었고, 서로 보이지 않는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도 이미 알았다.
도유는 곧장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혼자 사는 건 알았지만 지나치게 심플한 공간이다.
사람이 살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있는 삭막함. 도유는 몇 분 동안 주변을 둘러본 뒤, 청신의 기척이 계속 주방에 머무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척을 지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계단을 하나라도 밟는 순간 청신이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기에 도유는 최대한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선에서 움직였다.
복도에는 그림만 몇 점 걸려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닫혀 있는 방문들은 하나같이 각각 다른 결계 마법이 쳐져 있었다. 어떤 것은 속성 마법까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한 도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다 복도의 끝, 열려 있는 문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기이하게도 이 방에는 결계 마법은커녕 그 어떤 마법도 걸려 있지 않았다. 여기라면 들어갈 수 있다. 도유는 방에 들어가기 전 만약을 대비해 뒤로 돌아 제가 지나온 쪽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기척도 없었다.
좋아.
속으로 중얼거린 도유는 소리도 없이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벽면을 꽉 채운 책이 보였다. 방 가운데에는 책상과 의자가 하나 있었다. 딱 봐도 서재용으로 만든 방이다. 도유는 잠시 책장에 꽂힌 책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한쪽 벽면의 책장에는 마법과 관련된 서적이 꽂혀 있고, 그 반대쪽 책장에는 의학, 식물학, 철학, 인문학, 사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많은 책들이 질서 정연하게 꽂혀 있었다.
특별한 건 없어 보였다.
책장에서 시선을 떼고 도유는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액자가 보였다. 걸음을 옮겨 액자에 꽂힌 사진을 보았다.
어린 청신이 활짝 웃으며 한 여성에게 안겨 있는 사진이었다.
‘어렸을 땐 잘생기진 않고 엄청 예쁘고 귀여웠네.’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린 도유는 스스로가 한 생각에 경악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생각을 떨쳐 냈다.
미쳤지, 내가.
하도 청신이 도유에게 대놓고 ‘저 예쁘죠? 잘생겼죠?’ 이러면서 치대는 까닭에 어휘가 퇴화하고 말았다.
…물론 청신이 보기 드문 미인인 것은 인정했지만 지금은 임무 중이기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도유는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사진을 살폈다.
“이상한데….”
정말 이상했다. 청신을 껴안고 웃고 있는 여성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이었으나 곧장 떠오르지 않아 답답할 지경이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사진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던 때였다.
“선배.”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든 순간, 문가에 서 있는 청신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똑같은 나긋한 미성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유는 빠르게 청신의 표정을 살폈다. 청신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도유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평소와 똑같아 보였지만, 이곳에 드리운 희미한 어둠 덕에 차이가 명확히 느껴졌다.
녹색 눈에 스민 안광. 몸이 굳을 정도로 서늘한 안광에 도유는 숨을 삼켰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미, 미안해.”
“왜 사과를 해요?”
“화장실을 찾았는데, 문이 다 닫혀 있길래…. 여긴 열려 있어서, 화장실이 있을 줄 알았거든. 미안해.”
도유는 정말 미안해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손을 모았다.
잔뜩 주눅 든 사람의 흉내를 내려던 거지만 본의 아니게 붕대 감은 손을 청신의 앞에서 움켜쥘 뻔했다. 직전에 손에서 힘을 풀었다.
흘끗 보니 청신은 여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도유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러기도 잠시, 그가 안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청신이 다가왔다. 그는 도유를 그대로 지나쳐 액자를 그대로 엎었다. 마치 도유가 보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처럼.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도유가 겪어 온 청신이라면 ‘저는 어릴 때도 예뻤죠?’라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치근덕거렸을 텐데, 이렇게 대놓고 거부하는 걸 보니 의아했다. 도유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사진 봐서 미안한데…. 사진에 있는 거, 너 어릴 때야? 옆의 분은 어머니셔?”
“네. 그보다 선배, 화장실에 데려다 드릴게요. 이리로 오세요.”
“…고마워.”
도유는 청신이 사진에 대해 말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더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곧바로 청신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청신은 도유를 화장실 앞까지 안내해 준 뒤, ‘도와드릴까요?’ 하는 망언을 내뱉고 쫓겨났다. 홀로 화장실에 남은 도유는 뿔테 안경을 벗고 미간을 검지와 엄지로 꾹꾹 눌렀다.
모른 척해 준 것인지 정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성격이었더라면, 조금만 더 연기를 못했다면 청신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평소와 같은 태도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도유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안경을 썼다.
‘정신 차리자.’
스스로에게 중얼거린 후,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청신은 도유가 거실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주방으로 안내했다. 도유는 식탁에 차려진 밥상을 보고 놀랐다.
“죽 끓인다고 하지 않았어?”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는데 모처럼 온 첫 손님에게 죽만 먹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선배는 먹을 거 좋아하니까, 다양하게 드셨으면 해서 당장 차릴 수 있는 걸로 차려 봤어요.”
당장 차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종류도 종류였지만 푸짐하기 그지없었다. 죽은 그냥 애피타이저로 보일 정도였다. 얼떨떨해하는 도유를 의자에 앉히고 청신이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어서 먹어요, 선배.”
그렇게 말하면서 당장 도유에게 직접 떠먹여 줄 준비를 하는 청신을 본 도유가 마스크를 벗으며 질색했다.
“네 친절은 고맙지만, 나 혼자 먹을 수 있어.”
“선배 오른손잡이인 거 알아요. 젓가락질할 수 있겠어요?”
“나 양손잡이라서 괜찮아, 청신아.”
한때 잠입 임무를 하고 싶어서 온갖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연습을 거듭하여 양손잡이가 되었다. 왼손으로 하는 젓가락질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쉽네요. 그럼 천천히 드세요.”
“너는 안 먹어?”
“저는 이 시간에는 안 먹어요.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못 먹어.”
청신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여 결국 도유는 포기하고 제일 먼저 죽을 한 입 먹었다. 눈이 저절로 커졌다. 소고기와 야채를 넣은 죽이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맛있어서 놀라웠다.
도유는 죽과 함께 차려진 다른 요리들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무엇 하나 뒤떨어지는 것 없이 도유의 입맛에 잘 맞았다.
잘 맞는 걸 떠나 굉장히 맛있었다. 열심히 먹기 시작하는 도유의 옆모습을 보며 청신이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선배는 옆에서 봐도 너무 예뻐요. 뽀뽀해도 돼요?”
“콜록!”
마침 물을 마시던 때라 그대로 목에 걸렸다. 도유가 황급히 티슈를 찾으며 손을 뻗자 청신이 눈치 좋게 티슈를 대신 뽑아 도유에게 건네주며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에 불길함을 느낀 순간 청신이 다시 말했다.
“우리 이러니까 신혼 같네요. 그렇죠, 도유 선배?”
“콜록콜록!”
얹힌다. 이건 무조건 얹힌다. 도유는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모습조차 예쁘다는 뜻을 담아 그윽하게 바라보는 청신을 보며 본능적으로 느꼈다. 청신은 부드러운 손길로 도유의 등을 토닥였다.
“천천히 드세요.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만들어 드릴 테니까.”
말마따나 혼자 신혼을 만끽하는 청신의 어조에 도유는 그냥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
도유가 청신의 집을 떠난 건 저녁이었다. 청신이 도유에게 자고 가라며 엉겨 붙었지만 도유는 매몰차게 청신을 떨쳐 냈다.
“이 이상 네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신세라뇨, 선배. 우리 사이에.”
“나 갈게. 내일 봐.”
이제 청신을 다루는 데 어느 정도 도가 텄는지, 또 슬쩍 손을 잡아채려는 손을 밀어 내고 도유는 그렇게 떠났다.
역 앞까지라도 바래다주겠다는 권유도 거절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유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청신은 현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음.”
청신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손에서 도유의 냄새가 났다.
나무를 닮은 냄새. 따로 향수를 사용하는 것 같진 않은데 도유에게 달라붙을 때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나서 신기했다.
어떤 때는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음식처럼 식욕을 자극하는 그런 유의 냄새가 아니었다. 당장 이를 박아 넣고 그대로 짐승처럼 천박하게, 탐하고 싶은 그런 냄새였다.
청신은 그대로 제자리에 선 채 눈을 감고 오늘 실컷 만지작거린 도유의 탄탄한 몸의 감촉과 체향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보내는 대신 침실에 묶어 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겁 많은 새끼 호랑이가 구석에 숨어 버릴 것임을 잘 알기에, 차라리 제게 푹 빠지게 만들어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이 나았다.
청신은 도유를 유혹할 자신이 있었다. 가만히 보면 도유는 은근히 제 얼굴에 약했다. 눈시울을 적시며 애교를 부리면 곧잘 넘어오는 모습이 깨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