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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의 휴가 (10) (127/130)

나루의 휴가 (10)

파앙! 공이 탱탱볼처럼 튀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우락부락한 남자들 사이에 낀 나루는 어느새 어색함을 지워내고 공놀이에 전념했다. 오랜만에 하는 공놀이라 그런가, 흥이 올라서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어어, 조심해요. 또 물먹으면 큰일이잖아.”

“아, 감사합니다!”

“진짜 예의 바르다. 좀 편하게 해도 되는데.”

“아, 아니에요. 그래도 그건 좀.”

나루가 발을 헛디뎌 휘청이자, 남자가 허리를 단단히 받쳐 줬다. 거침없는 스킨십에 재빨리 몸을 뗀 나루가 한 걸음 물러서자, 남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 뒤로도 이와 비슷한 스킨십이 이어졌다. 공을 넘겨줄 때마다 손이 닿기도 했고, 나루가 넘어질 뻔하면 다가와서 선뜻 몸을 지탱해 줬다.

공놀이가 치열해졌을 즈음, 지친 나루가 외곽으로 빠져 숨을 골랐다. 온종일 혼자 놀다가 공놀이에 끼려니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힘들어요?”

“조, 조금이요. 하아….”

“뭐라도 마시면 괜찮을 텐데, 제가 이온 음료라도 가져다줄게요.”

“저, 저기! 괜찮아요. 안 마셔도 돼요.”

어떻게 알고 따라 나온 남자가 이온 음료를 가져오겠다며 나섰다. 나루는 황급히 그 행동을 저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신나게 놀긴 했지만, 음료를 받는 것까지는 좀 선을 넘는 것 같아서 거절한 거였다.

나루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남자는 알겠다며 여유롭게 상황을 넘기고, 나루의 옆에 섰다.

“저는 한성원이에요. 저기라고 하지 말고, 그냥 성원이라고 불러요.”

“아아, 네. 그렇게 부를게요.”

“그쪽은? 이름이랑 나이가 어떻게 돼요?”

자연스레 통성명이 이루어졌다. 남자의 이름은 성원이었다. 나루는 손가락을 들어 제 나이를 세어 보고, 조심스레 이름과 나이를 얘기해줬다.

“이름은 송나루고, 나이는 으음, 스물둘이에요.”

“나보다 한 살 어리네요? 말 놔도 되나?”

“…이미 놓으셨는데요.”

“하하! 너 진짜 귀엽다.”

나루보다 한 살 많은 성원이 한참 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며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시금 정리하던 나루는 그런 성원을 몰래 쏘아봐 주었다.

규연이만 내 머리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나루가 어떤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그저 해맑게 웃던 성원이 본격적인 잡담을 시작했다. 나루는 짧은 시간 안에 성원의 압축된 인생사를 들을 수 있었다. 성원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체육교육과에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나루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살아 온 환경이 완전히 달랐다.

색다른 대화 주제에 나루가 눈을 반짝거리자, 흥이 오른 성원이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다.

그렇게 십여 분 동안 대화를 나눴을까.

“아, 맞다. 우리 내일 바비큐 파티 할 건데, 너도 올래?”

“바비큐?”

“고기 많이 사 왔거든. 워낙 많이 먹는 애들이라.”

“아, 고기…!”

바비큐 파티. 고기. 나루를 설레게 하기 충분한 단어였다. 잠시 고민하던 나루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규연이한테도 같이 가서 먹자고 해야지.

규연이 들으면 어이없을 만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한 나루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고개 끄덕였어. 정말 오는 거다?”

“네, 갈게요.”

공짜 고기다, 공짜 고기. 속으로 흥얼거리던 나루가 힘껏 점프하며 수영장 밖으로 나왔다. 바비큐 약속도 잡았겠다, 공놀이도 점점 지쳐 가니 규연에게 돌아갈 작정이었다.

성원은 아쉽다는 티를 내면서도, 내일 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나루 또한 성원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규연이 누워 있는 선베드까지 뛰어갔다. 신난 강아지 같은 걸음으로 총총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에 성원이 몰래 웃음을 삼켰다.

“야, 한성원! 너 거기서 뭐 하냐. 슬슬 가자, 배고파 인마.”

“어, 가자.”

나루가 규연에게 다가가기 전, 등을 돌린 성원이 친구들과 함께 수영장을 나섰다.

한편, 나루는 막 깨어나 앉은 규연의 옆에 쪼르르, 달려갔다. 오래 자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한 규연은 나루의 몸을 익숙하게 안아 주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여태까지 물속에서 논 건지, 나루의 몸이 축축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놀았어?”

“응, 이제 다 놀았어!”

나루가 이제야 만족했다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체력도 대단하다며 중얼거리던 규연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혼자 놀았다기엔 꼴이 말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열심히 놀았다고?

아까는 얌전히 헤엄만 치더니, 이건 꼭 격하게 움직이며 논 모양새였다. 머리카락은 물에 흠뻑 젖어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고, 옷도 조금 구겨진 채였다.

뭐, 신나게 놀았으면 된 거지. 별생각 없이 넘기려던 규연의 시선이 문득 저 멀리 어딘가에 닿았다. 시선 끝에는 이제 막 수영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

“규연아, 왜?”

“…아니야.”

설마, 저것들이랑 같이 논 건 아니겠지. 잠시 나루를 의심하던 규연이 생각을 접고 일어섰다. 앞에서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루를 보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그래, 얘가 아무리 사교성이 좋아도 그렇지. 저렇게 단체로 놀러 온 인간들 틈에 껴서 놀았을 리가. 내가 이제 별걱정을 다 한다, 참 나. 속으로 생각하던 규연이 헛웃음을 쳤다.

규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배고파하던 나루가 목소리를 내었다.

“규연아, 나 배고파. 저녁 먹으러 가자.”

“이 시간까지 안 쉬고 놀았으니, 그럴 만도 해.”

“우리 뭐 먹어?”

“여기서 제공하는 뷔페가 있다는데, 거기 가 볼까. 별로면 내가 따로 만들어 주고.”

“갈래, 갈래! 뷔페 갈래!”

뷔페라는 말에 흥분한 나루가 규연의 손을 무작정 잡아끌었다. 물에서 노느라 배가 정말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규연은 그런 나루에게 끌려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방방거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흐뭇해졌다.

숙소 측에 마련된 뷔페는 규연의 생각보다 괜찮았다.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음식도 종류가 많은 게 제법 그럴싸했다. 대충 옷만 갈아입은 나루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새도 없이 뷔페까지 내려왔다. 지금은 규연보다 먼저 접시를 집어 들고, 순서대로 음식을 퍼 담는 중이었다.

와, 맛있는 거 천국이다. 볶음밥도 많고, 고기도 여러 개야. 과일이랑, 음료랑, 초밥이랑, 이게 다 뭐지.

감탄을 금치 못한 나루가 뷔페를 빙빙 돌며 음식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와 달리, 규연은 먹을 만한 음식만 조금씩 담아 착석했다.

“이거 봐, 맛있겠지.”

“많이 먹어라, 이따 힘들 텐데.”

“응? 나 이거 까 주라.”

“…….”

규연이 불순한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이따 숙소에서 나랑 섹스하려면 힘들 텐데, 지금 많이 먹어 두라는 뜻의 농담이었다. 하지만, 나루는 그걸 알아듣지 못하고 규연의 앞에 용과와 리치를 내밀었다. 먹는 방법을 모르니 대신 까 달라는 말투가 당당해서, 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얘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우와, 맛있다….”

일부러, 라고 하기엔 눈빛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곱게 까인 과일 알맹이를 입에 쏙, 넣은 나루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순수해서, 무어라 말하려던 규연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여행을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섹스 타령을 하던 나루는 누구보다 건전히 풀빌라를 즐기는 중이었다. 오히려 역으로 안달이 난 건 규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해가 다 진 저녁. 나루의 시선을 빼앗아 갈 만한 것들이 모조리 이용 불가해지는 시간대였다.

속으로 나름의 계획을 세운 규연이 냅킨으로 입가를 정돈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루 또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규연을 따라 일어섰다.

“이제 다시 숙소로 가는 거야?”

“응, 저녁이잖아. 이젠 숙소에서 쉬어야지.”

“오늘 엄청 재미있었어. 내일 또 수영할 거야.”

“강아지가 아니라 물고기 아니냐.”

“아니거든! 강아지거든!”

사소한 장난을 치던 규연이 나루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새하얀 볼이 찹쌀떡처럼 늘어지는 게 신기해서 여러 번씩이나 잡아당겼더니, 나루가 아픈 소리를 냈다.

“으응…!”

“…….”

그 소리가 신음과 비슷해서, 순간 규연의 손이 멈칫했다. 나루는 그런 규연을 뒤로한 채 숙소 문을 활짝 열었다. 이상하게 처음 들어올 때보다 내부가 더 말끔해진 것 같았다. 멍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온 규연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숙소 상태를 점검했다.

거실, 깨끗하고. 욕실도, 깨끗하고. 문제였던 스파 시설까지 완벽히 깨끗해졌다. 그럼 뭐, 문제없겠네.

잠깐, 나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뭐가 문제없다는 거야.

규연의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규연아, 나 먼저 씻고 나올게!”

“…어.”

먼저 씻겠다며 외친 나루가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 규연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제 뺨을 한 대 내리쳤다.

유규연 미친 새끼야, 나루가 얘기할 땐 절대 안 된다고 거절했으면서, 왜 네가 더 안달을 내는 건데.

규연이 소파에 걸터앉아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막 씻고 나온 나루가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 소리에 놀란 규연이 고개를 돌리자, 나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기서 뭐 해, 규연아? 안 씻을 거야?”

“어, 씻어야지.”

“응, 나는 누워 있어야겠다.”

“누워 있겠다고?”

“응! 얼른 씻고 와야 해.”

저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규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됐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나루는 어서 씻으라며 규연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답을 알아내지 못한 채 욕실로 들어온 규연은 찬물로 머리를 식혔다.

머리카락을 말린 나루는 침대에 홀로 누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규연과 섹스할 생각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내일은 뭐 하고 놀지? 일단, 밤에는 규연이랑 같이 바비큐 파티에 가자고 하고, 으음.

제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 나루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때, 씻고 나온 규연이 젖은 머리를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고 있어.”

“나 누워서 생각했어. 내일 놀 생각.”

“…벌써 졸린 건 아니지?”

“으음, 모르겠어.”

순진한 대답에 규연의 속이 탔다.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고 뒤돌아선 규연은 곧장 침대로 향했다. 나루가 감기에 걸린다며 머리를 말리라고 했지만, 그런 말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던 규연이 갑작스레 거리를 좁혀왔다.

쿵, 쿵, 쿵. 나루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침대 위에서,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보다니. 어딘가 부끄러웠다. 나루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자, 자기 전에 뽀뽀…!”

가까워졌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은 나루가 규연에게 쪼옥, 하고 입술 도장을 찍었다. 가벼운 인사 식의 입맞춤이었으나, 규연의 눈이 끝내 뒤집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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