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유는 머릿속에서 남학생의 정보를 끄집어냈다.
속성 마법 방어 계열 제1학과 1학년 이윤원 20세.
사진에서는 검은색이었지만 입학 후에 염색했을 검은 부분이 보이는 금색 머리카락. 검은 눈. 활기차 보이는 앳된 얼굴. 설렁설렁 걷는 걸음걸이. 손목시계를 착용한 위치를 보고 그가 오른손잡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을 본 도유는 결론을 내렸다.
저와는 전혀 연관 없는 학생이다.
도유는 신경을 끄고 다시 책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시야에 불쑥 들어온 팩 우유에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윤원이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도유 선배님, 안녕하세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도유는 그간 너드 연기를 하면서 단련되었기에 제게 상체를 숙이는 윤원을 피해 몸을 뒤로 빼냈다.
“나, 나한테… 인사한 거야…?”
자신 없는 어조. 당황한 듯 살짝 높아진 목소리. 완벽한 너드의 반응에 윤원이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제가 선배님 보고 있잖아요.”
순간 도유는 기분 나빴지만 모른 척했다. 윤원이 도유의 손에 가져온 우유를 친히 쥐여 주었다.
차가운 우유의 감촉과 함께 느껴진 다른 감촉에 도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빛의 변화를 본 윤원이 말했다.
“일전에 도와주셨던 답례예요. 덕분에 무사히 자료실을 찾을 수 있었거든요.”
“…응. 다행이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구요!”
“고마워. 잠시만 기다려 봐.”
“네? 네.”
붙잡을 줄은 몰랐는지 윤원의 표정에 당혹이 어렸다. 도유는 옆에 두었던 가방에 손을 넣더니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를 꺼내 윤원에게 건넸다.
얼결에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든 윤원은 제 양 손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색색의 사탕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거 아니야. 맛있어.”
도유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사탕이다.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하나씩 까먹고 있는 것이었지만 윤원도 저와 비슷한 신세라는 걸 알게 되니 안쓰러워서 챙겨 주고 싶었다.
윤원은 어쩐지 측은하게 저를 보는 도유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서도유가 이렇게 친절할 줄은 몰랐기에 시선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기로 결심했다.
“아…. 고, 고맙습니다!”
“뭘. 그럼…. 열심히 해. 힘내고.”
“넵!”
윤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아카데미의 학생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사탕을 쥔 채로 손을 흔들었다.
도유도 얼결에 손을 흔들어 줬다가, 너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고 아차 했다. 그러나 이미 윤원은 자리를 떠난 뒤였다.
홀로 남은 도유는 책을 덮고 윤원이 준 우유를 만지작거렸다. 우유 아래 칩의 형태를 한 아티팩트의 딱딱한 감촉이 만져졌다.
이건 카단 마법사 협회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전달해야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특수 제작된 기기, 이를테면 이번에 도유에게 보급된 핸드폰에 이것을 꽂고 정보를 열람하고 나면 알아서 휘발되는 특수 성질의 아티팩트라 처리도 편했다.
도유는 칩을 슬쩍 챙겨 넣고는 윤원이 준 우유를 마셔서 없앴다. 딸기 그림이 크게 그려진 것처럼 딸기 맛이 진해서 제법 맛있었다.
우유 팩을 접으며 도유는 조금 전에 윤원에게 한 움큼 주었던 사탕에 딸기 맛이 얼마나 있었는지 가늠했다.
윤원이 딸기 맛을 좋아한다면 좀 부족하지 않았을까. 다음에는 딸기 맛만 챙겨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도유는 짐을 챙겨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의 가장 구석에 있는 칸에 들어온 도유는 곧장 윤원이 준 칩을 핸드폰에 끼워 넣었다.
액정이 깜빡이더니 화면이 바뀌며 낯익은 얼굴이 액정에 떴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자 글이 떠올랐다.
[이청신 25세, 남. 한XXX 보육원 출신. 입양아.]
첫 줄을 보고 도유는 잠시 멈칫했다. 입양아라는 단어에 유독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도유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아카데미에 잠입하기 전 봤던 신상 명세에는 기재되지 않은, 이청신이라는 인간의 정보들을 한 줄씩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청신의 이력은 굉장히 화려했다.
마법사임을 자각했던 어린 날부터 보인 재능. 천재적인 창조 마법을 만들고 구현해 내는 능력과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아티팩트를 제작하고 설계하는 데도 뛰어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 그를 눈여겨보는 기업들의 리스트까지 있는 걸 보고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전부 마법과 관련된 유명한 대기업뿐이다.
청신이 참여했던 마법 관련 대회들의 수상 이력을 보고 도유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왜 이런 인재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까? 이 정도면 바로 취업을 해서 떵떵거리며 살아도 될 만한 능력이다. 청신이 이 아카데미에서 배울 것이 없어 보였다.
도유는 의문을 곱씹으며 계속해서 청신의 정보를 읽었다.
그렇게 끝까지 다 읽었을 때, 도유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굉장히 깔끔하다.’
이청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천재 마법사다.
입양된 뒤로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랐는지 생활 기록부에 모난 말 따윈 없다.
언제나 반을 이끄는 리더의 면모가 보인다, 뛰어난 마법사가 될 거라는 등의 칭찬의 말만 가득했다. 사건, 사고에 휘말리거나 저지른 기록도 전혀 없다. 대인 관계도 깔끔했다.
도유는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청신의 정보를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
다시 읽어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이력이다.
이렇게까지 깔끔한 녀석들은 보통 두 분류로 나뉜다.
정말로 축복받아 굴곡이 없는 생을 살아왔거나, 권력과 돈은 물론 인맥까지 있는 누군가가 청신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를 조작했을 경우.
액정이 깜빡이더니 다시 본래의 화면으로 돌아갔다. 아티팩트의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다. 정보부에 요청했던 청신의 정보는 전부 열람했기 때문에 도유는 곧바로 앉아 있던 칸에서 나왔다.
손을 씻은 후 도유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매일 아침 공들여서 부스스하게 만드는 검은색 가발이 오늘따라 유독 덜 부스스한 것 같아 일부러 손가락으로 흩트렸다.
마지막으로 두꺼운 뿔테 안경을 눌러쓰고 마스크도 콧등 위로 올려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지게 만들었다.
열심히 단장을 마친 후, 도유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속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오늘도 자신은 도저히 먼저 접근하고 싶지 않은 완벽한 너드로 보일 것이다. 도유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우뚝.
당차게 걸음을 내디뎠던 도유는 걸음을 멈췄다. 화장실 바로 앞.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아니 눈을 본 도유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이청신…?”
그냥 서 있었다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신은 눈가를 건드리면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잔뜩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도유를 보고 있었다.
도유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해맑던 녀석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건만, 약속 시간도 아닌데 이곳에 이 녀석이 있는 상황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와중에 어른으로서의 지난한 경험이 도유에게 속삭였다.
어떤 이유든 울고 싶어서 인적 드문 도서관 화장실까지 온 것 같은데, 괜히 아는 척하지 말고 지나치라고 말이다. 울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섣불리 건들면 안 된다.
도유는 결정을 내리고 청신을 지나쳐 갔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턱.
청신의 손이 도유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나아갈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청신이 애처로운 얼굴로 도유를 보고 있었다.
“선배….”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청신답지 않은 기운 없는 목소리라는 건 잘 알겠다. 도유는 결국 청신 쪽으로 몸을 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청신이 도유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도유는 반사적으로 청신을 떨쳐 내고 바닥에 메다꽂으려고 했지만 그 직전에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렸다.
이 녀석은 범법자가 아니다. 아직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건 특수부가 아닌 너드 재학생 서도유였다.
“왜, 왜 그래…?”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자 청신이 도유를 슬쩍 끌어안았다. 성별과 관계없이 이런 식으로 안긴 것이 처음이라 도유가 청신을 밀어내려던 때, 청신이 말했다.
“선배, 시간 되세요?”
“그, 그야 되, 되겠지…?”
얼결에 대답했지만 시간이 남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할애할 시간은 모두 청신과 함께하는 일뿐이었으니 딱히 둘러댈 변명도 없었다.
“그럼 저랑 바람 쐬러 가요.”
“바람 쐬러?”
“네. 죄송해요…. 하지만 도저히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
얼버무리는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이 짧은 사이에 청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굴곡 없는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녀석이 맞다 한들 저보다 어린 애가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건 어른의 양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신은 당장 꺼질 듯한 촛불처럼 가느다랗게 웃으며 다시 도유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번에는 도유가 능동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위로하듯 청신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탓에 도유는 청신의 가녀린 웃음이, 어느덧 희열에 찬 웃음으로 변한 것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