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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의 휴가 (9) (126/130)

나루의 휴가 (9)

다음 날 아침, 휴가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이른 시간부터 일어난 규연이 준비를 서둘렀다. 며칠 동안 입을 옷을 캐리어에 담고, 나루의 짐까지 대신 챙기는 손짓이 익숙해 보였다. 어젯밤까지 직원들에게 미안해서 어쩌냐며 걱정하던 나루는 소파에 앉아 신난 듯 발을 흔들거리는 중이었다.

“먼저 차에 타 있어, 거의 다 했으니까.”

“응, 빨리 와야 해.”

차 키를 건네준 규연이 현관문을 향해 턱짓했다. 나루는 외투를 챙겨 입고, 먼저 현관을 나섰다. 덜컹,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 거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나루의 캐리어를 깔끔히 닫아 정리한 규연은 일어서려다 말고, 뜬금없이 서랍장을 열었다.

잘 사용하지 않는 서랍장 안에는 콘돔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규연이 언젠가 사두었던 콘돔이었다.

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던 규연은 망설임 없이 콘돔을 집어 제 캐리어에 툭, 던져 놓았다. 이로써 두 사람의 짐이 완벽히 준비되었다.

양손에 캐리어를 챙긴 규연은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짐을 실었다. 조수석 너머로 동그란 뒤통수가 보이는 걸 보니, 나루는 이미 떠날 준비가 끝난 듯했다.

“가자.”

“와, 휴가다! 휴가!”

“어제까지 미안하다면서 울려고 하더니, 좋냐.”

“그, 그건 그러니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신이 난 나루가 휴가를 외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규연의 말에 딴청을 피웠다.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이미 잊은 모양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규연이 그런 나루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차는 빠르게 달려 서울을 벗어났다. 평일이라 그런지, 길이 막히지 않아 드라이브하는 맛이 날 정도였다.

기대된다, 규연이랑 같이 가는 여행!

창문 밖을 구경하던 나루가 헤실헤실 미소를 지었다. 그리 멀지 않은 국내지만, 함께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붕붕 떴다. 오늘만큼은 규연 또한 기분이 좋아 보였다.

*** 

도착한 풀빌라는 사진으로 본 것과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낮이라 그런지, 불빛도 들어와 있지 않았고, 반짝거리던 외벽은 어딘가 낡아 보였다. 나루는 규연이 왜 이곳을 청결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뒤늦게서야 이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사진과 외형이 조금 다르면 어떤가. 지금 내가 신이 나는데! 거의 뛸 듯이 걷던 나루가 예약한 숙소 문을 힘차게 열었다. 내부는 나름 깔끔한 편이었다. 방금 막 걸레질을 했는지, 바닥에서 광이 다 났다.

“이거 봐, 이게 스파야? 신기하다.”

“어, 맞아. 발 들이지 말고 기다려.”

짐을 내려놓고, 나루의 뒤를 천천히 따르던 규연이 숙소 이곳저곳을 꼼꼼히 둘러봤다. 일단 바닥은 제대로 닦아 놓은 거 같은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낀 규연이 스파 안으로 발 들이려는 나루를 저지시켰다. 그러고는 매서운 눈으로 시설을 훑어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청소가 덜 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출처 모를 머리카락 하나가 붙어 있지를 않나, 군데군데 물때가 끼어 있지 않나.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루가 워낙 신나 하는 게 보여서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규연아, 뭐 해?”

“잠깐 다른 곳 구경하고 있어.”

“응, 빨리 와!”

나루를 먼저 내보낸 규연이 곧장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루의 숙소 예약 정보에서 알아낸 번호였다.

[스파 시설, 따로 마련된 욕조 전부 상태 최악입니다. 수영장 이용하고 오는 동안 깨끗하게 청소해 놔 주세요. 두 번 말 나오지 않게 최대한 철저히 청소해 주세요.]

규연은 일부러 까탈스러운 말투를 사용했다. 이러지 않으면 대충 청소한다는 걸 알기에, 더 단호하게 군 것이다.

이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루는 며칠 전부터 이런 장소에서 규연과 섹스하고 싶어 했다. 심지어 그 요구에 참다못한 규연이 폭발하듯 휴가를 앞당기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무조건 저 스파 시설을 불건전한 목적으로 사용하게 될 텐데. 더러운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규연아, 저기 밑에 수영장 보여! 빨리 놀러 나가고 싶다.”

“…….”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불순한 목적으로 청소 상태까지 깐깐히 따지던 규연은 순진한 나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분명 애인을 생각해서 하는 행동인데, 이상하게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나루는 이전의 제 언행을 다 까먹은 것 같았다. 언제는 수영장에서도 하고, 스파에서도 하자더니, 막상 풀빌라에 도착하니 그저 놀 생각에 들떠서 방방 뛰어댔다.

“나가자, 수영장 들렀다가 오면서 밥 먹게.”

“좋아, 나 얼마나 수영 잘하는지 보여줄게!”

“…어, 그래.”

숙소 측에서 답장이 도착했다. 바로 청소하러 오겠다는 문자였다. 규연은 수영장으로 가자며 나루를 이끌었다. 이것저것 챙겨 든 나루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벌써 수영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규연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섹스는 무슨, 온종일 수영만 하게 생겼네. 모든 게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와아, 물이 따듯해! 너도 들어와 봐!”

얇은 반소매 티셔츠에 수영복 바지를 입은 나루가 곧장 물 안으로 몸을 담갔다. 야외에 있는 수영장이라 그런지, 물이 따듯하게 데워져 있어서 오랜 시간 놀 수 있을 듯했다. 나루를 따라 몸을 담근 규연은 쨍쨍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찰방, 찰방! 힘찬 물소리가 들렸다. 나루는 개헤엄을 자랑하며 규연의 앞에서 뽈뽈거리며 떠다녔다. 손발이 허우적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나루의 미간이 좁혀졌다.

집중, 집중. 입으로 중얼거리며 헤엄치던 나루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규연의 배에 머리를 콩 가져다 박았다.

“아야.”

“참 나.”

“너는 수영 안 해?”

“너 노는 것만 봐도 충분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치던 규연이 나루를 향해 물을 튀겼다. 장난스러운 태도에 실실 미소를 짓던 나루가 대뜸 규연의 품에 파고들었다. 애교스러운 행동에 규연이 자그마한 몸을 끌어당기며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이자, 나루가 아이처럼 웃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좋아?”

“응, 규연아. 우리 이따 밥도 맛있는 거 먹자.”

“그래, 너 좋아하는 걸로 사 줄게.”

평범한 커플 같은 대화가 오갔다. 밥이라는 말에 기대한 나루가 물속에서 통통, 뛰더니 다시금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지치지도 않는 체력에 감탄한 규연은 나루에게 맞춰 주며 함께 물장난을 쳐 줬다.

두 시간 후, 규연은 물속에서 먼저 나왔다. 애초에 물에서 노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었기에, 이 정도면 무리하며 놀아댄 수준이었다. 파라솔 아래 선베드에 누운 규연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나루를 발견하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주었다.

누구보다 건전하게 노시는구만, 송나루. 저러다가 지쳐서 섹스하자는 소리도 안 하겠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던 규연이 갑작스레 인상을 확, 구겼다.

설마, 진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루는 몇 시간 내내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규연은 간만의 낮잠을 즐길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저기까지 5초 안에 도착하기. 하웁!”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된 나루는 수영장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이용하는 중이었다. 놀러 나온 사람들도 없어서 그런지, 이 넓은 수영장이 다 자기 것 같았다.

“와, 야, 수영장 물 졸라 따듯해!”

“미친놈아, 던지지 말라고오옥!”

그때였다. 저쪽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수영장 물이 크게 일렁거렸다. 낯선 목소리에 놀란 나루는 경계하듯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바라본 곳에는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서로 격한 장난을 치며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뭐지?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다 같이 놀러 온 건가. 호기심 어린 나루의 시선이 남자들에게 꽂혔다.

슬금슬금. 개헤엄을 치는 방향이 점차 남자들 쪽으로 바뀌어 갔다. 정작 규연은 이 상황도 모르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나루는 남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적정 거리를 두고 남자들이 노는 걸 관찰하다가, 재미있어 보이면 똑같이 따라 하며 놀았다.

“오오, 몸을 이렇게 쭉 뻗으면 헤엄을 더 빨리 칠 수 있구나….”

몰래 남자들의 수영 스킬까지 빼앗아 가며 실력을 늘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정신없이 팔을 휘저으며 나아가던 나루가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와, 깜짝이야! …괜찮으세요?”

“아, 어풉, 콜록!”

“아이고, 물먹으셨나 보다. 어떡해.”

넘어지며 물을 먹은 나루가 괴로운 기침을 쏟아냈다. 나루와 부딪친 남자는 거리낌 없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짧은 사이, 남자가 나루의 외모를 티 안 나게 훑어보았다.

하얗고 뽀얀 피부에, 다소 살집이 없어 왜소해 보이는 몸, 순하니 귀여워 보이는 얼굴. 나루의 외형은 쉽게 호감을 살 법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런 걸로 뭘.”

기침이 잦아들고, 정신을 차린 나루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어색한 공기에 뻘쭘함을 느낀 나루는 곧장 뒤돌아서서 규연에게로 향하려 했다. 아무리 사교성이 좋다지만,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영 민망스러웠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 그런데 혼자 계신 거 아니에요?”

“네?”

다시 헤엄쳐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남자가 그런 나루를 붙잡았다. 놀란 나루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계하니, 머쓱하게 웃던 남자가 천천히 설득해왔다.

“저희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셔서요. 저희 다 대학생이고, 이제 스물셋이에요.”

“아아, 네….”

“마침 이걸로 놀려던 참인데, 머릿수가 안 맞았거든요. 같이 하실래요?”

스물셋이라면, 나루와도 나이 또래가 얼추 맞았다. 낯가림이라는 게 없어 보이는 남자는 특유의 시원스러운 웃음을 뽐내며, 나루의 앞에 공을 내밀었다. 비치발리볼을 할 때 사용하는 가벼운 공이었는데, 그걸 물 안에서 가지고 놀려는 모양이었다.

커다랗고 동그란 공. 심지어 물에 던지면 둥둥 뜨는, 재미있는 공!

“같이 해요, 혼자 놀면 재미없잖아요.”

“…….”

“야. 어때, 다 괜찮지?”

나루의 시선이 공에 꽂혔다. 무늬까지 예쁘게 새겨진 공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남자는 이때를 노려 나루를 꼬드겼다.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자, 이쪽을 힐끔거리던 남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는 고개를 돌려 규연이 누워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규연은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규연이도 자고 있으니까, 이 사람들이랑 조금만 놀아야겠다.

결정을 내린 나루가 좋다는 의사를 내비치며 소심하게 대답했다.

“그럼 공놀이에만 끼워 주세요…!”

긍정적인 대답에 신이 난 남자가 자연스레 나루의 손목을 붙잡고 친구들 쪽으로 이끌었다. 같은 남자끼리인데도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게 수상했지만, 나루는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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