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유는 제 옆에 두었던 가방을 바닥의 짐 바구니에 내려놓고 옆으로 비켰다. 청신이 도유의 옆에 앉았다.
“저, 저기?”
“네에?”
“…….”
너무 딱 붙었는데….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입을 가까스로 닫은 도유는 청신을 노려보았다.
청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사한 얼굴로 도유가 펼친 설계도를 평평하게 다듬었다. 허벅지가 닿는다. 은근히 무게까지 기대어 온다. 도유는 요즘 젊은 애들의 거리가 원래 이렇게 가까운 것인지 고민했다.
“사본 있어요?”
“있긴, 있는데….”
“그럼 잠깐 낙서해도 될까요?”
“…응. 여기 펜.”
“고마워요, 선배.”
도유가 건넨 펜을 받아 든 청신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배가 여기 적어 놓은 이론에 따르면, 이쪽을 구심점으로 해서 마력을 순환시켰을 때 출력되는 예상 에너지는 이거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부분을 구심점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걸 구심점으로 하고, 기존 것은 역순환을 시키는 게 나아요.”
“어째서?”
도유는 마법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마나 감응력이 마법사보다 높은 일반인이었다. 그렇기에 어릴 때 카단 마법사 협회의 특수부에 들어간 뒤로 죽어라 마법을 공부했고, 자신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그랬는데.
청신은 도유가 이해하기 쉽도록 천천히, 세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남들이 들으면 ‘뭐라는 거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난해한 단어들과 수식이 많았지만 도유는 전부 알아들었다.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청신이 설명해 주는 것들을 경청한 도유는 잠시 제 임무조차 잊고 말았다.
“어디까지나 제 사견일 뿐이니까, 선배가 원하는 대로-.”
“네가 말한 게 맞아!”
도유는 연기도 잊고 눈을 반짝이며 청신이 그린 흔적들을 보았다.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새 수식과 단어로 표기한 수정 사안들은 물론, 흐름을 따라가기 쉽도록 가장 최적의 위치에 화살표와 같은 기호를 그려 넣은 까닭에 완성도가 더 높아졌다.
굵은 뿔테 안경 너머, 반짝거리는 푸른 눈은 설계도에 못 박혀 있었다. 그렇기에 도유는 청신이 저를 빤히 보고 있다는 것과, 어느 순간부터 은근히 저를 반쯤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단해, 청신아. 난 이걸 생각도 못 했어.”
카단에는 뛰어난 마법사들이 많았지만 도유를 상대해 주는 마법사들은 없었다. 같은 카단이라 하더라도 다른 부서의 사람들은 특수부를, 특히 도유가 속한 제1팀을 보면 잠재적 범죄자 보듯이 보았으며 말도 섞지 않았다.
같은 특수부의 팀원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면 입을 닫고 지낼뿐더러, 애초에 임무가 아닐 때는 잘 만날 수도 없었기에 도유는 지금 이 순간 청신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선배가 이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저도 기쁘네요.”
“고마워. 네 덕분에… 헉.”
청신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도유는 숨을 삼켰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걸까. 조금만 고개를 움직이면 청신과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도유가 크게 몸을 떨며 옆으로 몸을 물렸다.
“미, 미안해.”
“뭐가요?”
청신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지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도유는 저 혼자 신경을 썼다는 것을 자각하고 부끄러운 기분에 고개를 저어 얼버무렸다.
“네, 네가 봐 준 부분까지 해서 조금 더 다듬어서 올게. 계약서에 기재한 날짜는 내일부터니까, 내일은 음, 어디서 작업하는 게 편해?”
“선배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요.”
“그럼… 내가 내일 연구실을 빌려 볼게.”
“아직 안 빌리셨군요.”
아카데미에서는 졸업 작품 때문에 몸과 마음을 불 싸지르는 안타까운 학생들을 위해 작은 규모의 개인 연구실을 제공했다.
도유가 정말 졸업에 목숨을 건 7학년이었다면 진즉 빌려 뒀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목적은 범법자를 낚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여 신청도 해 두지 않았다.
청신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가 설계도를 보완해 준 것을 보았을 때 도유는 그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범법자가 피해자들에게 준 마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걸 확신했다.
이대로 좀 더 끌어내면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함정 수사인 걸 들키고 이대로 청신이 연락을 끊어 버릴까 마음이 급해진 도유가 서둘러 덧붙였다.
“전에, 빌리려고 했는데 못 빌렸던 것뿐이야….”
“그래요? 그럼 빌리러 갈 때 같이 갈까요?”
“아, 아냐! 괜찮아. 오전에 갈 거니까, 나 혼자 갈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오묘한 눈빛으로 도유를 보던 청신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았어요.”
“응…! 오늘 고생 많았어. 고마워, 청신아.”
“아.”
내내 여유로웠던 표정이 짧은 감탄사와 함께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청신이 입을 꾹 다물자 도유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청신아…?”
다물려 있던 입술이 달싹였다. 일그러졌던 얼굴 또한 만개하는 꽃처럼 한순간에 아름다운 웃음을 그리는 모습에 도유는 소름이 돋았다.
“역시, 선배가 이름 불러 주니까 좋네요.”
“…….”
연인에게 속삭이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미성에 도유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청신을 관찰했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는 탓에 제 표정이 청신에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역시 이놈이 범법자인 것 같은데?’
평소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던 소심한 성격이나, 은둔형 성격을 가진 피해자들이라면 인기가 많은 데다 미남인 청신이 이런 식으로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뻤을 것이다.
그래서 마법이 발동되면 수십 명은 족히 죽는, 금기로 지정된 마법들을 사용한 게 아닐까.
“그렇구나아…. 다행이야.”
지금은 아무리 의심쩍어도 행동하면 안 된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에 도유는 애써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 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던 것들을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그럼 내일 보자.”
“선배.”
“응?”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
“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청신의 말대로 저녁 시간이 코앞이었다. 오늘은 인스턴트 카레에 적당히 채소만 얹어 먹으려 했던 도유는 잠시 고민했다.
인간은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식사할 때 가장 긴장이 풀리는 생물이다. 함께 식사를 하면 뭐라도 건져 낼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자주 가는 한정식집이 있거든요. 맛집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 근처에 있어요.”
“혹시, 사거리 좀 지나서 한옥으로 된 곳 말하는 거야?”
“네, 거기요.”
“…! 좋아!”
도유는 냉큼 수락했다. 평소에도 가 보고 싶었지만 1인 손님을 받지 않는 곳이라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던 곳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간 김에 겸사겸사 청신의 빈틈을 노려 정보도 캐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도유는 들뜬 마음에 빠르게 가방을 챙겨 들었다.
*
아무리 잠입 수사라지만, 아카데미는 처음 다녀 본 탓에 저도 모르게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남은 곳이 없습니다.”
“네?”
“현재 재학생에게 제공되는 연구실은 모두 사용 중입니다. 모두 내년 초에 대여 기간이 만료되기 때문에, 올해 공실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여지조차 두지 않는 냉정한 목소리에 도유는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연구실에 처박힌 졸업 예정자가 죽어서 나가는 게 아니라면 공실이 생길 일이 없고, 졸업 예정자는 죽기 전에 담당 교수 멱살을 잡아 죽이고 자신도 죽을 존재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공실이 생길 일이 없다는 말까지 덧붙여 주었다.
도유는 청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연구실이 전부 만실이라 구하지 못했어. 미안한데 내일 만나도 될까? 오늘 중으로 인근 대여 연구실을 구해 볼게.]
주로 마법사나 마나 감응력이 높은 학생들이 다니는 아카데미이다 보니 주변에 카페처럼 대여하여 사용할 수 있는 연구실이 제법 있었기에 찾아볼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카단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해서 급조한 연구실이라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괜찮아요. 오늘 약속대로 만나요.]
“아니, 내가 안 괜찮다고….”
힘없이 중얼거린 도유는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다가 번뜩 든 생각에 눈을 빛내며 [알았어]라고 답장을 보냈다.
혹시라도 피해자들을 꾀어낸 장소나, 청신이 금기로 지정된 마법을 연구하거나 아티팩트로 만든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장소에 데려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지금 학교예요?]
청신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도유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응.]
[알았어요.]
알긴 뭘 알았다는 걸까? 도유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잠시 멈췄던 걸음을 내디뎌 도서관으로 향했다. 청신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3시간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아카데미의 도서관에 구비된 마법 서적들을 읽을 생각이었다.
비교적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자리와 외떨어진 도서관의 구석 자리에 앉은 도유는 전에 읽다 만 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 잠입한 뒤로 도유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이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특수부에게 허용된 도서관에는 이런 기초적인 책들이 전혀 없었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이 시간이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즈음, 도유는 제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도유의 눈빛이 날카롭게 대상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