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휴가 (11)
입을 맞춘 나루가 막 떨어지려고 했을 때, 규연이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다정하지만, 급한 손길이었다. 고개가 비틀어지고, 입술이 진하게 맞물리며 혀가 얽혀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나루가 버거워하며 입술을 열자, 규연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으, 흐읍…!”
혀가 고른 이를 훑고 입천장을 간질일 때마다 신음이 흘러나왔다. 규연은 어느새 품에 안겨 있는 나루의 몸을 침대에 조심스레 눕혀 주며 혀를 섞었다. 폭신한 쿠션 위로 뒤통수가 닿자, 나루가 다급히 팔을 뻗어 규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대로 눕게 되면, 규연의 격한 키스를 받아내기 더 어려워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피실, 웃음을 흘린 규연이 나루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키스하는 중, 나루를 놀릴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이제 놓아주려나. 타이밍을 봐서 떨어지려던 나루가 허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평소 같았다면 이미 놓아주었을 규연이, 오늘따라 집요하게 굴었다. 혀가 질척하게 섞여들며 입 안 여린 곳을 야릇하게 쓸고 지나가자, 나루가 슬슬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숨이 부족한 건 물론이고, 눈이 점점 감기는 게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으, 후으….”
끔뻑끔뻑, 다 꺼져가는 가로등 불빛처럼 깜빡이던 나루의 눈꺼풀이 완전히 닫혔다. 동시에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키스를 하다 만 규연은 어이가 없어 인상을 구겼다.
“송나루.”
“…….”
이런, 씨발…. 잇새로 욕이 흘러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나루를 향한 욕은 아니었다. 규연은 잠들어 버린 나루를 곱게 눕혀 놓은 채, 마른세수를 했다. 허망하게 떨궈진 시선은 터질 듯 부푼 앞섶을 향해 있었다.
정작 나루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낯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데, 키스 한 번에 이런 꼴이 되어 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테이블 위에서 담뱃갑을 챙긴 규연이 샤워 가운을 단단히 여미며 베란다로 나왔다. 이렇게라도 식히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날 밤, 규연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 * *
밝고 환한 나루의 얼굴과 달리, 규연의 낯빛은 어두웠다. 놀러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밤을 꼬박 새운 탓이었다. 아침부터 접시에 음식을 한가득 담아 온 나루는 잘 구워진 토스트를 베어 물며 울상을 지었다.
“규연이 괜찮아? 피곤해?”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얼른 먹어.”
“뭔가 이상한데….”
규연을 걱정하던 나루는 정말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식사를 이어갔다. 오늘도 리치를 먹고 싶었는데, 저 상태의 규연에게 또 껍질을 까 달라고 하는 게 미안해서 먹지 않았다. 대신, 오렌지를 다섯 개씩이나 먹은 나루는 뷔페를 나서며 포도 주스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이게 왜 안 되지? 이상하다?”
“…….”
“규연아, 이거 빨대가, 으악!”
걸어 나오던 나루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팩 주스를 가지고 씨름을 했다. 빨대가 제대로 꽂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멍한 얼굴로 서 있던 규연은 차마 나루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때, 날카로운 빨대 끝이 팩을 이상하게 뚫었고, 주스가 터져 나와 규연의 얼굴에 튀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대참사에 어버버, 하던 나루가 황급히 규연의 얼굴을 닦아내려 했다. 그러자, 규연이 손을 저으며 근처 화장실로 향했다.
“미, 미안….”
“괜찮아, 가서 닦고 올 테니까 여기 있어.”
오늘 규연이가 뭔가 이상해. 말투도 조금 멍하고. 평소였으면, 너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이러면서 잔소리했을 텐데. 참 이상하다. 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루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스가 꽤 많이 튄 걸까. 화장실에 들어간 규연이 한참 나오지 않았다. 나루는 풍경을 구경하며 근처를 서성거렸다.
“나루!”
“으앗…!”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루의 몸을 덮쳐왔다. 바로 성원이었다. 성원은 나루의 어깨에 자연스레 팔을 걸치고, 친한 척을 하며 말을 걸었다. 친구들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밥 먹고 오는 길이야?”
“아, 네. 밥 먹고 막 나왔어요.”
“마침 잘 됐다. 친구들이랑 오는 길에 이거 샀거든.”
한 손에 든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성원은 봉지 안에서 주전부리 몇 개를 꺼내곤, 나루를 향해 ‘손!’하고 외쳤다. 줄 게 있으니 손을 펼쳐 보라는 뜻이었다. 나루는 순순히 두 손을 펼쳐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사탕과 초콜릿 같은 것들이 올려졌다.
아싸, 간식이다. 규연이한테 나눠 줘야지. 원래 기분 안 좋을 땐 단 거 먹는 거라고 했어.
거리낌 없이 간식을 받은 나루가 규연의 생각부터 했다.
“아, 오늘 알지? 바비큐 파티.”
“네, 네. 기억하고 있어요.”
“어제 고기 더 사다 놔서 엄청 많아.”
“우와….”
그러고 보니, 오늘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했었다. 나루는 머릿속에 약속을 새기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고기를 더 사다 놨다니, 말만 들어도 행복했다. 성원은 고분고분한 나루를 보며 크게 웃고, 더 친근하게 몸을 붙여왔다.
“뭐 하냐.”
한참 성원과 대화를 나누던 중, 화난 듯한 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루가 놀라 뒤돌아보는 사이, 먼저 나선 규연이 붙어 있던 성원의 몸을 거칠게 떼어냈다. 악의 다분한 손짓에 나가떨어진 성원은 황당해하며 헛숨을 내쉴 뿐이었다.
규연은 성원을 하찮은 물건 대하듯 내리깔아 보며, 나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 규연아. 이제 안 끈적거려?”
“…….”
나루가 순진한 투로 물었다. 규연은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얼굴을 씻어내고 나왔더니, 나루 옆에 웬 이름 모를 남자가 질척거리고 있질 않나. 나루는 또 그 남자를 밀어내지 않는 게 열받았던 터였다. 그런데, 나루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굴고 있었다.
“후우….”
한숨을 깊게 내쉬던 규연이 화를 한번 눌러 참았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일단 참기로 한 것이다. 나루는 이제야 규연이 화났다는 걸 눈치채고, 다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옆 동에 놀러 온 사람들이야! 어제 잠깐, 수영장에서 만났어.”
“저 사람이랑 둘이 놀러 온 거였구나, 하하.”
나루의 변명에 끼어든 성원이 뜬금없이 대답했다. 얄미운 목소리에 규연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가뜩이나 어젯밤부터 예민해져 있는 상태인데, 성원이 그 심기를 건드리고 만 것이다.
“그럼 씨발, 얘 혼자 왔겠냐.”
“네?”
“남의 애인한테 괜히 관심 보이지 말고, 놀러 왔으면 얌전히 놀다 가지.”
“…….”
대놓고 싸가지 없는 말투였다. 필터 없는 욕에 놀란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려 규연을 쳐다보았으나, 규연은 성원을 죽일 듯 노려보느라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셋 사이의 공기는 어느새 싸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성원은 욕먹은 것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다가도, 차마 규연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채 자리를 벗어났다.
분위기는 성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에서야 풀어졌다. 매섭게 굳어 있던 규연의 표정 또한 그제야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규, 규연아. 화났어?”
“그건 뭔데 들고 서 있어.”
“아, 이, 이거. 그냥 줘서 받은 건데….”
규연의 시선이 나루의 손바닥 위로 꽂혔다. 작은 손바닥 위에는 성원이 준 간식거리가 들려 있었다. 눈치를 보며 대답하던 나루는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에 간식거리를 모조리 쏟아 버렸다. 그러고 나니 싸늘해졌던 규연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온화해졌다.
“너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너 주려고 했는데….”
“저런 거 함부로 받지 마. 알겠지.”
“응, 안 받을게.”
나루가 계속해서 눈치를 보자, 규연이 다시 평소대로 행동했다. 놀러 온 곳에서 굳이 짜증을 내고, 애인을 눈치 보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나루도 긴장이 풀린 건지, 금세 기운을 차렸다.
“가자, 너 오늘도 물에 들어가서 놀고 싶다며.”
“응, 규연이 너도 같이 들어갈 거지?”
“그럴 거야, 오늘은 놀 만한 것 좀 사서 갈까.”
나루의 볼을 손가락 끝으로 장난스레 튕긴 규연이 수영장 앞에 있는 매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루가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던 공도 있었고, 물에서 쓰기 좋은 튜브도 있었다. 규연과 함께 매점으로 들어간 나루는 양손 가득 놀거리를 껴안고 나왔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활기차게 놀았다. 물에 들어온 규연은 나루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함께 어울려 주었고, 나루는 마음껏 행복해하며 물장구를 쳤다. 쉬지 않고 웃어대는 게 보기 좋아서, 규연은 한참 동안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규연아, 이거 봐. 이렇게 누워서 하늘 보면 재미있다?”
“그러다 뒤집어져서 울지, 또.”
“아니야, 이렇게 보고 있으면, 허읍!”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디 봐. 물먹었지.”
튜브가 뒤집혀서 물을 먹어도, 나루는 마냥 즐겁다는 듯 헤실거렸다. 걱정 없이 맑기만 한 얼굴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규연은 나루를 따라 웃어 버렸다.
그래, 뭐가 됐든, 송나루가 즐거우면 그만이지.
“…….”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규연이 이제 막 수영장으로 다가오는 무리를 싸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중에는 낮에 봤던 성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루 몰래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던 규연은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는 튜브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나루의 몸을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왜?”
“슬슬 가야지, 계속 물에만 있으면 감기 걸려.”
“나는 더 놀아도 괜찮은데….”
“배 안 고파?”
“맛있는 거 주려고?”
“어, 숙소 들어가서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어린아이를 꾀어내듯 나루를 달랜 규연이 수영장을 벗어났다. 나루가 튜브를 소중히 껴안고 숙소로 걸어가는 동안, 규연은 성원을 견제하며 눈을 부라렸다. 아까 그렇게 욕을 처먹고도, 성원의 눈이 나루에게 향해 있는 게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빨리 와, 규연아!”
“갈게.”
나루의 부름에 시선을 거둔 규연이 숙소로 들어와 버렸다. 배고프긴 한 건지, 들어오자마자 간식을 찾던 나루가 핫바 하나를 입에 문 채 욕실로 향했다. 안 좋은 습관이지만, 먹으면서 씻으려는 모양이었다.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닦아낸 후, 대충 옷을 갈아입은 규연은 나루가 씻고 나오길 기다리며 사다 놓은 재료를 확인했다. 오늘은 뷔페에 가지 않고, 숙소 앞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울 생각이었다.
싱크대 위에 재료를 꺼내놓은 규연이 채소를 다듬고 있을 때였다. 잠잠하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유규연 사장님 핸드폰 번호 맞죠? 저는 그, 저번에 주문 주셨던 계란….
이 시점에 하필이면 업무 전화가 걸려 왔다. 게다가 중요한 재료들이 걸린 전화라 미룰 수도 없었다.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듯 미간을 짚은 규연이 손질하던 채소를 두고, 숙소 밖 테라스로 나왔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나온 나루는 텅 빈 부엌을 보며 의아해했다. 분명 규연이 있어야 하는데, 숙소 그 어디에도 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밖까지 나와 본 나루는 전화 중인 규연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중요한 전화야?’
‘어, 잠시만.’
그 앞까지 다가간 나루가 입 모양으로 묻자, 규연이 잠시 기다리라며 손짓을 보냈다. 나루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입 모양으로 얘기했다.
‘나, 음료수만 사 와도 돼?’
허락을 구하는 말에 규연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자, 나루가 외투를 챙겨 입은 후 지갑을 챙겨 숙소 근처 자판기까지 향했다. 테라스가 안 보일 때까지 걸어 온 나루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규연이 바쁜가 보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은 나루가 다시 숙소 방향으로 몸을 틀어 발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였다.
“나루! 여기 있었어? 우리 지금 바비큐 파티하는데, 빨리 와.”
“어…? 저는, 아니, 아까 상황이 조금.”
“아까 일은 괜찮아, 오해가 있으셨나 봐. 아무튼 지금 빨리 가야 해.”
“나, 아, 안 돼요! 지금 가면 규연이가 화내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성원이 나루에게 달려와 대뜸 손을 이끌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던 나루가 고개를 젓자, 성원이 괜찮다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나루가 원치 않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성원에게서 묘하게 옅은 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안 된단 말이에요…!”
“잠깐, 정말 잠깐이잖아. 고기만 먹고 가라니까. 우리 약속 기억 안 나?”
“그, 그건 그러니까.”
“먹고 가, 알겠지?”
결국, 성원의 막무가내로 나루는 옆 동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한창 바비큐 파티가 이루어지고 있는 테이블 위에는 고기가 한가득 쌓여 있었고, 술과 음료도 여러 개가 뜯어진 채였다. 성원의 친구들은 모두 나루를 반기며 고기를 덜어 주고, 컵에 음료도 따라 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 빨리 규연이한테 돌아가야 하는데…!
도망칠 기회를 엿보던 나루가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봐, 재미있는 분위기잖아. 술은 잘 마셔?”
“아니요. 저 그냥 가는 게,”
“아아, 나루야. 조금 더 놀다 가. 나랑 친구도 해 줘, 번호 뭐야?”
어울리지 않게 앙탈을 부리던 성원이 나루의 어깨를 붙잡아 끌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나루는 몸을 비틀며 성원에게서 빠져나가려 했다. 이런 광경을 규연에게 들켰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송나루.”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서늘하게 불린 이름에 온몸이 굳은 나루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규연과 어느새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성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