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기쁜 듯 활짝 웃는 윤원을 보며 도유는 마스크 아래로 씁쓸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윤원은 도유의 소문을 아직 듣지 못한 듯했다.
본부로 돌아가게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고, 이런 친근한 행동이나 권유를 하기는커녕 타 부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를 혐오스러워하거나 두렵게 쳐다보게 될 것이다.
윤원이 제게 더 호감을 가져서 배신감을 느끼게 되기 전에 제 입으로 말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도유는 같은 직장 사람에게, 그것도 타 부서 사람과 이런 ‘평범한’ 대화를 하는 게 오랜만이었기에 지금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침묵을 선택했다.
*
주말이 끝나고 되돌아온 평일. 윤원은 아카데미로 가기 위해 협회에서 제공해 준 숙소 문을 열자마자 보인 얼굴에 심장 마비에 걸릴 뻔했다.
“안녕, 이윤원 학생.”
감미로운 미성이 귓전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윤원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인이 빙긋 웃는다.
그 때문에 아예 문을 닫고 집으로 다시 들어갈지, 아니면 지원 요청을 할지 알 수 없게 된 윤원은 얼어붙어서 제집 앞까지 찾아온 청신을 멍하니 보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시간 돼?”
“아…. 이야기요?”
안 된다고 하면 죽여 버릴 기세다. 웃고 있지만 저를 보는 녹색 눈을 보며 윤원은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와중에 자기가 ‘카단 협회 정보부 제2팀 이윤원’임을 ‘범법자’에게 들킨 것인지 고민했다. 대체 왜, 이청신이 제집 앞까지 직접 찾아온 걸까? 아카데미에서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카단 쪽의 신분이 들킨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응. 짧게 이야기할 거야. 어차피 아카데미에 가는 길일 테니 겸사겸사 데려다줄게.”
그렇게 말하며 청신이 턱짓한다.
흘끗 그의 뒤를 보니 움직이는 집값이라는 소문이 붙은 자동차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청신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지만 기업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일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런 걸 끌고 다닐 줄은 몰랐기에 윤원은 입을 떡 벌렸다.
“응? 이윤원 학생.”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단호했다. 윤원은 마법사였지만 전투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정보 수집에 특화된 비전투형 마법에만 재능이 있는 터라 청신이 이렇게 나오면 저항할 힘도 없었다.
“핸드폰. 만지지 말고.”
혹시나 해서 카단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하려는 찰나 청신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윤원은 숨을 삼켰다. 카단에서 투입된 잠입 요원이라는 걸 들킨 게 분명했다. 이제 저 차에 오르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선배님. 선배님이 맞았습니다! 솔직히 상부에서 도유 선배님이 이청신 씨를 범법자로 의심 중이란 걸 보고서 ‘얜 무슨 헛소리야?’라고 하며 아무도 신경 안 썼는데 진짜 범법자였어요!!’
속으로 외치며 윤원은 핸드폰을 결국 내려놓았다.
“네가 지금 도유 선배에게 연락하는 걸 보면 못 참을 것 같거든.”
“…네?”
윤원은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카단의 이름이 아니라 도유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타.”
이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싫다는 듯, 분명한 어조로 말한 청신의 말에 윤원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조수석에 앉았다. 그러자 청신이 바로 차에 타고 차를 출발시켰다.
청신은 출발을 하고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윤원은 제가 이대로 외진 곳에 끌려가 암매장이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점점 차가 아카데미로 향하는 익숙한 길에 들어서자 놀라서 청신의 옆얼굴을 보았다. 신호에 맞춰 차가 멈춰 섰다. 청신이 그제야 말했다.
“토요일에 도유 선배랑 영화 봤지? 보다가 도중에 빠져나갔고.”
“보, 보고 계셨어요?”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
청신이 생긋 웃으며 윤원을 보았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향했지만, ‘네’라고 대답했다면 ‘ㄴ’의 발음을 하는 순간 청신이 표정을 싹 굳히고 제 머리를 깨 버릴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에 윤원은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청신 선배님처럼 유능하고 뛰어난 마법사는 불철주야 바쁘다는 건 저 같은 신입생들도 알 정도로 유명하니 잘 알고 있습죠, 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굉장히 바빠. 그러니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게 해 줬으면 좋겠어.”
이만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 뜻이다. 윤원은 식은땀으로 젖은 제 손을 꾹 쥐었다.
침착하고, 여기선 후배인 이윤원으로서 대답하는 거다.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중얼거린 윤원은 용기 있게 답했다.
“네. 도유 선배님과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도중에 제가 재미가 없어서 나가자니까 선배님도 재미없다고 하시면서 나갔던 겁니다.”
“그다음은?”
“도유 선배님이 집에 가고 싶으시다고 해서 역까지만 같이 가고 그대로 헤어졌어요.”
윤원은 청신이 카단이 특별 제작한 통로에 대해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 통로에 있는 방은 바깥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그렇기에 만약 미행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눈에는 도유와 윤원이 중간에 어딘가로 빠지지 않고 통로만 지나서 나온 것처럼 짧은 시간으로 느껴질 터였다.
“그래?”
“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같은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이 거짓말임을 자백하는 꼴이 될 때가 있다는 걸 배웠기에 윤원은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차가 다시 출발하고,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청신이 아무 말도 없자 윤원은 배 속에 검은 것이 꿈틀거리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청신을 살폈다.
청신의 표정은 평온했다. 주변 사람들이 칭송하는 아름다운 얼굴로 그저 앞만 볼 뿐이다.
그렇게 청신의 차가 윤원이 첫 수업을 듣는 강의실 건물에서 멈춰 섰다.
“내, 내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내려도 돼.”
“친절하게 데려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윤원은 잽싸게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뒤돌아서 청신이 있는 쪽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윤원은 생각했다. 정보부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살해당하는 건가?
“윤원아.”
“……!”
소름 끼칠 정도로 부드러운 부름에 윤원은 기계처럼 뻣뻣한 움직임으로 청신을 돌아보았다. 청신은 웃고 있었다.
윤원은 생각했다. 이제 청신이 ‘너 카단 협회 인간인 거 안다. 날 찾아낼 줄은 몰랐으니 널 죽이고 난 숨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제 목을 따 버릴 것이라고.
그런 윤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듯, 청신이 웃고 있던 표정을 싹 굳히며 말했다.
“도유 선배에게 한 번만 더 치근덕거려 봐.”
“…네?”
“도유 선배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인 건 나도 알아. 그래서 나 같은 놈의 눈에는 365일 24시간 내내 물고 핥고 빨고 싶은 탐스러운 존재로 보인다는 것도 잘 알지.”
“네, 네??”
“근데 난, 도유 선배 다른 벌레들한테 맛보게 할 생각은 전혀 없거든. 그러니까….”
탁.
“한 번만 더, 도유 선배에게 수작질하면.”
청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윤원의 시야가 바뀌었다. 윤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자기가 어느새 청신의 차 옆에 서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운전석의 옆이었다. 차창 너머로 청신과 눈이 마주쳤다. 청신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때는 네게 화낼 거야.’
입 모양은 ‘화를 낸다’는 건데 윤원이 받은 느낌은 ‘죽여 버린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똑같았다. 윤원이 굳어 있거나 말거나, 청신은 그대로 차를 몰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청신의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까스로 약간이나마 정신을 붙든 윤원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유 선배님…. 완전히 헛다리 짚으신 것 같은데…?”
아무리 곱씹어 봐도 청신의 눈빛이나 말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제 사랑에게 추파를 던지는 불청객을 대하는 태도였다.
*
주말 내내 도유는 청신에 대해 생각했다.
명확하게는 그가 그간 마법사로서 남겨 온 흔적들과 범법자와의 접점을 찾기 위한 조사였다.
머릿속에 욱여넣은 정보들을 종이로 옮겨 적고, 대조하여 공통점을 찾는 행동은 모두 책상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정신적으로 굉장히 지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훌쩍 가서 아침에 시작한 작업을 끝마쳤을 때, 도유는 자신이 주말의 하루를 한 끼도 먹지 않고 쉬지도 않은 채 보냈다는 걸 알고 절망했다. 결국 도유는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아카데미로 출근, 아니 등교를 하게 된 도유는 죽을 맛이었다.
하필 오늘은 청신의 일정에 맞춰 오전 일찍 만나는 날이었으며, 주말에 쉬지 못하고 굶어 가며 일한 직장인의 몸은 허수아비와 똑같았다.
게다가 아침에 냉장고를 열어 봤더니 달걀밖에 없어서 삶은 달걀으로 배를 채우고 온 도유는 연구실 창가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식물이 식량으로 보이는 기이한 체험을 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허기와 정신적인 피로로 머릿속이 멍해도 도유의 손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도유는 마법식을 새겨 넣을 아티팩트의 핵이 되는 부분을 도구로 조심스럽게 깎아 내며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등 뒤로 청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유달리 말없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청신까지 상대했다간 지쳐서 기절할 것 같았기에 무시했다.
무시했더니 다행히 청신은 시선을 물리고 제 일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