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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의 휴가 (8) (125/130)

나루의 휴가 (8)

“허업.”

주차장 내부를 확인한 나루가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주차장 구석에는 반쯤 주저앉아 있는 건혁과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규연이 있었다.

TV 드라마에서 본 재벌들은 귀하게 자라서 이런 거친 행동을 제 손으로 하지 않던데, 규연이는 다르구나.

때아닌 감탄을 하던 나루는 눈을 데구륵, 굴려 규연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규연의 겉모습은 매우 깔끔했다. 흙더미에 구른 듯한 건혁의 행색과는 달랐다.

칼, 칼은 어디에 있지? 아까 저 자식이 들고 있던 칼은.

이 사실만으로 안심하지 못한 나루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칼을 찾았다. 설마, 아직도 건혁의 손에 칼이 들려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중 시선 끝에 번쩍이는 물체가 들어왔다. 저 먼 바닥에 떨어진 칼이 서늘한 날을 빛내고 있었다. 얼마나 반짝거리게 닦아 놨는지, 좁은 면적으로 규연과 건혁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어, 여기에 있네요! 여기요! 여기!”

“세상에, 사장님! 괜찮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어머, 나루 씨도 있었구나. 얼른 이리 와요!”

이미 규연이 건혁을 제압해 놓은 상황이었지만, 나루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금세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리더니 발소리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루는 놀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주차장에 들이닥친 건후와 서연, 그리고 경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루를 뒤늦게 발견한 서연이 잽싸게 다가와 팔을 잡아끌어 안전한 장소까지 데려다 놓았다.

순식간에 정신 복잡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다니. 경찰이 건혁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규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루는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일단 서로 같이 가셔서 자세한 이야기를….”

경찰이 무어라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 눈을 매섭게 뜬 규연이 멍하니 서 있는 나루를 압박하듯 은근히 쳐다봤다.

흠칫.

맞다, 나 규연이가 하지 말라는 짓 했었지.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었는데. 이거 사고 친 거 아닌데….

날카로운 눈초리에 쪼그라든 나루가 속으로 억울한 점을 줄줄이 읊었다. 그러면서도 규연의 눈은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게 우스웠다.

“일단 가시죠.”

“가게 잘 보고 있어. 퇴근하지 말고.”

경찰들과 함께 차에 타려던 규연이 나루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모습을 감췄다. 내뱉는 말이 어찌나 단호하던지, 나루는 반박할 생각도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르르릉.

그 뒤로 건혁이 제 앞을 스쳐 지나갈 땐 언제 풀 죽었냐는 듯 이를 갈았다.

이게 다 저 도건혁 때문이야. 쟤가 정신 못 차리고 미친 짓을 해서 그래! 나는 그냥 평화를 지키려고 쫓은 게 다인데.

나루의 분노와 원망이 담긴 눈빛이 건혁에게 꽂혔다.

“나루 씨, 우리 일단 카페로 돌아가요. 사장님이랑 건후 씨까지 경찰서로 가면, 우리 둘만 남아서 정신없을 거야.”

“…네.”

복잡한 상황 속에서 홀로 정신을 찾은 서연이 황급히 나루의 어깨를 쳤다. 건후까지 경찰서에 가게 돼서 당장 일할 직원이 줄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차 여러 대가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서연과 다시 카페로 복귀한 나루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품은 채 일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도건혁은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나는 안 가도 되는 건가? 규연이가 말을 잘한 건가…. …이게 문제가 아니지. 난 이제 규연이한테 죽었다.

시무룩해진 나루가 터덜터덜, 홀로 걸어가 걸레질을 시작했다.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건 언제나 즐거웠지만, 오늘만큼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했다.

* * *

하늘은 나루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늘따라 시계가 왜 이렇게 바쁘게 흘러가는지,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힘이 축 빠졌다.

저녁 여섯 시. 퇴근하지 말라던 규연의 당부에 따라 마감 청소를 미리 조금씩 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딸랑-

가게 문이 열렸다. 손님이 오신 줄 알고 반갑게 고개를 들던 나루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어머, 사장님. 건후 씨. 오셨어요?”

“…….”

몇 시간 만에 얼굴이 험악해진 규연이 가게 입구에 떡하니 서 있었다. 건후 또한 경찰서에서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나루의 동공이 지진 난 듯 떨렸다. 마치 대형 사고를 쳐 놓고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의 꼴처럼.

“어떻게 됐어요?”

“아, 흉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해서 일이 좀 커질 것 같아요. 일단 접근 금지 신청이랑….”

옆에서 건후와 서연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루는 거기에 멀쩡히 끼어들어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규, 규연이 눈 무섭다.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쓸어 넘긴 규연은 여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루의 앞까지 다가왔다.

터벅. 터벅.

발소리가 유난히 두려워서, 나루는 최대한 모르는 척 눈을 순진하게 뜨고 규연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응시했다.

“나 봐.”

“넵.”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규연의 명령조에 바짝 긴장한 나루가 쓰지 않던 존댓말을 사용하며 대답했다. 규연의 눈을 마주한 나루는 분노 섞인 집요한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또 다시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굴려 버렸다.

“얘기 좀 하게 따라와.”

“어, 어어.”

규연과 나루 사이에 맴도는 공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서연은 눈치껏 빠져주며 멀뚱히 서 있는 건후를 챙겼다.

안 돼, 나를 버리지 마세요. 저한테도 아는 척 좀 해 주세요!

나루는 울상을 지으며 멀어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디 봐.”

“아, 아니야.”

규연은 나루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고 나와 뒷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규연이 진짜 많이 화났나 봐….

호구처럼 잘해 주기만 하던 규연이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꼭 처음 만났을 때의 규연을 보는 느낌이었다. 나루는 콩콩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규연을 올려다보았다.

쿵!

“으악!”

“야 송나루, 너 내가 아까 얼마나 놀랐는지 알긴 하냐, 어?”

“…어, 으응.”

“무슨 짓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 너 진짜, 하,”

대뜸 나루를 벽으로 몰아붙인 규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말투가 꽤 거칠고 험악했으나, 결국은 나루를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큰 소리에 놀란 나루는 눈만 깜빡이며 소심한 대답을 내뱉었다.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아니, 규연이 소리 지르니까 무섭고, 호랑이 같고….

나루의 머릿속은 당황하면 할수록 실처럼 엉키곤 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튀었다가, 정신 사나웠다.

규연은 나루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잔소리에 가까운 화를 표출했다.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찌푸려져 있던 눈썹은 펴질 생각을 안 했고, 시선 또한 여전히 매서웠다.

“내가 항상 위험한 짓 좀 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넌 내 말이 들리지도 않지. 송나루.”

“…….”

잘 들리는데. 나도 귀가 있어서, 정말 규연이 말 잘 들렸는데. 분명 위험한 짓 하지 말라는 거 듣긴 했는데.

나루는 입을 꼭, 다물고 속으로만 대답했다. 속마음을 그대로 뱉으면 규연이 크게 화낼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대답 안 해?”

“어, 으, 응.”

“며칠 전에도, 내가 분명 뒷문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쓰레기 버리는 거 다른 사람한테 시키라고.”

“…어어, 미안.”

폭풍처럼 들이닥치는 잔소리에 일단 사과부터 하고 보자며 눈을 질끈 감은 나루가 툭, 미안하다는 말을 던졌다.

어, 이게 아닌데. 나는 조금 더 정성으로, 그러니까, 내가 왜 미안한지 말하려고 했는데.

그래, 그렇게 사과를 하긴 했지만, 나루의 의도와는 다른 사과가 되어버렸다. 영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무미건조한 사과. 덕분에 규연의 인상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반대로 나루의 눈썹은 추욱, 늘어졌다.

“너 지금 그게 태도가, 하, 미안하다는 애가….”

“…….”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규연은 분노를 한 번 꾹, 눌러 참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튼 제발 사고 좀 치지 마, 응? 내 옆에서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 나루야.”

“아니, 어, 규연아. 그런데 너가 아침에, 그, 내가 풀빌라에서 해 보자고 했을 땐 막 떨어지라고, 그랬잖….”

이게 아닌데? 내 입아, 그만 얘기해. 왜 이게 지금 생각나서!

살살 잘 달래 보려고 다정하게 내뱉은 말이었건만, 정작 나루는 그런 규연의 속에 장작을 집어넣는 걸로 모자라 기름까지 부으며 불을 지폈다. 이것 또한 전혀 의도치 않은 말이었으나, 규연이 나루의 속마음을 알 리 만무했다.

오, 마, 망했다. 나 정말 일부러, 내가 일부러 저렇게 말한 건 아닌, 데….

위기를 감지한 나루가 슬금슬금 도망치려 하자, 규연이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큼지막한 손이 연약한 어깨를 부서질 듯 붙잡으니 나루의 한쪽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규, 규연아.”

“이 상황에서까지 그런 말이 나와…?”

“…이게 내가 일부러 그런 게,”

“가자, 가.”

“어어?”

말을 정정하려던 나루의 목소리가 무참히 씹혀 버렸다. 잠깐이었지만, 나루는 느낄 수 있었다.

규연이가 이제 체념했구나. 내가 너무 고집을 부렸나. 갑작스러운 긍정의 대답에 당황한 나루가 눈을 끔뻑거렸다. 사실 진심으로 원했던 것보다는, 거절당해서 오기를 부렸던 거였는데. 이번에도 져 준다는 듯 대답하는 규연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멋쩍게 볼을 긁적이던 나루가 은근슬쩍 눈치를 볼 때였다. 규연이 대뜸 나루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어? 사장님, 바로 퇴근하시는,”

“알아서 마감하고 퇴근해. 내일부터 송나루랑 나, 휴가니까 알아두고.”

“네?”

휴가까지 아직 조금 남았는데, 규연이 제멋대로 휴가일을 앞당겼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스케줄 조정에 당황한 서연이 되물었지만, 규연은 들은 체도 않고 가게를 빠져나가 버렸다.

어라,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울상이 된 표정으로 가게 안을 바라보던 나루가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건후와 서연은 저들끼리 패닉에 빠져 있느라 나루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차를 끌고 나온 규연은 조수석에 나루를 태워 놓고, 묵묵히 운전대를 잡았다. 직원들에게 대형 폭탄을 던져 놓고 나온 주제에 참 태평했다. 의도치 않게 직원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한 나루는 규연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규, 규연아, 내가 미안해. 아까는 당황해서, 내가, 그렇게 말하려고 한 게 아닌데…!”

“…….”

“진짜야. 진짜인데. 규연아…?”

“어차피 갈 거, 조금 더 일찍 간다 생각해. 네가 그렇게 원하는 줄 몰랐지.”

“…….”

그렇게까지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큰일 났다.

핀트가 엇나간 대답에 몸을 움찔거린 나루가 규연의 운전석 시트 뒤를 힐끔거렸다. 차라리 규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 보아도 이 차 안에는 자신과 규연 말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일단 문자로라도 미안하다고 보내 놔야 하나?

규연이는 왜 하필 사장님이어서! 이상한 핑계를 대던 나루가 슬쩍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돌렸다. 갑자기 빠지게 되어 미안하다는 메시지는 전 직원에게 전송됐다. 다행히, 직원들은 괜찮다며 나루를 달래주었다. 규연의 제멋대로인 행동에는 이미 익숙해져서 타격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래서 규연이도 마음대로 구는 거였어. 악덕 사장님….

몰래 규연의 흉을 보던 나루가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혹시라도 제 속마음을 들킬까 무서워 일부러 딴청도 피웠다.

그나저나, 기대하던 휴가가 이렇게 빨리 다가오다니. 직원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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