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굴러들어온 너는
<특히, 저녁 여섯 시부터 새벽 사이 강한 비와 함께 돌풍과 벼락을 동반하겠는데요. 보시는 것처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우두두, 소리를 내며 창문을 마구 때렸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일기예보에 집중한 나루는 멍한 얼굴로 과자를 베어 물었다. 파삭. 한 입을 베어 물 때마다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지만, 나루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떡해, 비 많이 오는데….”
나루의 걱정은 과자 부스러기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슬슬 여름이 찾아오려는 건지, 요즘 툭하면 비가 내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 내리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게 아닐까?
과자를 놓고 일어선 나루가 재빨리 통창 앞으로 다가가 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도 번개가 치며 빛이 반짝, 하자 화들짝 놀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어떡하지, 내 친구들은 집이 없는데.
안절부절, 불안해진 마음 탓에 발이 절로 동동거렸다. 나루는 물소리가 새어 나오는 욕실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규연은 아직 욕실 안에서 씻는 중이었다. 이건 좋은 기회였다. 비 오는 날에 갑작스레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할 애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루의 친구, 즉 길 강아지들은 집이 없었다. 이런 날이면 알아서 비를 피하겠지만, 오늘은 빗줄기가 매서울 정도였다.
내가 당장 데리고 와야 해!
굳게 마음먹은 나루는 규연에게 들킬세라 발꿈치를 치켜들고 살금살금 움직여 현관문을 열었다.
덜컥.
오케이, 작전 성공이다. 우산까지 야무지게 챙겨 나온 나루는 헐레벌떡 뛰어 내려와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
강아지들이 비를 피할 만한 곳은 저쪽 나무 앞, 작은 틈새다!
킁. 킁킁. 코를 내밀고 냄새를 맡던 나루가 당당히 잔디를 밟고 들어갔다.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아닌데, 성큼성큼 잘도 걸어 들어갔다. 비가 와서 흙이 젖어 땅이 질어졌다. 그러나 나루는 흰 운동화가 더럽혀지는 걸 아까워하지 않았다.
철퍽, 철퍽!
운동화가 흙탕물로 물들고, 막 갈아입은 옷에 구정물이 튀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루의 발걸음은 가벼워져만 갔다. 친구들을 찾으러 가겠다더니, 흙을 밟고 신나서는 제자리에서 두어 번 뛰어 보기도 했다.
후우웅.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쳤다. 순간, 나루의 손에 들린 우산이 하찮게 꺾어져 버렸다. 온몸이 비에 젖는 건 5초도 걸리지 않았다.
“흐핫, 우산 뒤집혔다.”
우산이 뒤집혔는데 나루의 입가엔 즐거운 미소만 피어났다.
뭐, 어쩔 수 없지. 우산이 고장 났으니 비를 맞는 수밖에!
시원하게 비를 맞은 나루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을 즈음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길 강아지들이 컴컴한 나무 사이에서 꼬리를 흔들며 뛰어왔다.
“얘들아! 으, 으핫, 간지러워!”
네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루의 품에 안겼다. 그중 두 마리는 볼을 간지럽게 핥으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중이었다.
왕왕! 멍! 헥헥. 멍멍!
나루는 제 친구들의 에너지에 눌려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바지가 흙탕물에 흠뻑 젖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나뒹굴기로 했다.
“잘 지냈어? 너도?”
“왕왕!”
“오늘 비가 많이 온대. 여기 있으면 위험할지도 몰라. 나랑 규연이네 집에 가 있자.”
차례로 인사를 나누던 나루가 자그마한 품에 강아지들을 조심스레 껴안았다. 폭우를 피해 안전히 있을 만한 곳은 지금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규연의 집밖에 없었다.
규연이가 화를 내겠지만. 인상을 찌푸리겠지만! 어쩔 수 없는걸.
품에 안은 강아지들의 몸이 모두 잘게 떨리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어도 비바람 때문에 몹시 추운 모양이었다.
“그 전에, 조금만 놀다가 갈까?”
“왕왕! 왕!”
읏쌰, 소리를 내며 일어나려던 나루가 그대로 다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역시, 흙탕물에서 뒹굴며 노는 게 제일 재미있어!
문득 시골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나루는 강아지들과 함께 바닥을 열심히 뒹굴었다.
“자, 들어와. 이거 타고 올라가면 된다? 엘리베이터야.”
한참 뒹굴며 놀던 나루는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향했다. 제 모습이 어떤 줄도 모르고 말이다.
<문이 열립니다.>
자랑하듯 버튼을 누른 나루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강아지들을 들여보냈다. 익숙한 층수를 누르고,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나루는 식겁하고 말았다.
“히이이이익.”
닫힌 문으로 제 모습이 비쳐 보였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은 젖어서 엉망이 됐고, 옷도 흙탕물이 잔뜩 묻어 꼬질꼬질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루보다 더 꼬질꼬질해진 강아지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망했다.
<문이 열립니다.>
꼭 이럴 때만 엘리베이터가 빨랐다. 나루는 강아지들을 품에 안고 내려 도어락을 눌렀다. 느릿하게 눌리는 비밀번호가 나루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덜컥.
그렇게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야, 송나루. 너 이 시간에 비도 많이 오는데 어딜 다녀오는…!”
“…규, 규연아.”
“너, 그게, 뭔, 씨발, 그 꼴은 대체….”
깨끗이 씻고 나온 규연이 현관 쪽으로 다가오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규연의 표정은 나루를 발견하자마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뚝, 뚝,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더러운 물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지가 된 나루의 꼴에 경악하던 규연은 머리를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하. 심호흡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규연은 애써 제 성질을 누르고, 또 누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나루가 소심하게 한쪽 발을 내딛으려 하자, 규연이 재빨리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만!”
“…….”
“너 거기, 거기 꼼짝하지 말고 서 있어. 들어오지 말아 봐, 일단.”
“왜, 왜…?”
“뭘 상처받고 있어! 그 꼴로 어딜 들어오려고! 수건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하, 씹….”
들어오지 말라는 말에 나루가 눈썹을 추욱 늘어뜨렸다. 와중에 상처를 받는 게 기가 차서 규연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잠깐 사이에 뭔 저런 사고를 치냐고. 씨발. 진짜 눈을 못 떼게 하네. 같이 딸려 온 저것들은 또 뭐야? 하나같이 다 꼬질꼬질해서, 참 나. 어처구니가 없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규연이 욕실에서 커다란 타올을 들고 돌아왔다. 나루는 여전히 현관 앞에서 구정물을 뚝, 뚝, 흘리며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송나루, 나루야. 대체 뭔 생각이냐, 어? 강아지들은 왜 데리고 들어오냐고.”
“오늘 비 많이 온대서, 내 친구들 걱정되니까….”
얘네는 집도 없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단 말이야. 소심한 목소리가 뒤이어졌다. 규연은 안쓰러운 소식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얀 수건이 나루의 몸을 감싸자 금세 더럽게 물들었다. 규연은 수건을 하나 버리는 셈 치며 나루의 얼굴과 옷을 박박 닦아냈다.
밤에 이게 갑자기 뭐 하는 짓이냐고. 하, 또 대청소하게 생겼네.
속으로 핀잔을 늘어놓던 규연이 강아지들을 수건으로 감싸 욕실로 옮겨 주었다.
“하나, 둘, 셋, 넷, 이런 씨발. 한 마리도 아니고 넷이나 데려왔어.”
욕조에 들어간 강아지들이 토독토독, 발소리를 내며 주변을 탐색했다. 규연은 총 몇 마리인지 세어 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날씨에 불쌍한 길 강아지들을 내쫓을 수도 없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규연은 욕실 입구에 서서 제 눈치를 보고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체념해 버렸다.
그래, 이미 데리고 온 걸 어쩌겠냐. 깨끗하게 씻기기나 하자.
쏴아아-
따듯한 물줄기가 욕조 안으로 쏟아졌다. 규연은 한 마리 한 마리를 정성스럽게도 씻겼다. 구정물이 빠질수록 뽀얗게 변하는 강아지들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마음이 물러졌다.
“꽤 귀엽게 생겼네. 이리 와 봐, 인마. 물기 닦아야 할 거 아니야.”
까칠한 말투와 다르게 규연의 손짓은 조심스러웠다. 뿌듯한 얼굴로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나루는 점차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규연은 깨끗해진 강아지들을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 주고, 귀엽다며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특히, 털이 흰 강아지한테는 웃으며 뽀뽀까지 했다.
뭐야? 왜 나는 안 쓰다듬어 줘? 왜 나는 뽀뽀 안 해 줘?
오늘만큼은 규연에게 혼나도 싸다고 생각했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들어가서 씻어, 꼴이 그게 뭐야. 얘네는 그렇다 쳐도, 넌 왜 그렇게 더러워졌어?”
“우산도 날아가고, 흙탕물 때문에….”
“또 신나서 발장난 쳤지. 송나루, 너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분명 얘기했는데.”
품에 강아지들을 안고 나온 규연이 부러 까칠한 투로 말했다. 불쌍한 척 웅얼거리며 대답하던 나루는 규연의 말에 정곡이 찔려 어깨를 움찔, 떨었다.
사실 창문으로 다 본 거 아니야? 유규연 소름 돋아.
의심쩍은 표정으로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가 슬그머니 옷을 벗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와.”
“나, 나는?”
“뭐?”
“나는 안 씻겨 줘?”
“대형 사고를 쳐 놓고 그런 말이 나오지.”
나루의 자그마한 기대는 땅바닥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오늘은 더 우기면 안 될 듯해서, 조용히 욕실 문을 닫았다.
규연이가 내 친구들을 받아줬으니까, 그걸로 됐어. 오늘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 * *
비는 며칠 내내 그칠 줄을 모르고 쏟아졌다. 이른 아침, 눈을 뜬 나루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며 문을 열었다.
덜컥.
부엌에는 웬일로 먼저 일어난 규연과 강아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맛있냐, 되게 잘 먹네. 많이 먹어.”
커다란 그릇에 사료를 한가득 부어 준 규연이 정신없이 밥을 해치우는 강아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료. 오랜만에 본다. 나도 옛날에는 가족들이랑 저렇게 모여서 먹었는데.
본능에 이끌린 나루가 자연스레 강아지들 사이에 껴서 사료를 먹으려 했다. 게다가 규연이 준 사료는 꽤 고급인지 향이 끝내주게 좋았다.
덥석.
“어딜 끼려고.”
“사료…!”
“넌 이리 와서 밥이나 먹어. 그거 탐내지 말고.”
사료로 손이 뻗어지던 때, 규연이 나루의 뒷덜미를 잡아채 식탁으로 잡아끌었다.
맞아, 사람은 사람 밥을 먹어야 하지.
멋쩍게 볼을 긁적이던 나루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크게 떠먹었다. 분명 규연이 차려 준 밥이 더 맛있는 건데, 저쪽에서 찹찹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료에 눈길이 갔다.
아니야, 아니야, 저건 강아지 밥이야.
애써 그쪽을 외면하며 밥을 욱여넣은 나루가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더 줄까, 잘 먹네.”
“나는 괜찮,”
“귀여워. 이따 간식 사 줄게.”
“…….”
다정한 규연의 목소리에 반갑게 고개를 든 나루가 대답했다.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가 향한 곳은 나루가 아닌 강아지들이었다. 빠르게 실망한 나루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규연을 응시했다. 경악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강아지들이 귀엽다며 습관처럼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 규연이 괜히 미웠다.
탁!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나루가 규연의 앞에 당당히 다가가 섰다. 그리고는 대뜸 머리통을 앞에 내밀었다.
“밥 먹다 뭐 하는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냐고!”
“글쎄, 난 모르겠는데. 이상한 행동 그만하고 밥 먹어.”
유규연은 바보 같아. 나도 쓰다듬어 달라고! 나도! 왜 내 친구들 쓰다듬어 줘? 나는? 내가 애인인데?
속으로 울분을 터뜨린 나루가 씩씩거리며 발을 크게 굴렀다.
규연은 그 하찮은 뒷모습에 몰래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사실은 나루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질투하고 있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쟤는 왜 강아지들한테 질투하고 그러냐. 귀엽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루를 놀려먹은 규연이 속으로 키득거렸다. 이건 그러니까, 작은 벌이었다. 며칠 전, 집을 흙탕물로 더럽히고, 강아지들을 데려와 고생시킨 벌.
지잉. 지잉.
규연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잠깐 가게에 들를 일이 있었다. 쉬는 날인 나루는 거실 소파에 앉아 홀로 화를 식히는 중이었다. 대놓고 나 삐쳤어요, 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게 깜찍해서, 규연은 일부러 기분을 풀어주지 않기로 했다.
유규연 뭐야? 지가 강아지를 그렇게 좋아했어? 나한테는 강아지 얘기 많이 안 했으면서. 이제야 귀여워하고. 어떻게 보면 나도 강아지인데.
나루는 작정하고 규연의 욕을 했다. 물론 속으로.
“나 잠깐 일 좀 보고 올게.”
“어, 그러든가.”
“얌전히 있어. 사고 치지 말고.”
“사고 안 치거든!”
준비를 마치고 나온 규연은 짧은 인사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애정 섞인 스킨십이라든가, 다정한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덜컹!
문이 닫히고, 거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밥을 배부르게 먹은 강아지들은 따듯한 자리에 누워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왕따처럼 남은 나루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규연이가 강아지를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 그렇다면 나도, 나도 강아지처럼 변해야 하나?
단순하게 생각한 나루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규연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몸이 정말 강아지로 돌아가거나, 귀랑 꼬리라도 꺼내는 건데….
강아지로 변하길 바라며 힘을 주던 나루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뭐라도 이용해서 강아지처럼 보이게 하는 것.
드륵.
마땅한 물건이 없을까, 하며 서랍을 뒤적거리던 나루는 아주 좋은 걸 발견했다.
“목줄!”
목줄. 웬 목줄이 서랍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해….
“아아! 그거!”
목줄을 자세히 살펴보던 나루는 눈을 크게 뜨며 손뼉을 쳤다. 이 목줄은 다름 아닌 나루가 규연의 집에 처음 왔던 날, 목에 끼우고 있던 그 목줄이었다. 침대 위에 앉아 제 목에 목줄을 채운 나루는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규연이가 보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포옥. 그대로 침대에 누운 나루는 규연의 향이 짙게 밴 이불을 끌어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이러고 있으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규연이가 올 때까지만, 눈을 붙여 볼까.
똘망똘망하던 눈이 점차 나른해졌다. 나루는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 *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규연은 한 손에 마카롱이 포장된 상자를 들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토독. 토독. 토독.
가장 먼저 규연을 반기는 건 강아지들이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털을 쓰다듬어 준 규연이 거실로 들어서며 안을 살펴보았다. 집안이 조용하고, 어질러진 것도 없는 게 느낌이 이상했다.
제대로 삐친 건가. 나와 보지도 않네.
규연은 단단히 삐쳐 있던 나루의 얼굴을 떠올리고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길어졌는데, 바빠서 나루에게 연락 한 통 못한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여러 방을 살펴보던 규연은 그 어디에도 나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지막으로 제 방문을 열었다.
덜컥.
방문이 조금씩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규연은 침대 위를 확인하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자다가 일어난 건지, 머리카락이 부스스해진 나루가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규연은 방문에 기대어 서서 그런 나루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저 목줄은 뭐야.
새하얀 피부 위로 채워진 목줄이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렸다. 규연은 문득 나루를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멀뚱멀뚱. 침대 위에 앉은 나루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규연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저 얼굴도, 그때랑 비슷한데.
나지막하게 헛웃음을 친 규연이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을 걸었다.
“누구신데 제 침대에 계세요? 목줄까지 하고.”
“…….”
“난 이런 개 안 키우는데.”
특유의 까칠한 목소리에 나루의 얼굴이 점차 찌푸려졌다. 입술은 벌써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규연은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온순하던 두 눈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워져 있었다. 삐치다 못해 화가 난 걸까. 나루가 잇새로 그르릉, 거리며 사나운 소리를 흘려보냈다.
으르릉. 그르르릉.
이를 세우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규연은 기가 찬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능글맞게 대꾸했다.
“어쭈, 그렇게 보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이 상황, 이 질문. 어디선가 겪어 본 듯했다. 나루는 사나운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금 뻔뻔한 낯으로 규연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머리 쓰다듬어 주고, 키스해 준다고 했어요.”
“…뭐?”
“이틀 동안 맛있는 음식만 주고, 꽉 안아서 사랑한다는 말만 해 준다고도 했어요.”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나루는 제 마음대로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존댓말까지 써 가면서 말이다.
아주 예전이었다면, 이런 행동에 기겁하며 나루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뻔뻔스러운 말도, 날 쳐다보는 저 눈망울도,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지니 원.
피실, 실없는 웃음을 터뜨린 규연이 나루의 앞까지 다가와 목줄을 매만졌다.
“너 지금 나 좋아 죽으라고 이러는 거냐.”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작정하고 목줄까지 찬 나루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동자를 굴렸다. 새침한 태도에 끔뻑 넘어간 규연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루를 바라봤다.
“내가 언제 머리 쓰다듬고, 키스해 준대?”
“…….”
여전히 말투는 까칠했지만, 이게 문제인가.
규연이 나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놀았다.
배시시. 사랑받는 게 좋았는지, 나루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으읍…!”
나루의 두 뺨을 감싼 규연이 갑작스레 입을 맞췄다. 쓰다듬는 것 다음으로는 키스였다. 미지근한 온기가 입술 위에 닿을 때마다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질척하고도 부드러운 혀끝이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면 온몸이 다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쪽, 쪼옥. 앙증맞은 소리와 함께 입맞춤이 점점 짙어졌다. 규연은 나루를 자연스레 뒤로 눕히며 애정을 쏟아부었다.
맞닿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나루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규연의 허리에 두 발을 감아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유규연 너무 좋아.”
“그래?”
“응, 나 규연이 사랑해. 너도 나만 사랑해야 해. 내 거야.”
이 와중에도 집착이 끊이질 않았다. 규연은 귀여운 사랑 고백에 짙은 입맞춤으로 대답했다.
반쯤 뜬 눈으로 나루의 말간 얼굴이 들어찼다. 하얗고 말랑한 볼, 끝이 동그란 코, 강아지처럼 선한 눈매. 수수하면서도 처연하게 예쁜 얼굴.
볼을 쓰다듬던 규연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루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이런 얼굴로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놨었지. 그때는 나루 같은 인간을 처음 봐서 마냥 황당하고 머리도 아팠었다. 야생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강아지를 만난 기분이었달까.
하지만 지금 눈앞에는 사랑받아 밝기만 한 나루가 있었다.
얘가 그날 내 침대 위에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사소한 착각으로 나한테 와 준 게 천만다행이었지.
나루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천국이니 뭐니 하며 규연을 천사 취급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였다. 규연의 인생은 나루를 만나고 난 후부터 바뀌었다.
그래. 갑자기 굴러들어온 게, 실은 골칫덩이가 아니라 사랑둥이였던 거지.
진짜 천국을 안겨 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어, 송나루.
난 앞으로도 계속 이 천국 속에 살아갈 거야. 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